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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Mar 16. 2023

훈육의 기술

통제하고 싶은 양육자

통제받고 싶지 않은 아이들


둘째가 일곱 살이 되었다. '미운 일곱 살'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나이. 아이는 미운 일곱 살이란 말도 모를 텐데, 신기하게도 일곱 살이 되자마자 생떼와 고집이 장마철 계곡의 물처럼 급격히 불어났다. 그 순간 잊고 살았던 '미운 일곱 살'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남편에게 첫째에게도 이런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니 남편은 기억도 나지 않는단다. 첫째의 미운 시기는 비교적 짧았다. 두세 달 정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다시 정신을 집중해, 그 시절 첫째의 미운 시기를 어떻게 빨리 넘길 수 있었는지를 곱씹어 보았다.


사실 밉다는 수식어가 붙는 건, 자신의 주장이 강해지기에 그렇다. 아이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양육자의 입장에서 아이의 주장이 강해지는 건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아이는 이 시기를 통해 수동적인 아이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는 한 존재가 되어간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억지 주장을 하거나,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펼칠 경우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에도 아이들은 고집을 많이 부린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영상을 더 보겠다고, 놀이터에서 더 놀겠다고. 심한 경우 울음을 그치지 않고 바닥에 널브러져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집에서는 보통 양육자가 고함을 지르거나 매를 드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경우가 많고, 집 밖에서는 차마 그러지 못해 아이의 의견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갈 때가 많다. 둘 다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전자는 권위로 아이를 누르는 경우고, 후자는 권위를 잃고 마는 경우에 해당한다.


사실 여태껏 두 아이를 키우면서 통제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곱 살이 고비라면 고비였는데, 둘째의 경우도 최근 들어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특별하게 착한 걸까? 통제되지 않는 아이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둘 다 정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내가 이런 순간과 시기를 어떻게 넘어갔는지를 적어보려 한다.



훈육의 기술


내가 처음 부모교육을 들었을 때는 한창 아이들에게 훈육을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 나는 제법 잘하고 있다 자부했는데, 막상 부모교육을 받는 첫날 아침 아이들에게 빽빽 소리를 지르고 있는 스스로와 마주하고야 말았다. 교육이 절실하다고 느끼던 순간이었다. 나는 완전한 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가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첫 수업을 경청했다.


선생님이 강조하신 건, 양육자가 아이들에게 해야 할 건 혼을 내거나 야단을 치는 게 아니라, 훈육이라는 점이었다.


'혼내다'의 사전적 의미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호되게 나무라거나 벌을 주다이다. 말 그대로 혼이 나가도록 꾸짖는 것을 의미한다. '야단'은 소리를 높여 마구 꾸짖는 일을 일컫는다. 이끌 야, 비방할 야(惹)에 끝 단(端) 자를 쓰니, 야단은 끝까지 비방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훈육'은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쳐 기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덕으로써 사람을 인도하여 가르치고 기른다는 뜻도 있다.


우리가 양육자로서 해야 할 건, 혼을 내거나 야단을 치는 게 아니라 '훈육'을 하는 것이다. 이 점을 먼저 머리에 넣을 필요가 있다. 훈육을 내면화한다는 건 두 가지를 가슴에 품는다는 말과 같다. '아이를 한 인격체로서 존중한다'는 마음과 '권위를 갖고 잘 가르치겠다'는 마음이다. 예전에 자미별 시리즈에서 <어른인 척하지 마라>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사례 없이 적어 내려 간 글이라, 어찌 보면 원론에 그쳤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중요한 게 훈육이기에 이번 기회에 더 자세히 짚어보려 한다. 


훈육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는 목소리의 크기와 단호함이다. 훈육을 하는 목소리는 굳이 클 필요가 없다. 소리 지르며 우는 아이에게 양육자가 같이 소리를 질러봤자, 아이는 더 크게 소리를 지를 뿐이다. 의미 없는 기싸움이 되기 십상이다. 반대로 소리를 지르지 않고 낮고 점잖은 목소리로 말하면, 아이의 우는 소리는 신기하게도 점점 잦아든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호함이다. 굳은 표정으로 낮은 목소리에 단호함을 담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안돼" 혹은 "그만". 



둘이 싸울 때


내 경우 아들만 둘인데, 아홉 살 일곱 살이 되더니 일상이 다툼이다. 아이들은 거의 매일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며 소리를 꽥꽥 내지른다. 몇 번은 나도 같이 꽥꽥거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부모교육을 떠올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요즘은 그만하라고 단호하게 말한 뒤 아이들을 그저 지켜본다. 그러면 아이들은 점점 소리를 낮추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자신들도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는 알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각자의 입장을 충분히 듣는다. 논리 정연하진 않아도 아이들에게는 나름의 화를 내는 이유가 있다. 명확한 이유를 들은 뒤에는 중재에 나선다. 이때 한쪽 편만 들거나, 한쪽의 입장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둘 모두에게 작든 크든 잘못이 있다. 이걸 명확하게 언급해야 한다. 한쪽만 잘못했다고 하게 되면, 차별이라는 생각이 들고 오히려 더 반감이 커진다.


서로의 입장을 차분히 들은 것만으로도 아이는 우선 진정이 된다. 그 이후 양육자는 굳이 해결책까지 제시하진 않아도 된다. 판사보다는 중재자에 가깝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다시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를 물으면, 아이들은 곰곰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각자의 생각을 말한다. 그에 대한 서로의 생각도 물어본다. 그리고 향후 방향을 함께 결정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아이들은 더 이상 흥분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서로 바라보고 사과하게 하면, 둘이 눈을 마주치며 실실 웃고 만다. 언제 싸웠냐는 듯.


이 과정을 잘 해내지 못할 때는, 둘을 불러내 오 분 동안 손을 들고 있으라고 한 적도 있었다.(요즘은 이런 벌을 주지 않는다.) 문제가 복잡할 때는 반성문을 써보라고도 했다. 첫째는 손을 드는 것보다 반성문이 낫단다. 손을 들고 있으면 점점 팔이 아파와 더 화가 나는데, 반성문은 써보니 점점 마음이 가라앉더라는 것이다. 둘째는 반성문이 더 낫긴 한데 대체 뭘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생각이 안 난다는 것이다. 생각도 사실 뇌에 길이 나야 원활해지기 때문에, 이 나이의 아이들은 생각하는 걸 힘들어할 때가 많다. 생각을 차분히 해보라고 한 뒤, 정 모르겠으면 형아 반성문을 참고하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이미 화가 풀려 있었다. 서로의 반성문을 비교해 보며 실실 웃기도 했다. 반성문을 함께 읽으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앞으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상황을 종료했다.


별일 아닌 데 아이들이 상대에게 크게 화를 낼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고 말해준다. 조금 화가 났을 때가 1이라면, 정말 크게 화가 났을 때가 10이다. 2 정도 화를 내도 되는데 10의 화를 내고 있 게 아니냐고 묻는다. 아이에게 지금 너의 감정은 어느 정도 크기인지를 가늠해 보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는 나름의 생각을 말하고 조금씩 조절법을 익혀간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상태라, 이 훈육법은 좀 더 오래 실천해 보고 안정되면 다시 글을 써봐야겠다.



혼자 생떼 부릴 때


훈육에서 중요한 건 아이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혼자 난리를 치더라도 나름 이유는 있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그저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건, 그 순간에는 약발이 먹힐지 몰라도 얼마 못 가 또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야 만다. 그런데 이유가 명확하지 않거나 어이없는 경우도 분명 있다. 특별한 날이 아닌데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거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경우,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들고 있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 단호함을 보여야 한다. 아이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눈 깜박하지 않아야 한다. 안 되는 건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는 걸 명확히 해야 한다.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다. 그저 단호하게 "안돼"를 말하면 된다. 그 뒤에도 아이가 난리를 치면 무시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그런다 해도 받아줄 수 없으며, 이제 관심도 없다는 의사 표현인 것이다. 이는 양육자가 권위를 쌓는 과정이다. 주도권을 가져오는 일이기도 하다. 이 싸움에서 지면 계속 아이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당장은 마음이 아파도 견뎌야 한다. 몇 번만 해내면 이후에는 훨씬 쉬워진다. 아이는 이후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면서 발버둥 치거나 울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에는 우선 시간부터 함께 정하는 게 좋다. 아이들도 기관에서 적정한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보통 유아의 경우 하루 한 시간 이내라고 한다. 아이들에게 왜 이런 적정 시간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납득이 가야 아이도 따른다. 아이에게는 아직 스스로 조절할 능력이 없다는 것, 시간을 초과하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점, 그리고 양육자로서 아이를 올바르게 키워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도 강조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도 아이가 심하게 거부한다면 페널티를 주는 건 어떨까. 약속을 지키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규칙도 그렇다. 이를 거부하고 거절하면, 그에 상응하는 페널티가 필요하다. 다음 날 기기 사용 시간을 줄인다거나, 며칠 금지를 시킨다거나. 이 역시 반발이 없으려면 아이와 함께 정하는 게 좋다. 규칙을 어길 시 어떻게 할지 스스로가 정하게 하면, 양육자가 일방적으로 정했을 때보다 아이는 훨씬 더 잘 지킨다.    




지금까지 적은 건, 부모교육을 통해 배운 훈육의 기술과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쌓아온 노하우이다. 아이들이 그렇다고 늘 내 말대로 잘 따르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생떼를 부리지는 않는다.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모든 건 헛수고다. 아이들도 좋은 습관이 들어야 하지만, 어른도 좋은 사례와 습관을 쌓아가야 한다. 그래야 덜 화가 나고 덜 소리를 지른다. 대신 더 웃으며 더 사랑할 수 있다. 오늘의 육아도 깊은 마음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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