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복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내 주변은 왜 이 모양인가, 나는 왜이리 인복이 없나,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며 살았다. 믿고 의지할 만한 친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런 친구들 맞은 편에는 꼭 시기 질투를 하거나 가슴을 찌르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딱히 내가 피해를 주거나 잘못한 일이 없어도, 덮어놓고 미워하거나 오해하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존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쯤. 관계 개선을 위해 부단히 애쓰거나 무시하는 척 하거나. 둘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기에, 사람을 대하는 일은 늘 두렵고 버거웠다.
애를 쓴 만큼 그런 사람들이 줄어든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것 자체가 힘에 부쳤다.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신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의 사람을 만드는 일은 꼭 하고 싶지만, 결코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인 듯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만이 믿을 수 있는 내 편을 만드는 일이라 여겨졌다. 결혼만 한다고 낳기만 한다고 내 편이 되는 건 아니지만, 에일 듯한 칼바람이 부는 사회에서보다는 쉽게 내 사람을 구하는 일인 것만 같았다.
섬으로 이주한 이유는 무척 복합적이었다. 일상적인 야근으로 찌들어가는 남편에게 쉼을 주고 싶은 마음, 물질만 중요시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던 소망,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했던 희망, 부모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속내까지. 여러 이유들이 겹치고 겹쳐 나는 섬으로 향했다. 섬에서도 사람을 만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섬이라 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이 결코 적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좁은 사회라서 더 겉으로 드러났고, 새 삶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어 올랐던 마음은 더 쉽게 쪼그라들었다.
아이를 낳자마자 나는 집으로 숨어들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집 밖에서 칼날을 숨긴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느니,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는 내 아이를 기르는데 집중하는 게 훨씬 나았다. 섬으로 이주하면서 육지 지인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레 소원해진 것처럼, 아이를 낳자 섬의 인연들도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한동안 남편과 두 아이만 바라보며 살았다. 몸은 너무나 고되지만, 마음만은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그런 시간도 잠시,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고 유치원과 학교에 진학하면서, 숨어 있고만 싶었던 나의 소망은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자꾸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고 졸랐다. 아직 작은 아이가 상처 가득한 엄마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세상이 마냥 궁금한 아이는 해맑게 내 손을 잡아 끌었다. 함께 세상을 만나자고. 같이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아이만 세상으로 나간 게 아니라는 것을. 나 역시 엄마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두려웠다. 또 상처를 받을까봐. 괜한 미움을 살까봐. 곁에 함께 있는 아이에게까지 영향이 미칠까봐 나는 불안했다.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감과 동시에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나는, 글로 먼저 세상을 만났다. 오랜 시간 좋은 글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믿어왔으니, 다시 글을 쓰며 나는 좋은 사람이 먼저 되어야만 했다. 깊이 생각해 보니 좋은 사람은 혼자 웅크리고만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글로만 떠들고 발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내가 선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건 어떤 걸까.
나는 못 이기는 척 내 손을 잡아 끄는 아이를 따라 나섰다. 조금씩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새로운 모임이 하나둘 생기고, 책임지는 일들이 늘어갔다. 행동 반경이 넓어질수록 주변에 사람들도 많아졌다. 함께 힘을 합쳐야 하는 일도 생겨났다. 분명 과거에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에 비례해 상처도 늘어났는데, 웬일인지 상처는 더 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해졌다.
요즘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게 크게 힘들지 않다. 더 이상 마음을 졸이거나 미움을 받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인복이라는 말을 이전처럼 믿지는 않지만, 확실히 예전보다는 인복이 많아진 것 같다. 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내 주변 사람들이 달라진 걸까, 아니면 나 자신이 변화한 걸까. 이전의 나는 왜 그토록 자주 상처를 받았을까. 지금의 내 주변에는 상처 주는 사람이 더는 없는 걸까. 아니면 상처를 받지 않는 내가 되기라도 한 걸까.
곰곰 생각해 보니 이전과 달리 나는 이제 사람을 좇지 않는다. 저 사람이, 저 무리가 내 편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을 좇는 대신 가치를 좇는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오랜 시간 내 안에 심고 또 심었던 수많은 씨앗들을 따라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지만 내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찾아가고 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몸은 힘들지언정 마음만은 가볍다. 아니, 마음이 가벼우니 몸이 힘들어도 쉽게 다시 회복한다.
이전의 나는 누군가 나를 알아주길 바랐다. 나의 가치를, 나의 노력을, 나의 희생을 알아봐주고 대단하다 잘했다 토닥여주기를 기다렸다. 치열한 생각 끝에 내면의 힘이 조금 생긴 나는, 더는 타인에게 바라지 않는다. 대신 나는 나를 본다. 끝까지 숨길 수 없는 건 단 하나, 나 자신이기에. 타인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기에. 스스로에게 떳떳하면 세상에도 당당할 수밖에 없다. 나를 속이지 않고, 나를 기만하지 않고, 나는 다만 내 안의 가치를 따른다. 내가 소중하다 믿는 것들을 좇는다.
여전히 내 주위에는 나를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향한 날카로운 칼날이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이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사람이 아닌 가치를 따랐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을 만나 감사하고 그들과 함께 걷고 싶다. 나는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러니 더는 인복을 탓하지 않는다. 인복은 타고 나는 게 아니었다. 열쇠는 내 안에 있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