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조용했다. 정말 그랬다. 비수기라 손님도 많지 않았고 딱히 진상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불특정 다수가 방문하는 카페에 아무 일이 없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문제는 한동안 조용해 무탈함을 당연하게 여겨왔다는 것. 무탈이 행복이라고 그리 글로 써놓고는 무탈이 장기화되자 이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를 좀 잊고 있었다.
어제부터 슬슬 이상한 조짐이 보였다. 유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카페로 들어왔다. 영어와 한국어가 반반씩 섞인 문장으로 대화를 했다. 셋 모두 똑같은 화법이었다. 주로 단어들을 영어로 쓰는 유학생들은 많이 봤는데 영어로 문장을 말하다 중간에 한국어로 문장을 완성하는 기이한 대화법이었다. 목소리도 쩌렁쩌렁해 오랜만에 영어 듣기평가하는 기분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벌어졌다. 여자 손님이 컵을 들다가 남은 커피를 온 천지 뿌리듯 쏟아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쏟았지 싶을 정도로 테이블, 의자, 쿠션, 벽, 바닥 여기저기에 커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말을 뱉었다. 두세요. 제가 치울게요. 그래 인사치레다. 서비스 업종이니까. 손님은 왕이라니까. 나도 모르게 입에 밴 문장이 튀어나온 것이다. 물론 마음으로도 내가 치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짜다.
행주, 걸레, 휴지 등 온갖 종류의 닦을 거리를 모두 들고 사건현장으로 갔다. 현장은 예상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일부러 이렇게 쏟으라고 해도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우선 행주로 테이블을 구석구석 닦았다. 닦으면서 떨어진 샷잔을 줍고,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그릇과 컵들도 쟁반으로 옮겼다. 다음으로 걸레를 들고 의자를 훔쳐냈다. 휴지로는 벽을 닦았다. 바닥걸레로는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커피를 치웠다.
그래도 한 번은 손님이 휴지라도 들고 닦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다. 아니면 떨어진 샷잔이라도 주워주던가. 손님은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만 두 번쯤 했을 뿐이다. 상황을 모르는 일행 남자 손님이 화장실에서 나오며 영어로 물었다. 왓 헤픈. 그니까 뭔일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여자 손님은 웃으면서 낫띵이라고 말했다. 뭐. 아무 일도 아니라고? 이게? 내가 지금 개고생하는 거 안 보여?
남자 손님이 나온 뒤부터 둘은 내내 코트만 부여잡고 닦았다. 남자분 코트에도 커피가 묻은 모양이었다. 남자분은 기분이 나쁜지 별 말 없이 벅벅 닦는데 몰두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여자분은 어쩔 줄 몰라하며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코트 주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닦고 닦다 결국 테이블 의자를 모조리 빼내고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 손님은 단 한 방울의 커피도 자신의 손으로 닦지 않았다.
나는 화가 많은 편이 아니다. 특히 손님에게는 더 그렇다. 9년 동안 별의 별 인간을 다 만나왔기에 웬만하면 그러려니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일을 계속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어제는 코트만 닦아내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욱 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지금 내가 쪼그려앉아서 닦는 거 안 보여? 너가 저지른 걸 내가 다 치우고 있는 거 안 보이냐고? 내가 치우겠다는 말 한 마디했다고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한다고? 진짜 너무하는 거 아냐?
입 밖으로 막 튀어나오는 말을 꾹꾹 눌러 다시 삼켰다. 끝까지 그들은 코트만 닦았고 나는 온천지를 대청소했다. 돌아서며 생각했다. 화장실 쓰레기통에 쉬를 갈겨놓은 미친놈도 있었지. 변기에 똥을 처발라놓은 사람도 있었고. 방향제를 훔쳐간 사람, 의자를 부러뜨린 사람, 커튼을 대놓고 찢고도 사과 한 마디 없이 간 사람도 보았지. 그래. 참자.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연초에 애들이 독감에 걸려 액땜이라 생각했는데 이것도 액땜이라 치자. 그렇게 간신히 화를 눌렀다.
오늘은 괜찮을 줄 알았다. 어제 진상을 만났으니 오늘은 조용하겠지. 마침 제빙기가 고장나 수리하는 기사님이 오후에 카페를 방문하셨다. 불룩 나온 배를 앞세워 터벅터벅 걸어오시는 기사님은 인상이 무척 좋아보였다. 9년 동안 어떻게 수리 한 번 안 하고 썼느냐며 깨끗하게 잘 썼다고 칭찬도 해주셨다. 수리를 한다고 주방으로 들어와 제빙기를 앞으로 빼놓고 있는데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와 잔뜩 주문을 했다.
주문을 받고 돌아서려는데 발을 디디는 느낌이 이상했다. 내려다보니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이거 왜 이러죠. 하수구에 연결되어 있던 제빙기 호스가 빠졌나보네요. 물은 점점 많아져 주방쪽 바닥이 완전 한강이 되어버렸다. 이걸 언제 치우지.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가뜩이나 좁은 주방에 기사님과 빼놓은 제빙기 사이를 오가며 간신히 메뉴를 내갔다. 평소보다 시간이 세 배는 걸렸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넋 나간듯 바닥을 바라보았다. 몸과 마음이 정지한 상태로 있는데 방금 메뉴를 내간 테이블 손님이 소리를 지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주스를 엎질렀다. 어제처럼 온천지 흩뿌리지는 않았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주스여서 쏟은 양이 한 눈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주스가 흥건한 홀 바닥과 물이 찰랑이는 주방 바닥을 보자니 당장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이걸 언제 다 치운담.
마음을 가다듬고 어제처럼 행주와 걸레와 휴지를 들고 사건현장으로 갔다. 이번 손님은 그래도 테이블 위는 거의 다 직접 닦으셨다. 자리만 다른 쪽으로 옮기시라고 양해를 구하곤 어제와 같은 순서로 주스를 닦아냈다. 커피와 다르게 잘 닦이지 않아 여러번 걸레를 빨아와 벽과 바닥을 훔쳐내야 했다. 그리고 바닥걸레를 가져와 좁은 주방 사이를 오가며 물을 닦아내고 걸레를 짜는 일을 수차례 반복했다.
내가 그러는 동안 기사님은 차분히 한강 위에 욕실의자를 깔고 앉아 제빙기를 이리저리 살펴보시곤 문제가 생긴 부분의 부품의 갈아끼우셨다. 물을 다 닦아내자 바닥 위에 종이박스를 찢어서 깔고 누우시더니 빠진 하수구 호스도 힘겹게 끼워넣으셨다. 바닥에 누워 작업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리저리 뛰어다닌다고 잔뜩 짜증이 났던 마음이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고생하신다 정말. 이 시골까지 오신다고 운전도 한참 하셨을 텐데. 기사님 허리춤에 달린 차키가 대롱 거린다. 누구나 자신만의 규칙을 갖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글로 써야지. 그 정신 없는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들어었다. 제정신인 건가. 스스로도 좀 어이가 없었다. 그나저나 의뢰받은 글 하나를 시댁 가기 전에 마무리해야 하는데, 기사님이 예정보다 빨리 도착해 쓰다 말았다. 오늘 저녁엔 짐도 싸야 하는데. 언제 쓰지. 퇴고는 또 언제 하지. 갑자기 머릿 속이 복잡해졌다. 기사님은 다른 곳이 고장나면 오래된 제품이라 맞는 부품이 없어 못 고칠 수도 있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가셨다. 이 와중에 참 침착하신 분이다.
9년을 쓰고 수리비로 십만오천 원이 나갔다. 새 제품으로 바꾸면 몇 백이었을 텐데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엉망진창인 하루인 줄로만 알았는데 수리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었구나. 글감을 하나 얻었고 제빙기를 고쳤으니 이걸로 족하다고 주문을 건다. 나만의 멘탈 정화 과정이다. 이것만 남기고 나쁜 기억은 모두 지워야지.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것만, 긍정적인 사람은 긍정적인 것만 뇌에 남긴다 하니, 나는 긍정적인 것만 남길 테다. 액땜이고 뭐고 삶이 다 그렇지뭐. 아무 일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이 정도면 무탈한 거지.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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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으로 끼적이는 나를 보고 남편이 묻는다. 그 의뢰받은 거 쓰는 거야? 아니 오늘 짜증났던 거 쓰고 있는데. 글로 써야 마음이 진정될 거 같아서. 남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그나저나 그건 언제 쓰지? 으악 오늘은 아무래도 밤을 새워야 하나. 무탈한 날 맞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