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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를 못 하는 인간

by 박순우

세상에는 네 가지 종류의 일이 있다고 한다. 중요하고 급한 일, 중요하지만 급하진 않은 일, 중요하지 않지만 급한 일,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데 급하지도 않은 일. 수 년 전 배우 신애라가 토크쇼에서 한 이야기였는데, 일에 대한 신박한 구분법에 감탄했다. 이 네 가지 구분법을 머릿속에 넣고 내가 끌어안고 있는 일들이 각각 어느 카테고리에 들어갈까 고민한 적이 있다. 요즘도 할 일은 많은데 무엇부터 해야할지 몰라 허둥댈 때면 네 가지 종류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곤 자신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뭐부터 해야 하는 거지.


정리를 잘 못한다. 물건부터 생각에 이르기까지. 물건은 늘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곳에 놓여있고(립밤이 세탁기에 있다든가) 남편이 대신 찾아줄 때가 잦다. 정리를 천직처럼 똑부러지게 잘하며 잔소리도 극심한 엄마 밑에서 자라, 오랜 시간 정리를 잘하는 '척'하며 살아왔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대체 내 뱃속에서 나온 애가 맞냐.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정말 척이었는지, 내 살림을 하고나니 나는 다시 천성을 버리지 못하고 엉망진창 살림 속에서 산다.


생각이라고 다를까. 조금만 일상이 뒤틀려도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허둥댄다. 버벅대며 헤매다 일단 보이는 일부터 해치운다. 까먹기도 잘 하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메모하기와 보이는 즉시 처리하는 것이었다. 미루면 잊고 말기에. 뇌의 용량이 크지 않은 걸까, 할일이 너무 많은 걸까. 사실 글도 결국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글은 곧 정리인데,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이니. 남들은 개요를 짜서 글을 쓴다는데 일단 개요를 짜는 게 안 되는 인간이다 보니, 결국 나는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할 거라며 낙심한 적도 있다. 모든 작가가 개요를 짜고 글을 쓰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부터는 조금씩 내 방식을 찾아갔다. 보통 괜찮은 첫 문장이 생각나거나, 글의 방향이 잡히면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함께 여행을 가지 못한 남편에게 미안해, 어제와 오늘은 싱가포르 음식을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로 몸이 녹아내리는 느낌에 밤이면 기절하듯 잠이 든다. 아침에 눈을 떠 카야 토스트를 만들어 먹고, 세탁기에 빨래를 집어 넣고, 남편과 아이들을 챙겨 보내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고, 나도 씻고, 마트에 가서 카페에 떨어진 재료를 사고, 오픈 준비를 했다. 어제는 종일 틈이 나는대로 합평을 했다. 손님을 받다가 아이 밥을 챙기고, 멤버들 글을 읽고 합평글을 달고, 다시 밥을 하고 아이들을 재웠다. 멤버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해치운다는 느낌으로 했다. 그래야 내 글을 '마침내'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니까 내가 어제 오늘 부산스럽게 한 모든 일들은 결국 내 자리에 앉아 오롯이 집중하며 내 글을 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여독은 풀리지 않았고, 여전히 정신이 반쯤은 해외에 있는 것도 같다. 두서 없는 문장들이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을 부유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떠오르는대로 적어놨어야 하는데, 여행지에서도 제자리로 돌아온 뒤에도 적어두지를 못했다. 간만에 각 잡고 앉아 글을 쓰다가도 자꾸 뒤를 돌아본다. 혹여 빼놓은 급한 일이 있지는 않나, 내가 챙겨야 하는 일이 또 뭐가 있더라. 그렇지 않아도 정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 여독에 취해 일상도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다.


정리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일은 또 잘 벌린다. 일이라는 걸 벌리려면 적어도 앞뒤를 재고 가능한지 아닌지를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하는데, 도무지 대책이 없다. 일단 저지른 뒤 간신히 수습을 해나가는 게 내가 하는 일의 방식이다. 사실 얼룩소에서 진행하는 에세이 쓰기 모임도 제안 글을 쓰면서, 진행 기간이 아이들 방학이자 중간에 여행도 잡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결국 제안 글을 쓰고마는 게, 나라는 대책 없는 인간의 실체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얼마나 비용이 소요될지, 우리 아이들에 조카까지 데리고 가면 어떤 상황에 놓일지, 별 생각도 하지 않고 떠났다.


마흔이 넘고도 이러는 걸 보면 천성이지 싶은데, 그나마 다행인 건 정리는 못해도 눈과 손은 빠른 편이라 얼추 제 시간 안에 일을 해낸다는 것이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생각과 손의 속도가 느려진다는 것. 그러니 이제는 좀 자중해야 할텐데, 나는 여전히 젊은 날의 나처럼 일을 벌려 놓고는 허덕이며 마무리를 한다. 때로는 이래야 뭐라도 한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일을 벌리기도 한다. 알아서 한 번 따라가봐, 하며 마치 정신이 몸과 분리된 듯 나를 지켜보기도 한다. 과연 해낼 것인가, 하며. 평범한 사고방식은 아닌 듯하다.


이런 나라는 걸 알기에 아주 어릴 때부터 메모를 해왔다. 사야할 것, 해야할 것 등. 하나씩 줄 긋는 맛으로 해야 할 일을 늘려 적기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해야 할 일들이 나를 압박해 글을 쓰지 못할까봐 적기도 전에 일을 해치우곤 한다. 물론 잊어버리고는 글부터 쓰고나서 부랴부랴 뒷수습을 할 때도 많다. 이런 사람이 모임을 이끌고 내 글을 쓰고 가정을 지키고 일을 한다니. 그럼에도 크게 신용을 잃은 일이 없는 건 기적이라 해야 할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글이라도 썼기에 중요하지만 급하진 않은 일들을 정리하고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정신 없이 몰아치는 일 속에서도 글을 쓰기 위해 지난 일들을, 깨달은 것들을 활자화하고 있으니.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머리를 갖고 살면서, 이만큼이라도 생각들을 정리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내친김에 글이 네 가지 카테고리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가늠해 본다.


글도 내가 쓰고 싶어 쓰는 글도 있지만, 약속이라 쓰는 글이 있고, 청탁 받은 글이어서 쓸 때도 있다.(있어 보이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 글에 따라 놓이는 위치가 달라진다. 나는 결국 중요하지 않지만 급하지도 않은 이 글을 가장 먼저 쓰고야 만다. 정리를 잘 하지 못하는 인간의 정리 안 된 행동이랄까.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복잡해진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시골에 처박힌 걸지도. 조금이라도 더 느리게 살아가려고. 그럼에도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모든 일을 제치고 꼭 하고 싶은 일도 있고.


생각도 두서가 없고, 글도 두서가 없구나. 이것이 지금의 내 상태. 이제 중요하진 않지만 급한 글을 써야할 차례인 건가. 그나저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그나마 다행인 건, 중요하지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이 글을 씀으로써 내 머릿속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있다는 것. 붕 떠 있던 생각도 많이 잠잠해졌다는 것. 그러니 내가 글을 못 끊지. 정리를 못하는 나같은 인간에게 글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열쇠인지도. 반갑다, 다시 글을 쓰는 나의 일상. 습관처럼 되뇌는 말로 이 글을 마친다.


글을 만난 건 천운이야!



덧. 이 글을 쓰는 사이 첫째가 집으로 돌아왔다. 돌봄 선생님께 곧바로 전화가 왔다. 잠바와 물병을 놔두고 애가 사라졌다고. 아이는 다시 학교에 갔다. 잠바와 물병을 가지러. 나는 저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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