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읽고 쓰는가. 너무 진부해서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글을 쓴다. 진부한 걸 알면서 왜 이 글을 쓰냐면, 읽고 쓰는 게 내 삶이기 때문이다. 한 해가 끝나가는 시점에 나는 내게 묻는다.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는가. 그걸 한번 말해보고 싶다. 나는 왜 읽고 쓰는가. 학위를 받을 것도 아니고,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대단한 부를 축적할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쓴다.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사는가.
꾸준히 읽고 쓴다
꾸준히 읽기 시작한 건, 4년쯤 되었다. 꾸준히 읽는다는 건 하루에 한 장이라도 책을 읽은 날을 말한다. 4년 전에는 꼭 읽어야 하는 책이 있거나,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때만 읽었다. 책을 아예 안 읽는 사람은 아니어서 일 년에 몇 권 정도는 읽었다. 4년쯤 전부터는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 끊이지 않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문학을 읽다가 인문사회과학 책을 읽다가... 분야는 이리저리 통통 튀어 다닌다. 특정한 무엇을 공부하겠다는 마음보다는 그때그때 관심사를 좇고, 읽히는 책을 읽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쓰는 것 역시 꾸준히 쓰기 시작한 건, 15개월쯤 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500자 이상의 글을 쓴다. 홀로 정한 규칙이다. 공개할 수 있는 글을 쓰면 플랫폼에 올리고, 그렇지 않은 글은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에 저장한다. 쓰는 것도 읽는 것처럼 꾸준하진 않아도 계속 쓰긴 해왔다. 예전에는 갑자기 무언가가 너무 쓰고 싶어질 때만 글을 썼다. 하지만 15개월 전부터는 매일 쓰고 있다. 에세이도 쓰고 가끔 소설을 쓰고, 현안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학위를 받을 사람도 아니고, 읽고 쓰는 행위로 사회에서 인정을 받아 돈을 벌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읽고 쓰는가.
재밌어서 읽는다
나는 재밌어서 읽는다. 아침에 학교 보호자 동아리인 책 읽기 모임 멤버들이 우리 카페로 모였다. 모임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읽기로 한 책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였다. 모두 아는 얼굴이라 손님이 없으면 나도 꼽사리를 낄 요량으로 책장을 뒤져 오랜만에 <총, 균, 쇠>를 꺼냈다. 지금 읽고 있는 <WEIRD위어드>와 나란히 놔두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책 말미에서 의문을 남긴다. 각 대륙마다 문명의 발달 속도 차이가 왜 일어났는지는 알겠는데, 왜 같은 유라시아 대륙에 있으면서도 중국이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는가. 제도와 쇄국정치 등 몇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걸 연결할 만한 고리를 찾지 못해 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 앞에 <총, 균, 쇠>가 나온 지 이십여 년만에 그 고리를 드디어 찾아낸 <WEIRD위어드>가 놓여있다. 인간의 끊임없는 탐구 정신에 전율이 느껴졌다.
독서 모임 멤버들은 거의 문학책만 읽다가 이런 책을 읽으니 오랜만에 전공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왜 이 책을 읽었느냐고. 내 대답은 간단했다. 재밌어서. 원래 역사와 과학에 관심이 많아요. 관심은 많지만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은 없다. 뒤늦게 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여러 사정상 포기한 내게, 책은 여건이 되지 않아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살 수 없다면 빌려보면 되니까. 모든 책이 잘 읽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선택한 책을 어떻게든 읽어 내려가는 건,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책을 읽을수록 문과와 이과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책을 읽을수록 지금 여기의 나와 지구 반대편의 너가 연결된다. 책을 읽을수록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눈이 자라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 책만큼 재미면에서 만족감을 주는 걸 찾기가 어렵다.
책에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십 년 동안 고민한 것들이 담긴다. 벽돌책을 읽으면 한 번에 열 권의 책을 읽은 느낌이 든다. 책을 덮고난 뒤 긴 여운이 따른다.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우리의 세상은 당연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모든 것엔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다. 누군가가 치열하게 의문을 던지고 고민하고 연구한 것들이 책에 담긴다. 지역마다 도서관이 있어 그런 고뇌의 산물도 의지만 있다면 무료로 얻을 수 있다. 이따금 책을 읽고 내가 이렇게 쉽게 이 사람의 성과를 흡수해도 되나, 너무 거저먹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인류가 축적해온 수천 년의 노하우를 담아낼 수 있는 건 책 밖에 없다. 책을 읽다 보면 관심사가 점점 넓어지는 게 느껴진다. 가보지 않은 길도 두드려볼 용기가 생긴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 김영민 교수는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공부가 있음을 영원히 모른 채로 죽지 않기 위해서. p76
책 말미에 나오는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호모사피엔스가 노려볼 만한 어떤 고양된, 성스러운, 초월적인 계기가 세 가지 정도 있다고 보는데 그중 하나가 책이 아닌가 합니다. 책이라는 걸 읽는 행위 자체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잖아요. (중략) 아무튼 책을 꼭 읽어야 하나요? 물으면 사실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만, 책은 인류가 발명한, 사람을 경청하게 만드는 정말 많지 않은 매개 중 하나죠. 그렇게 경청하는 순간 우리가 아주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자세요. p318
나는 읽는 속도가 느리다. 이해하는 속도도 결코 빠르지 않다. 어려우면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한다. 처음에는 이런 내 특성 때문에 조급해졌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고, 읽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시간은 한정적인데, 나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더 많은 걸 알고 싶은데, 더 깊게 알고도 싶은데, 난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나보다 먼저 읽기 시작한 데다 빨리 읽고 잘 이해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어느 순간 깨달은 건, 삶도 그렇듯 독서도 자신의 페이스대로 하는 게 가장 만족스럽단 사실이었다. 삶도 타인의 잣대로, 타인이 살아가는 대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삶인데도 내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베스트셀러를 쫓고, 타인이 읽는 속도를 따라가려고 하면, 정작 내게 남는 게 없다. 책을 읽어도 무엇을 읽었는지 모르는 것. 책은 남과 경쟁하기 위해 읽는 게 아니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읽는 것뿐. 그걸 깨달은 뒤부터는, 늦게 읽더라도 남들이 읽지 않는 책을 읽더라도, 내가 지금 읽고 싶은 책을 내게 가장 잘 맞는 속도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니 독서는 다시 즐거움이 되었다.
즐거워서 쓴다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쓰는 게 즐거워서 쓴다. 쓰지 않으면서 작가를 꿈꾸기만 했던 이전에는 쓰는 걸로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글을 매일 쓰기 시작하면서는 책을 내고 싶어 몸이 달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계속 쓸 수 있어 감사하고 책을 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등단을 하거나 책을 내는 건 목표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계속 쓰는 삶에서 한 번쯤 벌어지는 사건 같은 것. 공식적인 작가가 된다고 내게 갑자기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지 않는다. 등단을 했지만 책을 꾸준히 내지 못하는 작가도 많고, 책을 몇 권 냈지만 여전히 쓰는 것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작가는 완성된 글을 써낸 사람이 아니라, 글을 계속 쓰는 상태라고 믿는다. 나는 계속 쓰고 있으니, 스스로를 작가라 생각한다. 남들은 인정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내 자신의 인정을 받으며 쓴다. 매일 좋은 글을 쓸 수는 없겠지만,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씀으로써 조금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거면 충분하다. 여전히 하얀 백지를 펼칠 때마다 가슴이 주책없이 설렌다. 살면서 이렇게 순수하게 마음 놓고 좋아할 무언가를 만난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아님 말고' '그럼에도'
최근에 독서와 관련한 동영상을 우연히 두 개나 보게 되었다. 하나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강연이고, 하나는 최재천 교수의 강연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강연에는 박찬욱 감독의 가훈이 나온다. "아님 말고" 최근에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참 강해." 나는 왜 강할까. 원래 강했을까. 아니다. 나는 결코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스스로도 내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강할까.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유연하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유연해지면 내면이 강해진다. 책을 못 내면 어쩌지? 아님 말고. 하고 싶은 걸 못 하면 어쩌지. 아님 말고. 하루하루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만, 일생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꼭 무언가를 해야 하고,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속박된 일상이지만, 나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산다. 내가 강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최재천 교수는 말한다. "독서는 빡세게 해야 한다. 독서는 일이어야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알아가는 행위가 결코 쉬울 리 없다. 독서는 내게 큰 즐거움인 동시에 일이다. 매일매일 꼭 해야만 하는 일.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나를 위해 하는 일. 이를 통해 나는 강해진다. 더 유연해진다. 나는 잘 모르기에 아직도 더 배워야 하고, 배우고 익힐수록 더 유연해진다. 배울수록 더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운 삶이란 자기 이유로 사는 것이라는 말을 기억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자유가 아닐까. 몸이 아닌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더 진정한 자유가 된다.
읽고 쓰는 건 내 삶의 이유이자 유일한 목표다. 매일 빡세게 읽고 쓰지만 나는 자유롭다. 읽고 쓸수록 흔들리지 않는 내가 된다. 종교인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행복하다고 믿는다. 나는 무신론자지만 누구보다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며,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읽고 쓴다.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어도 괜찮다. 적어도 나는 알고 있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읽고 쓰는 행위로 아주 조금은 나아졌다는 걸. 죽는 날까지 내가 하고 싶은 건 그것뿐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는 것. 흔들리지 않는 내가 되는 것. 읽는 만큼 유연해지고, 쓰는 만큼 강해지는 걸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니 오늘도 읽고 쓴다. 호모 사피엔스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큰 가치가 여기 있다고 믿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nNyS4srTrn4
https://www.youtube.com/watch?v=tSlGJmlWw0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