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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Sep 22. 2022

안녕하세요, 무관심한 카페입니다.

카페 9년차지만, 나는 그리 살가운 주인장이 아니다. 처음 카페를 열었을 때 지인들이 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멀리서 일부러 찾아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어찌 해야할지 몰랐다.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눠야할지 서비스를 줘야할지, 아니면 그냥 혼자 혹은 함께 온 사람과 시간을 보내도록 내버려둬야 하는 건지.


전혀 모르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도 그랬다. 작은 카페다보니 손님과 주인장의 거리는 가까웠다. 언제든 말을 걸 수 있는 거리였던 것. 말을 걸어오는 손님이라면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떤 게 적정 선인지 알지 못해 괴로웠다.


고민을 하다 내가 선택한 건 ‘따뜻한 무관심’이었다. 주문을 받고 음료를 내갈 때, 손님이 내게 무언가 질문을 해올 때는 최대한 따뜻하게 대하지만, 그 외에는 관심을 최소화했다. 다른 손님께 큰 피해가 가지 않는 이상 자연스레 원하는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했다. 몇 시간을 있든, 무슨 행동을 하든. 아이가 있는 손님의 경우도 아이가 가게 물건을 산산조각 내지 않는 이상은 돌아다니든 소리를 지르든 상관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원래 그런 법이니.


그래서일까. 이따금 세상이 멈춘 듯한 시간을 보내는 손님들이 있다. 핸드폰도 책도 보지 않고 그저 앞에 놓인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창밖만 응시하는 그런 손님. 그런 분들을 만나면 나는 카운터 아래 숨어 노래를 고른다. 그 분위기를 깨지 않고 오래 지속하기 바라는 마음에 최대한 무드를 이어갈 수 있는 곡을 연이어 틀곤 한다. 물론 손님은 모른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나는 숨어있으니. 그런 손님들은 나가시면서 다시 들르겠다는 말을 하신다. 다시 들르기에는 너무나 힘든 외딴 섬의 작은 카페인데, 내게 그 말은 퍽 따뜻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내 태도에, 섬이라는 지역 특성이 더해지면 단골이 생겨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손님들도 1-2년만에 찾는 경우가 다반사다 보니 내가 기억하기를 굳이 바라지 않는다. 간혹 직접 말을 하신다. 몇 년 전에 왔었는데, 언제 누구랑 왔었는데. 그러면 또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진심으로 감사하기에. 섬에 얼마나 예쁘고 좋은 카페가 많은데 우리 카페를 몇 번이나 왔다니.


그런 내게도 잊을 수 없는 손님들이 있다. 얼굴도 목소리도 함께 나눈 대화도 기억에 남는 분. 그 중 한 손님이 청첩장을 보내왔다. 올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사장님께는 왠지 보내드리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며 보내온 사진 속에는 손님과 몇 번 뵌 적이 있는 오랜 남자친구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랑스런 사진들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나는 참 감사했다. 내가 뭐라고. 별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선물이나 축의금을 보낸다고 하면 손사래를 치실 것 같아 고민 끝에 내가 결혼 전 끄적였던 글을 보내드렸다. 누구보다 바쁘고 정신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분께 글을 읽는 아주 잠깐의 시간만이라도 쉼을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진짜 결혼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조금 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받은 손님은 너무나 기뻐했다. 여러  읽겠다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 고마운  정작 나인데, 이런 것밖에 보내지 못해 마음이 너무 미안하기만 한데도 그랬다. 무관심하고 무뚝뚝한 주인장에게 끝없이 따뜻한 손님이라니. 내가 그럴만한 사람인가 싶어 괜히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따뜻한 무관심’은 사실 내가 바라는 타인의 태도이기도 하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 좋지만, 내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부담스럽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게 보여주는 관심이 감사하지만, 그게 아니라 낯선 사람인데 내게 너무 많은 질문을 쏟아놓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끝없이 털어놓으면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나는 내가 받고 싶은 만큼의 친절을 손님에게 베푼다.


카페를 운영한 지 9년차가 되니, 이제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나와 제법 닮아있다. 모든 손님이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손님들의 대체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하다. 여러 번 온 것 같은 손님도 내게 굳이 말을 걸지 않는다. 특별한 대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나 역시 최대한 편한 시간을 보내라며 관심을 줄이고 기본에 충실한다.


몇 안 되는 얼굴을 아는 손님 하나가 어느 날 내게 그랬다. 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비슷해. 인스타도 잘 안 하고. 조용하고. 개인주의자고. 복잡한 거 싫어하고. 그 손님의 말을 들으며 손님도 나도 크게 웃었다. 섬을 사랑하지만, 섬의 변화를 못내 안타까워하는 그 손님은 그렇게 바람처럼 왔다가 또 바람처럼 가셨다. 그리고 어느 날 또 바람처럼 들르시겠지. 여기는 꼭 와야 한다며.


언제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못난 체력을 내려다볼 때마다 내 자신에게 묻는다.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커피를 내리고 싶었는데, 가능한 일일까. 장사는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자리를 지킨다는 건 머문다는 것. 나만의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 글과 사람이 있어 그나마 나의 평범한 하루가 평범하지만은 않은 하루가 된다. 특별히 감사한 하루가 이렇게 사람으로 완성되었다.





부록. 결혼을 앞둔 손님께 보낸 선물(십년 전 글이라 많이 부족합니다만…)


드레스를 골라야 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 모든 신부들이 그렇듯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세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신부라는 듯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야 한다. 다들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절차에 따라 비슷하게 살아가겠다고 맹세하는 결혼. 문득 바보같다. 결혼은 전통과 나 사이의 적절한 타협이라는 문구가 생각난다.


생각보다 이른 결혼이다. 내 생애 결혼은 아주 늦게나 찾아올 줄 알았다. 나는 한국사회의 결혼이라는 제도에 불신을 갖고 있고 결혼 후 모두 비슷한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게 무척 못마땅했다. 한때는 아이도 낳고 싶지 않았다. 차근차근 모은 돈은 결국 결혼을 위한 것임이 내게는 한때 그렇게 못마땅했다. 그래서 나는 그 돈을 들고 미친 여행의 길을 떠났다. 그러던 내가 이제 결혼을 한다.


결혼이 낯선 미혼들은 내게 묻는다. 어떻게 확신이 들었냐고. 인연 따위를 믿지 않는 내가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냐고.


나는 그를 확신하지 않는다. 그가 내게 많은 돈을 벌어준다거나 호강을 시켜줄 거란 상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가 나를 일으켜줄 거라 믿는다. 부족한 그가 부족한 나를, 부족한 내가 부족한 그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것을 믿는다.


이제 나는 진짜 인생의 제 2막을 시작한다. 선택은 내려졌고 길은 하나다. 옳은 결정이 되도록 잘 사는 것. 그것 단 하나다. 나는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간다. 가다가 넘어지면 또 일어설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아무도 내 인생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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