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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Jan 28. 2023

최초 최대 그리고 최고의,

  피아노 치는 걸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아이가 꿈을 바꾼 건 열두 살 때였다. 아나운서가 될 거야. 저녁 뉴스를 보다말고 폭탄같은 선언을 했다.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으니, 8년 동안 학원에 갖다 준 돈이 너무 아깝다며 엄마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빠는 피아노는 돈이 많이 드니 꽤 괜찮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 무렵 학교에서 우연히 방송부 활동을 시작했고, 점심시간마다 마이크를 잡고 운동장에 동요를 소개했다. 그 작은 경험이 한 인간의 진로를 바꾼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의 선택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마이크 잡는 일을 해야지. 어린 눈에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저 뉴스에 나오는 아나운서가 유일해 보였고, 그때부터 내 꿈은 아나운서였다. 어떤 자격이 필요한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때에도 내리 방송부를 한 건, 꿈을 향해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점점 어른이 되어갔지만, '왜 이 꿈을 계속 갖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관성의 법칙처럼 그저 품고 살아갔다. 신문방송학과의 문턱은 너무나 높았지만, 공부는 잘 하지 않았다. 전학을 간 뒤로 나의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을 뿐이다. 어떻게든 소외되지 않고 학교라는 세계 안에 내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간신히 대학을 갔고 2년 동안은 딴 짓만 하다가, 3학년이 되고서야 갑자기 꿈이 생각났다. 아 맞다, 내 꿈은 아나운서였지.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도전은 해봐야지.


  그때부터 아카데미에 들어가 수업을 듣고, 스터디를 했다. 다른 친구들은 학점을 관리하고 기업체 취업을 준비할 때, 나는 화장법을 배우고 화면발 잘 받는 옷을 고르고, 뉴스를 반복해 읽었다. 4학년 때부터는 온갖 시험을 보러 다녔다. 지방, 서울 가리지 않고 아나운서를 뽑는 곳이면 어디든 원서를 내고 카메라테스트를 받았다. 줄줄이 낙방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점점 작아졌다. 내가 생각한 아나운서는 말하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경험한 아나운서는 연예인이었다.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얼굴이 연예인급도 아니며, 목소리가 성우처럼 확연히 남다르지도 않았다. 화장하는 걸 원체 싫어하는 데다, 정장은 내게 당장 벗어버리고 싶은 옷이었다. 어느 순간 계속 가는 것보다 중도 포기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된다는 보장만 있으면 계속 지원을 할텐데. 엄마의 말은 가시였지만, 그만 두는 데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오랜 꿈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꼬박 삼 개월을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오래 한 길만 걸었음에도 결국 완주하지 못한 대가는 예상보다 훨씬 크고 길었다.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실패를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뒤의 내 삶은 온통 실수와 실패로 얼룩져 있다. 이렇게 방황을 많이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헤매고 또 헤맸다. 학생 신분에서는 벗어났고, 나이는 점점 많아지고, 해놓은 거라곤 보잘 것 없는 학벌과 다시는 입지 않을 것만 같은 정장 몇 벌, 남들보다 좀 나은 발음 정도였다. 뭘 해야 할지 모르니 처음에는 남들을 따라했다. 취업에 필요하다는 각종 점수를 따고, 관심도 없는 회사에 지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낙방하고. 여행을 갔다가 취업을 했다가 그만 두었다가, 다시 길을 찾아 또 취업 준비를 하고 일을 하고 또 그만 두고 여행을 가고. 다른 친구들은 한 직장만 다녀 경력이 쌓이고 연봉도 높아지는데, 나는 끝없이 방황만 했다.


  나쁘게 보면 진득하게 하나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좋게 보면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어른들 눈에 나는 한심한 녀석이었고, 정해진 길로만 가는 친구들 눈에는 좀 부러운 사람이었다. 돈도 안 되고, 이력서에도 넣을 수 없지만, 원하는 무언가를 찾아 끊임없이 도전을 하고, 실패를 해도 또 일어났으니. 나 자신이 무엇이 되어가는지는 몰랐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 나는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갔다. 나는 의미 없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돈만을 위해, 다가올 미래만을 위해, 현재의 삶을 죽이는 걸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수많은 선택과 실패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전학과 바쁜 부모님으로 학창시절 사춘기를 겪지 못했는데, 뒤늦게 폭풍같은 사춘기를 겪었다.


  지금은 이렇게 쉽게 나열하지만, 당시에는 하나하나가 내 삶을 전부 걸고 하는 힘겨운 결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모든 고비가 힘들고 아팠지만, 아나운서를 그만 둘 때에 비하면 덜 아팠고, 덜 좌절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자꾸 실패하면서도 또 무언가를 해보겠다며 아등바등거렸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내가 아나운서를 한때 꿈꿨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 이후에 사귄 사람들에게는 언급한 적이 거의 없다. 부끄러웠던 것 같다. '네까짓 게'라는 시선과 '끝까지 도전하지 못하고 포기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너무 두려웠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던 과거였는데, 쓰고 나니 가장 큰 아픔 중에 하나였음을 깨닫는다.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걸 확실히 깨닫고 그만 두었기에. 오히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실수와 실패에 관대한 사람이 되었다. 그 경험 덕분에 생김새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게 되었고, 연봉이나 직업 혹은 학벌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많이 방황하고 아파하고 또 일어났기에, 많은 편견을 걷어낼 수 있었고,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글을 쓸 수 있었다. 아나운서를 포기한 건 내 생애 최초이자 최대의 실패였고, 동시에 최고의 선택이었다. 나는 내가, 그리고 내가 걸어온 이 모든 순간들이 너무나 애틋하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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