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카페 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 마주 앉아 날씨를 확인하며 빵을 오물거리던 가족들은 저마다의 일터와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떠났다. 홀로 남은 나는 주섬주섬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문을 열자마자 하는 일은 조명 밝히기. 낮에도 불을 켜는 건, 멀리서 봐도 저기가 영업중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카페 조명은 전구색이다. 켜자마자 온갖 잡티가 다 보이는 가차없는 주광색이 아니라, 켜놓으면 순식간에 아늑하고 포근해지는 전구색. 전구색은 영어로는 warm white이고, 주광색은 cool white다. 온도를 담은 이름이 색을 지칭한다는 게 흥미롭다.
화창한 날에는 조명을 켜둔 게 잘 티나지 않는다. 햇빛이 창을 통해 사정없이 밀려드는 통에 조명의 색은 다 날아가 버린다. 같은 불빛이어도 흐린 날이나 비오는 날이면 사뭇 다르다. 햇빛이 잠잠해진 틈을 타 조명은 제자리에서 은은하면서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뿜어낸다. 오늘은 불빛이 화창한 날과 비오는 날 중간 어디쯤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명의 색감이 선명해졌다. 카페 전체를 노란 불빛이 따스하게 감싼다. 오픈하며 내가 상상했던 분위기가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그새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어디서 이렇게 밀려온 거지. 이 정도면 비가 곧 오겠는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날씨 어플을 켜니, 해가 난다던 날씨는 온데간데 없고 비와 번개 표시로 바뀌어져 있다. 비의 양도 적지 않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진다. 차마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행인이 서둘러 골목을 지나고, 흙 내음이 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누가 섬 아니랄까봐.
오늘과 달리 어제는 종일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바다가 잔잔하다 못해 호수 같았다. 파도의 높이는 5cm나 될까. 아무리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바닷가 인근에는 어느 정도 바람이 불기 마련인데, 어제 오후에는 바닷가에도 바람이 쉬어갔다. 부둣가에 의자를 펴놓고 한가로이 수다를 떠는 사람들을 보면서, 바다 근처 나무의 이파리들이 공기 중에 정지되어 있는 걸 보면서, 섬에서 이런 날이 일 년에 몇 번일까를 가늠해 보았다. 아마 한 손에 꼽히겠지. 그런 날이었다. 보기 드문 귀한 날. 바람 없는 무탈한 날.
오랜만에 해안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섬에 살아도, 지척이 바다여도, 일상에 치이다 보면 바닷길을 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랜만에 해안도로로 갈까. 바람이 정말 없다는 내 말에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는 바람이 없는 걸 어떻게 알아. 나뭇잎이 흔들리지 않아서 알지. 벌써 고기잡이 배들이 불을 켜네. 아이들은 내 손가락 끝을 따라 바다 저 너머로 시선을 옮긴다. 아이들이 묻는다. 한치잡이 배야? 그런 거 같은데. 벌써 한치 잡을 때가 됐구나. 불을 켜면 고기들이 막 몰려오는 거야? 오징어나 한치 같은 몇몇 종류만 그래. 그래서 저렇게 밝게 불을 켜는 거지.
어선이 켜는 불을 집어등이라고 한다. 먼 바다에 집어등이 켜지면,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걸 느낀다. 불 켜진 배들의 숫자가 적어지면,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게 되고. 섬살이를 하다보면 육지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계절을 알아챈다. 먼 바다에 불 켜진 배를 바라보는 건, 바다 근처에서만 누릴 수 있는 낭만 한 조각. 집어등은 따뜻한 전구색이 아니라 쨍한 주광색이지만, 멀리 있기 때문일까. 칠흑 같은 밤바다를 수놓기 때문일까.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련한 눈길로 불빛들을 바라보다, 배 위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멀리서 보면 이렇게 평화롭지만, 저 배 안에서는 어부들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겠지. 파도와 날씨와 체력과 한치와 씨름을 하며, 고된 밥벌이를 하고 있겠지. 물고기가 많으면 많아서, 없으면 없어서 힘겨운 하루일 테지.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이처럼 잘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라니.
그러고 보니 나도 매일 불을 밝히고 있었구나. 나만의 집어등을 켜고 있었구나. 한낮에도 나의 배에 불을 환히 밝히곤 변함없이 공간이 열렸음을 알리고 있었구나. 습관처럼, 관성처럼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지만, 어떤 날은 날이 좋아 손님이 많고 어떤 날은 날이 좋아 손님이 없다. 비가 오는 날도 마찬가지. 어떤 날은 비가 와서 손님이 많고 어떤 날은 비가 와서 손님이 없다. 그러니까 모든 건 날씨 탓. 하늘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내가 또 하루를 보내는 방법이다.
어떤 가게든, 누구의 삶이든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올 때가 있다. 한창 핫한 시절을 보낸 뒤 점점 기울어가는 가게를 운영하던 엄마는, 가게를 종일 지키며 내게 말했다. 지옥 같아. 발길이 뜸해지는 손님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유리 한 장의 벽으로 길고 긴 겨울바람에 맞서던 엄마. 나의 자리를 지키며 나는 나도 모르게 엄마가 홀로 견뎠을 숱한 날들을 떠올린다. 엄마는 그 지옥의 날들을 버티고 버티다, 오십 대에 이른 은퇴를 했다.
엄마를 떠올리며, 나의 자리를 생각한다. 나는 올라가고 있는 걸까, 내려가고 있는 걸까. 곧 문을 연 지 십 년이니, 올라가기보다는 내려가고 있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 나는 왜 이 배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꾸역꾸역 불을 밝히는 것일까. 더 환하고 강렬한 불빛을 향해 사람들이 몰린다는 걸 알면서도. 내 장사를 시작하고 나서야, 어떤 허름한 가게도 얕잡아 보지 않게 되었다. 장사가 잘 되면 잘 돼서 우러러보았고, 장사가 안 되면 안 되는데도 버티는 힘이 궁금해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멀리 있는 누군가의 눈에는 이런 나도 여름날 밤바다를 환하게 밝히는 한치잡이 배처럼 낭만으로 보이겠지. 섬으로 도망가더니 여전히 카페 불을 밝히며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틈틈이 읽고 쓰고 사유하지 않았다면, 나의 일상 역시 지옥이었을 것이다. 손님이 많으면 많아서 힘들고, 없으면 없어서 힘들었겠지. 읽고 쓰고 사유하기에 손님이 많아도, 없어도 마음이 어제 만난 바다처럼 잔잔함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바닥을 치는 일은 많이 줄었다. 엄마도 읽고 썼다면 덜 외로웠을 텐데. 천국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옥에 다다르지는 않았을 텐데.
누구나 자신만의 집어등을 켜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무리 불빛이 밝다 해도 그 안의 삶마저 쉬울 리 없다. 그러니 저 사람은 세상 편하게 산다고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함부로 단정하지 않기로 한다. 나만 왜 이리 힘드냐며 지나친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도 금물이다. 다만 아무리 발 밑이 지옥 같더라도, 나 역시 내 삶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고자 한다. 먼 훗날 바라보면 이 시간들은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한때인지도 모르니. 너무나 그리워질 순간일지도 모르니.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나의 자리를 지킨다. 버틴다.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