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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Feb 04. 2023

합평, 그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에 대해

  돌이켜 보면 합평이 즐거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십 대때는 언론 스터디를, 삼십 대 초반에는 소설 스터디를 하며 합평을 했는데, 다른 사람 차례에는 마음을 놓다가 내 차례가 되면 가시방석에 앉은 듯 궁둥이를 연신 들썩거렸다. 합평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비평함이다. 다시 사전을 뒤져 비평의 뜻을 찾아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니. 그 말은 즉, 내 글이 옳은 아름다움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른 추함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러니 나는 어떤 말이 오갈까 싶어 내 차례를 은근 기다리다가도, 막상 내 차례가 되면 빨리 내 글에 대한 합평이 끝나기만을 마음 속으로 바랐다. 듣기 좋은 소리보다는 듣기 힘든 소리가 더 자주 나오는 자리다 보니 내 감정은 수시로 시소를 탔고, 내가 공격(?)받은 만큼 타인의 글도 공격할 틈이 없나 살피며 속좁게 굴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난 날 꾸준히 합평이라는 걸 했다. 그렇게 불편해 몸을 비틀면서도 기어코 그 자리에 가 앉았다. 소설 스터디는 소설가 선생님께 쓴소리의 대가로 드리는 돈이 만만치 않았는데도 나는 그 모임을 섬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계속 나갔다. 왜 그랬을까. 우선 혼자서는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혼자만의 힘으로 계속 쓴다는 건 무리였다. 그 시절 나는 영감이 찾아오는 날만을 기다릴 뿐, 스스로 나서서 글을 쓰지는 않았다. 억지로라도 쓰게 하는 모임이 있어야 생각을 시작하고, 몇 자라도 끼적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써도 내 글이 당최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기사야 법칙이 있으니 그걸 익혀 따라 쓰면 됐지만, 에세이나 소설은 법칙이 대체 뭔지, 어떤 게 잘 쓴 건지 몰랐다. 에세이는 그렇다치고 소설은 더 넘사벽으로 여겨져서 도무지 시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돈을 주고라도 배우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배운다고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설명을 들어도 실제 내 글에 그걸 적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왜 이러냐, 이 설정이 좀 이상하다, 말을 들어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를 잘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지적을 받고 나면 내 글이지만 다시는 보기가 싫어져 한 쪽으로 치워놓았다. 아무리 조언을 들어도 적용해서 고쳐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 글 쓰기에 바빴고 지난 글을 퇴고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계속 새 글만 쓰면 나아질 줄 알았다. 얼마 전 우연히 찾은 그 시절 소설에는 선생님이 지적한 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일까. 당시 아팠던 말들은 이제 더 이상 아프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정확한 지적이어서, 왜 나는 그때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 못했나 후회스러웠다.


  누군가 나를 위해 지적할 때, 마음을 활짝 열어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거나 고집이 센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내면의 상처가 크거나 마음이 현재 아픈 사람이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최근에 오프라인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이런 사실을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공황장애와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분이 함께 글을 쓰고 싶다고 했고, 엄마와 너무 닮은 사람이란 생각에 겁이 났다. 그럼에도 함께 하고 싶다는 한 멤버의 부탁에 나는 덜컥 그 멤버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내가 아직 부모에게 받은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엄마도 불편해 잘 연락하지 못하는 나는 그 멤버를 마주할 때마다 마치 엄마를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는 점점 가시 돋힌 말을 뱉었고, 멤버는 결국 내게 지난 모임에서 그동안 쌓인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날 하루종일 눈물을 쏟았다.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했고, 밥상도 차리지 못했다. 온 몸이 쿡쿡 쑤시며 아프고 한기가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눈은 물론 잇몸까지 모조리 부어올라 있었다. 마치 지난 날 부모와의 일로 아파할 때 느꼈던 통증이 고스란히 몸과 마음에서 느껴졌다. 나는 왜이리 아픈 걸까. 내 감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억울함과 부끄러움. 그 멤버는 모임을 마치 자신의 감정 배설구처럼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 모습이 생각나면 자꾸 억울함이 몰려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적절히 제재하지 못하고, 오히려 합평을 통해 그 사람을 아프게 찌른 내 모습이 생각나면 너무나 부끄러웠다. 억울함도 컸지만, 부끄러움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다시는 모임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마침 내가 기획한 얼룩소 에세이 쓰기 모임에서 첫 번째 글을 마감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다.


  벌려놓은 일이 있으니 도망을 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내가 잘못한 일들을 냉정히 돌아보았다. 우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받았다. 부모에 대한 상처가 깊어 연도 끊으려 했던 사람이 그와 비슷한 타인을 아직 안을 수는 없었다. 글을 쓸수록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는데, 그 마음이 올가미가 되어 나를 감당할 수 없는 일에도 무모하게 도전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멈춰야 했다. 초심을 잃은 것도 문제였다. 글 쓰는 게 치유가 되려면, '잘' 쓰는 것보다 계속 겁 없이 쓰는 게 더 중요한데 나는 멤버들의 실력이 좋아질수록 더 '잘' 쓰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최근 내가 보인 말투와 표정들을 떠올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한 건 처음에 비해 합평을 하면서 섬세하게 말을 고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치유의 글쓰기가 상처의 글쓰기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마음을 추스리지도 못했는데 얼룩소 에세이 합평일이 코앞이었다. 합평글만 세 번 이상 퇴고를 했다. 그런데도 겁이 났다. 내가 뱉은 말에 혹여 상처를 받는 사람이 생길까봐 너무 무서웠다. 그렇다고 좋은 말만 할 수도 없었다. 얼룩소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쓰는 사람들이기에 누구보다 자신의 글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에세이 모임에 지원했다. 꼬투리를 잡는 합평은 지양해야겠지만, 도움이 될만한 말은 해야 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말을 고르고 골라 간신히 합평글을 모두 올렸다. 내 합평은 참고사항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못마땅할 것이다. 아무리 거르고 걸러도 분명 거슬리는 표현이 있을 것이다. 나는 뒤늦게 글 쓰는 사람을 돕고 싶다던 내 꿈이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절절히 깨닫는다.       


  모임장이 흔들리고 있으니 모임도 흔들린다. 오프라인 모임은 한 달동안 휴지기를 갖기로 했다. 그 사이에도 얼룩소 에세이 모임은 계속 될 것이고, 나는 할 때마다 적절한 선을 찾는다고 글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쓸 것이다.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면서 쓴 내 글에는 신랄한 비판보다 용기가 되는 말을 더 많이 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겁 없이 쓸 수 있도록 독려하고 힘을 주겠다는 다짐이 포함돼 있었다. 합평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잘 알기에, 따뜻한 합평을 하고 싶었기에 적은 말들이었다. 나는 그 다짐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진 걸까. 그 다짐은 지킬 수 있는 것일까.


  꿈도 잃고 자신감도 잃은 나의 방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도 스스로 벌려놓은 일이 있으니 합평을 하고 고백하는 글을 쓴다. 아픈 나를 불러 세워놓고는 안아주기도 했다가 찬찬히 뜯어보며 잘못된 부분을 되짚어보기도 한다. 지금 내가 멤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기획했다고 해서 내 말이 전부 옳은 것이 아니며, 아무리 언짢은 말이 오가더라도 너무 괘념치 말라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뿐. 아무쪼록 더는 상처받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글은 결국 나를 치유하기 위해, 나를 위해 쓰는 것이기에, 용기를 낸 사람들이 더 음지로 숨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딘가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여전히 부끄럽기만 한 나의 패착을 힘들게 꺼내보이는 이 마음이라도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부족한 사람과 기꺼이 함께 해주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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