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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Mar 31. 2023

작은 열쇠 하나가 되기를

  지인과 대화를 하다가 화들짝 놀랄 때가 종종 있다. 분명 상대와 내가 함께 한 경험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생생하게 기억을 복원해 이야기하는 상대와 달리 나는 아무리 뒤져도 제대로 회생시킬 수 없을 때. 상대에게 적잖이 미안한 동시에 내 뇌는 무슨 연유로 그 기억을 통째로 들어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존재하지만.


  얼마 전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낯선 이국땅에서 함께 찾았던 바다를 떠올렸다. 그런 바다는 처음이었다. 걸어도 걸어도 발목까지만 차오르는 얕은 바다에 쉴 새 없이 하얀 파도가 밀려오며 수없이 많은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하늘과 몰아치는 바람 속에 물빛은 검디 검었다. 오직 포말만이 뽀얀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생경한 바다였다. 수심이 깊지 않아도 광활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저 혼자 삐죽 솟아난 바위 위에는 거센 바람을 맞으면서도 꿈쩍 않고 빼곡히 앉아있는 갈매기떼가 있었다.


  그 바다와 갈매기는 퍽 선명한데 반해 그곳에 어떻게 갔는지, 그 외에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와 달리 친구는 무척 또렷이 그날을 회상했다. 차를 렌트했고 그곳까지 내가 운전을 했으며, 차를 반납할 때 시비도 있었다는 것. 일부러 가위를 들이대 일정 부분의 기억만 잘라낸 것처럼 내게는 없는 기억이었다. 뇌는 의미를 좋아한다는데 무의식 중에 의미가 없는 순간이라 여겼던 것일까. 이전에도 남편과 대화를 하다가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남편에게는 소중했던 순간이 내게는 삭제돼 있다는 게 조금 두렵고 많이 미안했다.


  리사 제노바는 <기억의 뇌과학>이란 책에서 인간은 망각하기에 오늘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지우고 살기에, 또 새로운 것들을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 뇌의 작동법칙에 수긍이 가다가도 그럼에도 너무 많은 과거가 지워져 기억나지 않는 건 좀 구슬프다. 이왕이면 좀 더 온전한 기억들을 간직하며 살 수는 없을까. 삶의 끝자락에서 생각나는 일이 별로 없거나 기억이 너무 밋밋하다면 많이 아쉬울 것 같다. 기억 속 감정의 형태가 슬픔이든 기쁨이든 행복이든 상관없이, 이왕이면 더 많은 경험들을 떠올리며 사그라들고 싶다.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구나, 하며.


  스트로마톨라이트. 생소하고 발음도 어려운 이 이름은 '바위 침대'라는 뜻을 갖고 있는 화석이다. 너무 아득해 차마 상상도 하기 어려운 수십 억 년 전, 미생물들이 지구에 남긴 흔적이 바로 스트로마톨라이트다. 더 정확히는 조류의 일종인 남세균과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져 있는 화석. 미생물이라니. 곤충 화석만 남아있어도 신기할 텐데 하물며 미생물 화석이라니. 이 화석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이토록 작은 생명체가 이 커다란 지구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동시에 너무나 경이로웠다.


  지구의 역사를 말하며 화석을 운운하는 게 지금이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사실 생명이 화석이 되고 그게 인간 눈에 띄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화석이 되려면 생물들이 살다 죽었을 때 죽은 생물체 위로 퇴적물이 빠르게 쌓여야 한다. 이왕이면 아주 많은 양이 무겁게 짓누르는 게 좋다. 뼈나 이빨 같은 단단한 물질이 있으면 더 좋고. 그렇지 않으면 금세 부패가 진행돼 흔적을 남길 수가 없다.


  많은 퇴적물이 쌓여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암이 되고 화석이 만들어진다 해도, 인간에게 발견되려면 또 하나의 과정이 남아있다. 보통 지층은 오래될수록 더 아래에 있다. 지하에 얌전히 묻혀만 있으면 인간의 눈에 띌 리 없다. 화석이 묻힌 지층이 깎이거나 휘어지거나 갈라져 지표면에 드러나야 비로소 호기심 많은 인간에게 발견된다. 발견된 뒤에도 언제 살았던 무엇인지 꼼꼼히 조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처럼 화석은 수많은 우연의 반복으로 빚어진 귀하디 귀한 세월의 흔적인 것.


  40여 년이라는 적잖은 세월을 살면서 유독 내 기억에 각인된 장면이나 이야기들을 떠올리다가 문득 스트로마톨라이트가 생각났다. 40년은 약 1만 4600일에 달하는 날이다. 이걸 또 시간으로 나누면 무려 35만 시간이 넘어간다. 그 숱한 날들과 촘촘한 순간들을 살아왔지만, 기억은 온전치 않다.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잊고 살아간다. 내게 남은 흔적들은 대개 많이 아팠거나, 무척 새로웠거나, 유달리 황홀했던 어떤 순간들뿐. 그 외의 기억은 희미하거나 아예 흔적조차 없다.


  마치 많은 양의 퇴적물이 죽은 생물체 위로 갑자기 쌓여야 화석이 되는 것처럼, 내게 남은 기억들도 그런 충격이나 자극이 더해진 일들이 더 깊게 새겨져 있다. 그렇게 박힌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과거가 된다. 그 과거는 온전하기보다 선택적이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모두를 이해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이해의 주체가 나 자신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이 종종 두렵다.


  지금까지 발견된 스트로마톨라이트 중에 가장 오래된 건 2017년 캐나다 퀘벡에서 발견된 것으로, 최대 42억 80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화석은 심해 열수분출구에서 번성했던 세균의 잔해로 보인다. 어쩌면 지구에 생명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화석인 것. 생명의 흔적이 수십억 년이라는 방대한 세월을 견디고 이 지구에 남았다니. 아무리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해도 화석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한낱 돌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를 잇는 노력이 존재하기에, 돌덩이는 비로소 의미 있는 화석으로 거듭난다. 이 세상을, 지금의 우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 하나가 되는 것.


  지구에 비하면 티끌 같은 세월이지만, 내가 살아낸 시간들 속의 이야기들을 활자화하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학자의 손길과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뇌에 퇴적될 만큼 중요하지 않은 일들은 이내 지워진다. 남겨진 것이라 해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흐려지거나 왜곡되기 마련이다. 글을 쓰면서 그 희미하고 곡해한 기억들을 복원한다. 영원히 기억하고픈 순간도 붙잡아 활자 형태로 종이 안에 가둔다. 글을 쓸 때마다 잊힌 혹은 잊힐 것만 같은 기억들을 더듬으며 탐구하니, 화석을 발견하고 조사하는 일과 꽤 비슷한 작업이라 여겨진다.


  이런 작업이 매력인 건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기 때문이다. 지구나 우주에 새겨진 흔적들을 우리는 결코 슬픔이나 기쁨 혹은 불행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아주 오래전 어느 날 그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그런 존재가 살았던 것으로 여길 뿐. 흔적들을 통해 그 시대의 상황과 환경, 존재를 이해하려 노력할 뿐. 영장류 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저서 <차이에 관한 생각>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학의 직무는 행동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기억들을 되새기고 활자화하면서, 그 시절의 내 행동을 판단하거나 그 일의 옳고 그름을 저울질하지 않으려 한다. 그 기억이 어떤 감정을 동반했든, 어떤 결과를 초래했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더 기억하고 더 이해하되 덜 다치기를 바라면서. 너무 행복해서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너무 아파서 차마 지워버리고 싶은 장면도, 글로 잘 정리하고 다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저 모든 걸 담담히 받아들이는 내가 되고 싶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직무는 그저 한 발자국 떨어져 그 일을 바라보고 어린 나를 애틋하게 안아주는 것뿐이라고 믿는다.


  다시 쓰인 기억들이 더는 나를 흔들지 않기를. 모든 순간들이 결국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받아들이기를. 억울한 것도 아쉬운 것도 속상한 것도 없이 나의 삶에 순응하고 싶다. 스스로와 싸우며 쌓아 올리는 나의 비루한 글들이 세상과 사람과 인생을 이해하는 작은 열쇠 하나가 되기를. 수십 억 년이라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길고 긴 시간을 뛰어넘어 지구의 비밀을 간직한 스트로마톨라이트처럼. 작지만 원대한 마음으로 오늘도 흔적 하나를 새긴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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