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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Mar 13. 2023

외면하지 않는 어른이 되도록

학폭논란을 바라보며, 아이를 학교로 보내며,

  학교가 즐거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쓰면, 아마 그 시절 친구들이 나를 노려볼지도 모르겠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쁨의 시간이 없지는 않다. 주로 공부를 했던 기억이라기보다는 땡땡이의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금기의 영역은 걸리지만 않으면 참 달콤했다. 본분인 공부를 잊고 보충수업도 야간자율학습도 내팽개치고 바람처럼 교실을 몰래 빠져나갈 때의 짜릿함이란. 금기된 자유를 누리는 시간마저 없었다면 아마 학교는 더 암흑이었을 것이다.


  내게 학교는 꼬리표나 수식어 없이도 전교생을 쉽게 한 줄로 세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게 성적순이든 싸움순이든 부유한 순이든. 그 모든 게 뒤섞여있다 해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똑같은 교복으로 감춘다 해도, 아무리 똑같은 머리 스타일 속에 숨긴다 해도, 결코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존재했다. 모든 이의 성적은 학교와 선생님이라는 합법적 권위 아래 당당히 공개됐고, 힘이든 돈이든 시간만 흐르면 아이들 사이의 차이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초등학생 때 또래보다 키가 작아 운동장에서 조회를 할 때면 무조건 앞쪽에 서곤 했다. 조금이라도 크면 뒤에 서야 했기에, 서로의 키를 재보며 누가 앞에 서야 할지 매번 정하곤 했던 모래 날리던 운동장. 학년이 올라갈수록 조회는 점점 교실 내에서 치러질 때도 많았건만, 나는 학교에 갈 때마다 그 줄 어딘가에 있을 내 자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비교하고 시기당하고 시기했던 시간. 그게 내게는 학창 시절이었다. 


  자의와 타의가 버무려진 끊임없는 줄 서기. 타고나기를 욕심 많게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닥에 깔린 자존감 때문이었을지도. 뇌가 제대로 발달하지도 않은 데다 학교가 세상의 전부라 여기는 나이에 계속 그런 줄에 서야 하는 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줄 서기의 끝은 대망의 대학입시였다. 가장 적나라한 서열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 그 순간은 그동안 지켜온 자리가 더 높은 곳으로 혹은 더 낮은 곳으로 단박에 바뀔 수도 있는 운명의 시간이었다.


  학교를 떠나고 나서야 나는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 사회라고 해서 서열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누빌 땅이 더 넓기에 학교에서보다는 훨씬 잘 숨거나 피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혹은 자처해서 스스로를 줄 위에 올려놓는 때가 올 때면 괴로워 머리를 감싸 안아야 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보다 고립감은 덜한 편이었다. 학교는 그러니까 사회의 축소판인 동시에, 이 사회가 얼마나 서열화되어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공간이었던 것.


  불행의 씨앗은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한 경험이었다. 여전히 주도했던 아이의 이름과 얼굴이 생생히 기억난다. 괴롭힘이 끝난 뒤에도 언제든 혼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학창 시절 내내 나를 휘감았다. 학교가 세상의 전부인 사람에게 그 공간에서 혼자가 되는 것만큼 두려운 게 있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홀로 있어도 자존감이 높고 당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학을 가면서 그 두려움은 더 극심해졌다. 혹시나 지옥의 기억이 반복될까 봐 나는 매 순간 전전긍긍했다. 


  나만 아니면 된다. 혹 누군가 따를 시키더라도 나만 아니라면 괜찮다. 부끄럽게도 이기적인 마음속에 살았다. 공범의 가해자는 누구까지일까. 내가 살겠다고 타인의 아픔을 등한시한 나도 가해자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학교는 너무 튀어서도 안 되고, 너무 존재감이 없어도 안 되는 곳이었다. 어른이 되기 전인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쳐야 할 공간은 오히려 어른들의 사회보다 더 잔인한 외면의 공간이었다.


  정순신 아들 학폭 사건이든 드라마 <더 글로리>의 열풍이든, 학폭 논란을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들이 소환돼 마음이 아리다. 학교는 이전보다 더 교활하며 잔학무도한 곳이 되었기에. 나는 결국 그곳으로 나의 아이들을 보내야 하기에. 첫째를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보내던 날, 무엇보다 두려웠던 건 아이에게 내가 모르는 시간이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는 더 이상 내가 24시간 지켜보고 돌봐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아이는 홀로 걸어가야 했다. 내가 지켜볼 수 없고, 내가 보호해 줄 수 없는 시공간으로. 그때의 떨림을 선연히 기억한다. 


  결국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기관을, 선생님을, 친구들을, 친구의 보호자들을. 그저 믿어야 한다는 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이토록 뒤숭숭하고 못 미더워도 나는 계속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하고, 내 아이가 그곳에서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빌어야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이 아이가 가해자 역시 되지 않도록 내재된 폭력성을 관찰하며 지도해야 하고. 넋 놓고 운이 좋기만을 바랄 수는 없으니 조금 더 손을 뻗는다면 모든 아이를 내 아이처럼 바라봐야겠지. 잠시라도 따뜻한 어른으로 비칠 수 있도록. 더 이상 외면하지 않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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