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우 May 09. 2023

불편한 날을 보내고

불편한 날이 지나갔다. 시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기계처럼 매년 반복하는 말을 꺼냈다. 어버이날인데 못 찾아봬서 죄송해요. 어쩌겠나. 전화 한 통, 용돈 송금이 내가 어버이날 하는 전부다. 신혼 초에는 카네이션을 온라인으로 주문해 보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 하지 않는다. 평소 자주 전화를 드리는 살가운 며느리도 아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전화를 하는 편이다. 멀리 사니 일 년에 두세 번쯤 뵙는다. 그 두세 번에 어버이날은 포함되지 않는다. 자식이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어버이날을 매년 보내고 계시리라는 걸 안다. 그렇다 해도 내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무언가를 하기 위해 크게 애쓰지 않았다.


친정 엄마께는 문자를 보냈다. 어버이날이라 돈 조금 보냈어요. 아빠랑 맛있는 거 사드세요. 두 문장의 건조한 글이 내가 엄마한테 보내는 전부였다. 아빠한테는 문자도 전화도 하지 않았다. 소원한 사이라는 걸 아는 친구 하나가 내게 물었다. 엄마한테 전화 했나.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묻지 말아줄래. 미안해. 미안해까지는 아니고. 친구는 생각해서 말했을 텐데, 나는 그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버이날이었으니까. 평소 불효자여도 그날만은 웃으며 부모님을 봬야 하는 어버이날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고작 문자 하나와 용돈 조금을 보낸 게 전부이니까.


그래도 부모잖아,라는 말을 싫어한다. 종종 '어버이라는 신화'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부모라는 이유로, 나를 낳고 길렀다는 이유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상황이 나는 못내 불편하다. 나 역시 그런 부모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자식도 자신의 선택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부모의 선택으로 태어났다. 낳았다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여러 여건상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한다. 그 최소한의 노력은 사랑이다. 조건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책무다. 낳는 것만으로 부모가 되는 게 아니라, 기르는 것으로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부모라는 호칭은 그렇게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책무를 잊는다. 조건을 달아 사랑하거나, 자신의 마음대로 자식을 부린다. 때리거나 소리를 지르고 방임한다. 아동학대는 대부분 친부모가 저지른다. 학대가 가장 많이 벌어진 장소는 집이다. 몸에 가하는 것만 학대가 아니다. 마음에 가하는 학대는 티 나지 않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은밀히 일어난다. 가해자는 가해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피해자는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이런 사실이 너무나 두렵다.





아이가 예쁜 카드를 학교에서 만들어 왔다. 얼마 안 되지만 용돈을 주고 있으니, 초콜릿이라도 하나 사서 줄 줄 알았건만 달랑 카드 하나를 적어왔다. 종일 운동장에서 뛰어놀아 부모 선물을 살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나는 그저 그러려니 한다. 하나하나 색칠을 하고 줄을 그어 한 문장 한 문장 적어 내려갔을 그 마음을 생각한다. 


이 작은 아이에게 부모는 무엇일까. 나는 아이에게 어떤 부모인가. 부모라는 너무나 무겁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가벼워져야만 하는 자리를 생각한다. 나는 간절히 부모가 되고 싶었다. 없이 살아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며 살고 싶었다. 그렇게 부모가 되었다.


한때 아이를 위해 부모와 잘 지내는 척을 했다. 때때마다 챙기고 식사를 대접하고 용돈을 보내고 웃고 찾아가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자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그러지 않는다. 애쓰지 않는다. 나는 효자가 될 마음을 버렸다. 효자는 모든 자식이 꼭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효자 역시 어버이처럼 신화 속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나는 나의 자식들이 효자가 아니길 바란다. 나는 그들의 인생에 단 하나의 걸림돌도 되고 싶지 않다. 아이들이 어떤 미련도 없이, 어떤 걱정도 없이, 자신만의 인생을 향해 훨훨 날아가길 바란다. 나는 그저 나로서 행복할 것이니, 너희들은 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의 삶을 살아라. 부모를 생각하면 안쓰럽거나 속상한 게 아니라, 내가 없어도 상관 없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응원하는 사람들이라 믿기를 바란다. 그런 부모가 되고자 한다.   


자식은 부모의 모든 걸 받아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식은 부모가 아무 때나 하소연을 하고,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부모 자식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얼마나 서로에게 함부로 선을 넘어가는가. 뇌에는 자신과 타인의 영역이 나뉘어져 있는데, 가까운 사이일수록 자신의 영역에 둔다고 한다. 그러니 함부로 말하고 조언하고 조종하려 한다. 


경계가 없는 관계는 삐그덕 거릴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나로 살고자 한다. 자식은 내가 낳았지만, 나를 닮았지만, 나와는 완전히 다른 생명체다. 그 사실을 잊으면 경계는 무너진다. 보송한 솜털 가득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띄는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품에만 안고 싶다가도, 나는 아이를 놓아버린다. 너는 내가 아니다. 너는 타인이다. 너는 너로 살아야 한다. 나는 너를 낳았지만, 너를 구속하거나 조종할 어떤 권리도 갖지 않는다.


불효자가 아이를 키운다. 좋은 부모가 되겠다는 푸른 꿈을 꾸며 아이를 바라보고 사랑하고 어루만진다. 이렇게 예쁜 자식을 왜 그렇게 힘들게 했느냐고 따지고 싶지만, 이렇게 사랑스런 자식을 왜 쓰레기통 취급했느냐고 묻고 싶지만, 입을 닫는다. 다만 나는 나의 삶을 산다. 나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다.


이렇게 쓰고 또 쓰면, 언젠가 내 그릇이 한없이 넓어져 그런 어버이도 품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쓴다. 너무 많은 글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한 걸 보니 아직 나의 사유와 글이 모자라다는 걸 깨닫는다. 상처받은 나를 정화하고 내 그릇을 넓힐 방법으로 나는 쓰는 것밖에 알지 못하니, 오늘도 쓴다. 그러고 보니 나를 쓰게 한 건 부모였다. 부모라는 나의 결핍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골 학교의 책축제, 기적을 만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