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커피를 좋아한다. 사실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잘 쓰지 않는다. 괜히 썼다가 업으로 삼고 있는 분야에 대한 얕은 지식이 탄로 날까 두렵기도 하고, 맛이라는 게 정답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업을 떠나 어쨌든 나는 미지근한 커피를 좋아한다. 혀를 델만큼 뜨겁지도 않고 머리가 찡해질 만큼 차갑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뜨뜻미지근한 커피.
원두 한 스푼을 덜어 그라인더에 넣고 조금 굵은 입자로 갈아 필터에 쏟는다. 팔팔 끓는 100도 가까운 물을 포트에 담아 나선형을 그리며 갈아놓은 원두에 조금씩 붓는다. 모든 걸 녹여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물도 원두입자와 공기, 필터를 거치면 열기를 조금 식히게 된다. 그렇게 내린 드립커피의 온도는 보통 80도 정도.
80도도 입술에 대기에는 아직 좀 뜨거운 상태다. 내려둔 커피를 잊고 잠깐 다른 일을 하다가 돌아볼 때쯤이면, 커피는 마시기 좋은 상태가 된다. 적당한 온기를 머금어 후후 불지 않아도 되고, 커피가 가진 향과 맛이 한치의 왜곡도 없이 혀에 전해지는 온도. 그때의 커피를 사랑한다. 그 온도가 되면 향을 코로 느끼며 한 모금의 커피를 입안에 잠시 머금었다 목구멍으로 흘려보낸 뒤, 입 안에 맴도는 마지막 여운을 감상한다.
입천장이 홀라당 까질 것만 같은 온도에서는 맛의 결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음식을 하다가도 너무 뜨거운 상태의 국물을 맛보며 간을 하면 낭패다. 온도는 맛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감추기도 한다. 지나치게 높은 온도의 음식이 입으로 들어오면 덜 짜고 덜 맵게 느껴진다. 그러니 소금이나 간장, 고춧가루 등을 지나치게 많이 넣게 된다. 국물이 어느 정도 식은 뒤에야 자신이 지나치게 간을 했다는 걸 알아챈다.
커피도 마찬가지로 너무 높은 온도로 마시면 담고 있는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온도가 너무 낮아도 마찬가지다. 높은 온도일 때는 맛의 왜곡이 발생한다면, 낮은 온도일 때는 맛의 희석이 일어난다. 뜨거움은 맛을 굴절시켜 뭉뚱그려지게 하고, 차가움은 향을 날려 보내는 동시에 맛의 일부도 앗아간다. 뭉개지지도 날아가지도 않은 상태의 커피를 맛보려면 미지근한 상태가 제격이다. 온도가 특징을 잃는 대신 맛이 도드라지게 되는 것.
뜨거운 커피를 주문하든, 차가운 커피를 주문하든, 결국 어떤 온도의 커피도 최후에는 미지근해진다. 주변 공기의 온도와 얼음의 양에 따라 속도가 다를 뿐,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는 모두가 비슷한 온도의 커피를 홀짝이게 된다. 마치 처음부터 한 온도였다는 듯. 물론 뜨거움에서 시작한 커피의 최후의 맛과 차가움으로 시작한 커피의 최후의 맛은 다르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온도로 귀결된다. 내 주위를 감싼 공기의 온도.
커피를 좋아하고 커피가 업이지만, 하루에 한 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타고나기를 카페인에 그리 강하게 태어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커피에 의존하기 싫은 마음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두통이 생기지 않을 만큼만 마시려 한다. 이따금 그리 절실하지 않은 날에는 커피를 거르기도 한다. 그게 음식이든 사람이든 내게 의존은 좀 두려운 존재다.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인 건지, 나는 늘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상태의 나를 떠올리고 대비한다.
사랑은 하되 매달리지는 않고, 책임은 지되 의존하지는 않는다. 잠시 기댈 때도 있지만, 평온을 찾으면 다시 나는 내 두 발로만 땅 위에 서려한다.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은 채. 그저 혈혈단신 나로. 커피뿐만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도 어느새 미지근해진 탓일까. 돌이켜 보면 이십 대의 나는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웠다. 불같이 뜨겁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화염병처럼 튀어 다니다가도 살얼음처럼 쩍쩍 갈라지곤 했던 지난날.
지금의 나는 배고프지 않을 만큼만 먹고, 중독되지 않을 만큼만 커피를 마시며, 필요한 만큼만 일한다. 지나친 배부름이 느껴지면 포만감보다 불쾌감이 올라오고, 커피를 마시지 않아 머리가 지끈 거리면 일일 카페인 섭취량을 잘 조절하지 못했구나 싶다. 일이 너무 많아지면 몸과 마음이 무너지니, 적당히 적절히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자극적인 음식을 찾아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커피를 두세 잔씩 들이키며, 일을 벌이고 늘려서 하던 이전의 나는 이제 없다.
열정이 사라진 탓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삶에 대한 자세가 달라졌다. 영양제를 하나도 먹지 않는데, 영양제보다 소식을 하는 게 더 건강하다 믿기 때문이다. 천성이 게으른 사람이라 몸이 무거워지면 더 일으키기 어려울 것이기에 배부르게 먹지 않게 되었다. 순간의 자극보다는 일상의 평온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이렇게 미지근하게 산다 해서 삶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느린 속도로 갈 수 있어 겹겹의 맛을 온전히 곱씹을 수 있다. 너무 뜨겁거나 차가워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이런 미지근한 온도에서는 선명히 보인다.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사실 내가 뜨겁거나 차갑지 않아도, 삶이라는 소용돌이는 늘 제멋대로 내 온도를 올리고 내릴 것이기에. 그 속의 나라도 늘 미지근하기를, 흔들림 없기를. 어떤 소용돌이도 결국 내 온도를 따라 이내 안정을 찾기를. 적당히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한다. 역시 이 온도가 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