언행일치의 삶을 향한 몸부림
독서모임을 처음 한 건 대학교 신입생 때였다. 한 선배가 학과 공부에 도움이 될 거라며 나와 친구들을 꼬셨다. 등록금 투쟁에 진심인 선배였다. 뭔지도 모르면서 선배를 따라간 건 어딘지 대학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학생은 논다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그럼에도 내 안 어딘가에는 대학생스러운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입시에 목을 매는 고등학교와는 다른, 술만 퍼마시며 시간을 탕진하는 게 아닌, 어떤 심오한 세계가 대학에는 있어야 한다고 막연히 믿어왔던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모임에 들고 선배가 추천하는 책들을 읽었다.
유시민 작가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을 시작으로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등을 읽은 게 이 때였다. 스무 살 성인이 됐다지만, 사회를 보는 눈도 없고, 비판적인 시선도 키우지 못한 내게 이런 책들은 너무 어렵기만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입안에서 글자들이 버석거렸고, 문장을 반복해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 머리를 잡아 뜯었다. 말이 독서모임이지 거의 선배가 하는 말을 듣는 것에 그치는 수동적인 모임이었다.
그 선배를 따라한 건 단지 독서모임만이 아니었다. 예비역 선배들과 모여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하고, 학우들을 상대로 찬성 서명을 받기도 했다. 광화문에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선배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다고 나서 선거운동을 한다며 밤낮으로 쫓아다니기도 했다. 학과 공부보다는 그런 것들에 매달린 2년이었다. 그 선배는 내가 그때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에 가장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각종 사회 문제들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내게는 어떤 분노가 내재돼 있긴 했지만, 뚜렷한 의식은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과는 어딘가 다른 그 선배가 멋져 보였다.
그 선배와 함께 하는 걸 그만 둔 건 언론고시를 준비하면서부터였다. 마이크를 잡고 말하는 게 좋았던 꼬마가 자라 대학교 3학년이 되자, 이제는 슬슬 무언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 잡혔다. 그렇게 기자, PD, 아나운서 등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스터디 모임을 하기 시작했다. 모임은 매주 이어졌다. 각자 담당하는 신문에서 중요한 기사들을 스크랩해 언론사별 논조를 비교하고, 논술을 쓰며 서로의 글을 합평했다. 신문을 계속 읽다보니 신기하게도 선배를 따라 다니며 어설프게 주워들은 말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쇠 귀에 경읽기'인줄 알았는데, '서당 개 삼 년'이었던 걸까. 그렇게 내게도 조금씩 내 의견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 시간들이 내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알지 못했다. 내 의견이 많지 않아 듣는 날이 더 많았고, 들어도 세상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모두가 말하는 이상과 실제 삶과의 괴리가 아주 크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를 욕하면서도 돈을 좋아했고, 노동자의 삶을 위대하다 말하면서도 노동의 종류에 따라 가치를 다르게 부여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어갔다. 강남좌파라는 용어가 막 언급되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어설프게 생각이란 걸 갖게 된 나는 이십대 내내 상당히 모순된 삶을 살았다. 사람의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키가 큰 훈남이었다. 돈의 유무로 사람을 가르면 안 된다면서,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만 만나고 싶어 했다. 학벌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학벌이 좋은 사람을 우러러 보았고, 겉보기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명품을 많이 걸친 사람들을 동경했다.
괜찮은 결혼을 해보겠다며 소개팅만 수차례하던 때도 있었다.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났다. 소개팅했던 남자들을 1호남, 2호남이라 지칭하며 끝없이 비교하고 저울질했다. 조건만 보니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좀체 만날 수 없었다. 그 시절 했던 모든 소개팅이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 버렸다. 단 한 명과도 사랑을 시작하지 못한 채 뜬구름 잡는 만남만을 지속했다.
내 안에서 서서히 바람이 일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모순을 견디지 못하는 내 안의 숨겨진 기질이, 봉인된 십 수 년의 세월을 뚫고 튀어나왔다.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언행불일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던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걸까. 진짜 나는 어디로 가고, 보이기 위한 삶을 추구하는 빈 껍데기만 남았나. 이런 모순 속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싶었다. 말하고 생각한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모순된 삶에서 탈출해야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걸 바꾸어야 했다. 내가 자란 이 도시에서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초의 인간처럼 다시 시작해야 한다. 긴 생각 끝에 하던 일을 그만 두고 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행지에서라면 그런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낯선 세계에서라면, 나도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허름한 옷 몇 벌, 신발 한 켤레, 세면도구, 수건 두 장, 카메라 한 대, 모자 하나 정도를 가방에 꾹꾹 눌러 담고 언제 돌아온다는, 어디로 간다는 기약도 없는 여행을 떠났다. 해가 뜨면 숙소를 나와 해가 질 때까지 걸었다. 하루 이만 보쯤은 거뜬히 걸었던 시간들.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과 하늘을 응시했다. 그러다 또 툭툭 털고 일어나 걸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가 걸었던 그 길들은 다른 세계로 나가는 터널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바람과 함께 흩어지거나 완전히 새로운 내가 되고 싶었다.
그런 시간들을 통과하고 나니 나는 정말 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더 이상 명품이 탐나지 않았고 높은 학벌이나 연봉에 고개를 숙이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도 끊임없이 일관된 인간이 되기 위해 순간순간 나를 다잡았다. 내 안의 편견과 모순들을 최대한 걷어내기 위해 매순간 애를 썼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 안의 분투가 지속되던 무렵, 새로 알게 된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사람을 재지 않는 것 같아요.” 태어나 내가 들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세상을 알아가고 공부를 지속하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내 시선은 더 단단해진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삶의 기준으로 삼되, 끊임 없이 나를 점검한다.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영원히 옳을 수는 없기에. 시대에 따라 새로운 가치에 따라 생각을 달리 하려 노력한다. 그럴수록 나는 더 평온해지고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내가 깨닫고 공부한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을 사랑한다.
사실 나는 여전히 내 자신과 싸우고 있다. 이제 머리와 가슴은 제법 동일해졌지만, 여전히 발을 잘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이나 글,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는 달라진 나를 드러낼 수 있지만 거기서 그치고 만다. 세상으로 나가 내가 깨달은 것들을 실천하는 과제가 아직 남아있다. 말이나 글로만 떠들면 자꾸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진다. 말이나 글이 앞서지 않고 몸이 바짝 따라가는 사람이고 싶다. 그 시절 선배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건, 아직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머리와 가슴과 발을 일치할 수 있었는지.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 - 쇠귀 신영복 -
내가 지금까지 통과해온 시간들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었다면, 이제 내가 가야할 길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다. 실천하는 삶, 현장을 누비는 삶, 숲을 걷는 삶을 살고 싶다. 나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찾아가고 있다. 글쓰기 모임은 그 신호탄이었다. 부끄럽게도 여전히 나는 주저하고 망설인다. 모든 걸 제쳐두고 여행을 떠났을 때처럼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그 선배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는 그런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