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났어. 어떡해."
"왜 무슨 일인데?"
타사 여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지방 의회에 출입하고 있는 기자였다.
"K선배가 지금 H선배 불러서 막 따지고 있어. H선배가 박기자에 대해서 뭐라고 떠들고 다녔다며?"
K선배는 목소리가 유달리 큰 사람이었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거침 없는 사람. 나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벌인 일이었다. 앞이 캄캄해졌다. 대체 어쩌자고. 왜.
"거기 사람 많아?"
"많지. 여기 출입기자들 거의 다 있어. 의회직원들도 좀 있고. 복도가 쩌렁쩌렁 울려. 이게 뭔 일이야. 괜찮아?"
오래된 일이고, 기억은 여기저기 끊겨 있다. 명확하지 않지만 하나 분명한 건, 나는 끝내 K선배에게 그날 왜 그런 짓을 벌었느냐고 따져 묻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과야 어찌 됐든 표면적으로 K선배는 날 위해 그런 일을 벌인 것으로 비춰졌다. 나중에는 '내게 나쁜 감정이라도 품고 있었나'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모두와 싸우는 건 내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일이 처음이니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몰랐다. 내 감정을 속으로 처리하기도 힘든데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우선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먼저였다. 내가 제일 먼저 화를 내야 하는 상대는 H선배였다.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어려운데 동시에 앞날까지 생각해야 했다. 마침 남몰래 다른 방송사에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지방 신문사의 월급은 그야말로 박봉이었다. 차 기름값이나 휴대폰 비용이 지원되지도 않았고, 근무 시간도 길었다. 인원이 부족해 하루 많게는 대여섯 개의 기사를 마감해야 했다. 같은 지방 언론이라도 그나마 방송사의 대우가 좀 나은 편이었다. 이직을 생각한 건 돈이 가장 큰 이유였고, 방송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조금 작용했다. 그렇게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던 중에 사건이 터진 것이다.
H선배와는 함께 동거동락 하다시피 하며 매일 기사를 함께 썼다. 누구보다 일 양이 많은 걸 서로 알고 있었다. 지나친 박봉이라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면, 서로를 향한 응원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든 날들이었다. 좀 푼수같고 수다스럽긴 해도, 내게는 꽤 힘이 되는 존재였다. 성적 농담들만 견딘다면, 내가 그의 성적 노리개가 되지만 않는다면. 내 착오였다. 애초에 여자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차단해야 했다.
이 바닥에 들어온 뒤로 흔한 스캔들 하나 내지 않고 버텨왔다. 기자들끼리 연애를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눈길 한번 주고받지 않았다. 여기서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가 워낙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라, 혹여 말이 나돌까봐 옷차림부터 말투, 행동까지 주의를 기울이며 다녔다. 누구보다 조심했고, 그런 나를 누구보다 잘 알아 후배인데도 나를 어려워한 사람이 H선배였으니, 아무리 많은 여자를 입에 올려도 나는 아닐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몰래 이직을 준비하고 있어 마음이 불편하던 차였다. 내가 빠지면 H선배와 밑에 후배는 허덕일 게 분명했다. 서로 의지하던 관계를 끝내고 나 혼자 몸을 옮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경력기자 한 명만 뽑는다기에 별 기대 없이 지원하고 면접을 보았다. 복잡한 마음 속에서 살던 때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무실에 있는 후배에게 H선배가 들어왔는지를 물었다.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고 했다. 선배 바로 옆자리가 내 자리였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H선배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자리로 갔다. 거의 대부분의 직원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걷고 있는 나를 주시하는 것만 같았다. 내 자리에 선 채로 선배를 바라봤다. 선배는 내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노트북으로 기사를 쓰고 있었다.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꽤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괜한 말이 와전되느니 내 입으로 크게 한번에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어차피 이 바닥의 모든 사람들이 한동안 내 이야기를 입에 올릴 것이었다. 차라리 내 입으로 명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말하자. 할 말을 준비했던 것 같다. 준비한 말을 다 했는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눈물을 흘렸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또렷한 건 몸이 너무 떨렸다는 것.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심하게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목소리 역시 심하게 떨렸다. 사람이 큰 분노에 휩싸이면 몸이 이렇게 격정적으로 떨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말이 끝난 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기며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건 분명 없었지만, 그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 무작정 나오니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후배부터 부장님, 국장님, 이사님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두번 말하기 싫어서, 내가 겪은 일을 또 입에 담기 싫어서, 모두가 들으라고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었는데, 피해자에게 처음 전화를 걸어서 하는 말이 무슨 일이냐. 사무실로 들어와라. H선배가 있지만 그래도 와라. 사과할 기회는 줘야지. 그렇게 예상치 못한 개소리의 향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