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의 식탁과 카페의 카운터, 나의 책상이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펼치거나 책을 읽는 곳이다. 완전한 책상이라기에는 임시방편의 공간이다. 나의 일상을 파고든, 글의 자취가 스며있는 공간이랄까. 그러다 보니 나의 책장도 책상 못지않게 좀 엉뚱하다. 식탁 뒤편의 작은 김치냉장고 위나, 카페 카운터에 있는 간이의자가 내게는 책장이다. 책장이라기엔 자주 들춰보는 책을 올려두는 선반 정도의 용도랄까. 평소 읽든 말든 책을 잘 보이는 곳에 많이 쌓아두는 편이라, 내 주변에는 늘 서너 권의 책이 이런 임시 선반에서 뒹굴고 있다.
부엌의 식탁은 원래 목적이 책상이 아니라 식사이니, 끼니때가 되면 비워져야 한다. 노트북을 고이 닫아 옆으로 옮겨두고, 그 자리에 반찬들을 늘어놓고 식구들과 밥을 먹는다. 카페 카운터는 서서 드립 하기에 알맞은 용도로 만든 것이다 보니 높이가 일반 책상에 비해 높다. 여기서 글을 쓰다 보면 엉덩이는 뒤로 쭉 빠지고 목은 앞으로 빼꼼 들어 올린 상태가 된다. 잔뜩 찻잔이 드나드는 바쁜 시간에는 이곳의 노트북도 고이 닫아 간이의자로 치워진다. 얼마 전 간이의자에 있던 노트북을 들어 올리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고장나진 않았지만, 순간 좀 서러웠다. 책상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러면 이렇게 옮겨 다닐 필요는 없을 텐데.
며칠 동안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했다. 더 정확히는 하고 싶지 않았다. 거의 매일 글을 쓰기 시작한 지 20개월쯤 되었는데, 그동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카페에 머무는 것도 숨이 막혔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었다. 읽고 쓰기에 나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인데, 두 가지가 모두 무너지니 일상 속의 나도 허물어지고 말았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었다면 아마 임시휴무 네 글자를 걸어두고 어딘가로 정말 달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내가 벌여놓은 일터와 내가 선택한 가정이라는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마음이 왜 중력을 거슬리고 이리저리 붕붕 날아다니는 걸까. 단순히 봄을 탓하기에, 얼마 전 열정적으로 치러낸 책축제의 후유증이라고 보기엔, 제법 심각한 증상이다. 마음이 이러니 일부러 몸을 바삐 움직였다. 도망갈 수 없다면 생각을 줄여야 했다. 나무마다 옮겨 붙은 덩굴식물을 죄다 잡아 뽑으며 중얼거렸다. 지구상에서 너는 가장 생명력이 강한 녀석일 거야. 덩굴식물에 감겨 있던 로즈메리의 가지도 너무 뻗어나가 금귤나무를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정원가위를 들고 싹둑싹둑 대거 잘라냈다. 봄날의 햇살은 제법 뜨거웠고, 몸은 금세 땀으로 흠뻑 젖었다. 몸을 놀리니 전보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는 앙금이 내 안을 어지럽게 떠다닌다.
원인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안다. 책의 문제도 노트북의 문제도 카페의 문제도 아닌, 나의 문제라는 걸 아주 잘 안다. 내 안에 꿈틀대고 있는 어떤 욕망 때문이라는 걸. 큰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이런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도 또렷이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감정에 휩싸였던 게 십수 년 전이지만 내 안에는 그때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나는 2, 3년에 한 번씩 내 삶을 통째로 바꾸는 선택들을 하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어떤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삶을 통째로 바꿀 만큼의 큰 기로.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몰래 그려오던 장면 하나가 있다. 거실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 하나. 그건 나의 책상이다. 책상 위에는 내가 올려두고 싶었던 책이 잔뜩 쌓여 있고, 한쪽엔 노트북의 자리도 마련돼 있다. 이곳의 노트북은 옮기지 않아도 된다. 고정된 나의 책상이니까. 아이들이 학교를 간 뒤 운동을 마친 나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이 책상에 앉는다.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 풍경을 가만가만 바라보기도 하고, 쌓아둔 책을 꺼내 읽기도 한다. 그러다 때가 되면 노트북을 펼치고 내 속에서 솟아나는 것들을 적어 내려 간다.
해가 서쪽으로 기운 오후 아이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면 나의 책상은 우리의 책상이 된다. 아이들은 숙제를 들고 쪼르르 내 곁으로 달려온다. 테이블은 꽤 널찍해 언제든 우리는 함께 마주 앉을 수 있다. 나는 내 글을 쓰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숙제를 한다. 가운데에는 함께 먹을 간식이 놓여 있다. 이 책상은 우리 가족이 함께 각자의 책을 읽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각자의 책에 빠져든, 함께이지만 따로인 순간. 그렇게 함께 책을 읽다가 서로의 책에 대해, 오늘 하루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공간.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내게는 무척 간절한 소망이다. 나의 책상이자 가족의 책상을 갖는 것. 그 책상에서 읽고 쓰는 삶을 꿈꾼다. 머릿속에서만 막연히 떠올려왔던 이 소망이 내 안에서 제법 커졌음을 깨닫는다. 그 소망을 이제는 현실화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나를 마주한다. 혹 헛된 꿈이 아닌지 나는 자꾸 나와 내 주변을 살핀다. 이 욕망을 실현하는 건 이상이 아닌 현실의 문제라는 걸 안다. 나의 이상을 위해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돈에 대한 욕심이 크진 않지만, 그래도 먹고살아야 하니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아직 길을 찾지 못했으니 이 글은 결국 미완성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쓰는 건 꽉 막힌 것만 같은 내 마음에 숨구멍 하나를 내려고. 혈혈단신이었다면 지금보다 결정이 쉬웠을까. 돌이켜 보면 모든 결정은 무게를 지닌다. 삶을 얼마나 걸었느냐에 따라 무게는 달라진다. 무겁다는 건 그만큼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신중히 선택하고 그 길로 곧장 나아가야 한다는 것, 무거운 만큼 결정한 뒤의 삶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나는 나의 책상을 가질 수 있을까. 읽고 쓰는 것에만 집중하는 삶으로 용기 있게 건너갈 수 있을까.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고 믿는 편인데, 이번에는 도무지 모르겠다. 언제쯤 나는 책상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과연 글로 먹고살 수 있을까. 답은 어디에 있을까.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책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