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오후, 카페를 방문한 손님 하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카페 이름을 재차 묻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적기 시작했다. 이름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며. 무슨 소리인가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따가 일기 써야 해서요. 까먹을까봐 적어두려고."
손님은 오륙십 대 남성이었다. 평범한 중년 남성 중에 자신의 의지로 일기를 꾸준히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믿어온 내게, 그 손님의 말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글 이야기가 나오면 들뜨는 나는 질문을 이어갔다.
"오 일기 쓰시나봐요?"
"써야지 남지요. 좋은 데 여행을 왔는데 더 열심히 써야죠."
"너무 멋지신데요?"
"멋지긴요."
손님은 다 적은 수첩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내게 물었다.
"제가 무슨 일 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일기를 쓰는 평범한 얼굴의 오륙십 대 남자. 이 사람의 직업은 무엇일까.
사람을 외향적으로 평가하는 걸 무척 꺼리는 편이다. 타인의 생김을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이해를 위해 그 손님에 대해 묘사해 보자면, 손님은 배가 좀 나온 평범한 오륙십 대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복장은 등산복과 평상복 중간 어디쯤이었고, 얼굴엔 제 나이에 걸맞는 적당한 주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피부색은 검붉었는데, 이 때문에 술꾼이라고 짐작해볼 수도 있었다. 인상을 쓴다면 험상궂어 보일 수도 있을 얼굴이지만,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라 인상보다는 부드러운 사람인 것 같았다. 목소리는 중후하면서도 발음이 무척 정확한 편이었다.
나름 예리하게 살펴봤지만, 겉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직업을 유추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너무나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속으로는 회사의 중역이나 자신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커피를 홀짝 들이키던 손님이 말했다.
"제 직업을 알아맞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대체 무슨 직업을 갖고 있기에 그런 걸까. 나는 추임새를 넣으며 물었다.
"아 정말요? 무슨 일 하시는데요?"
손님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초등학교 선생이에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내가 짐작한 직업 중에 교사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교사로 보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교사라고 하면, 점잖은 말투와 단정한 옷차림의 여자 선생님이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분명 내 편견이었다. 나만의 편견은 아닌 모양이었다. 살면서 누군가가 자신의 직업을 맞춘 적이 없다고 하는 걸 보면. 저 나이대 초등학교 남자 선생님도 분명 어딘가에는 존재할텐데, 나는 왜 그들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아이 학교에도 분명 전형적이지 않은 모습의 선생님이 존재한다. 비보잉을 무척 잘 하는 장발의 미남 선생님도 있고, 푸근한 옆집 아저씨 같지만 일렉 기타를 잘 치는 선생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의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모습인양, 머릿 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의 편견이 꽤 많이 지워졌다 생각하다가도 종종 이런 순간을 맞이하면, 얼굴은 붉게 달아오른다.
손님은 다른 원두를 선택해 연거푸 두 잔의 드립 커피를 마셨다. 여행 와서는 제대로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며, 오랜만에 마시는 드립이 참 좋다고 하면서. 커피와 글. 사실 이 두 가지도 사람에 대한 편견을 심어준다. 원두별 특성에 따른 커피 맛을 잘 알거나, 꾸준히 글을 쓴다고 하면, 갑자기 사람이 달라보인다. '커피의 오묘한 맛을 음미하고, 성찰하는 글을 쓴다니. 매력적인 사람인데.' 라는 선입견이 생기는 것. 자칫 잘못하면 직업까지 더해져, 선생님이라 일기를 쓰고 커피 맛을 안다는 편견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블루칼라의 사람이거나,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 사람과의 연관어에 커피나 글을 집어넣었을까. 나도 모르게 사람을 직업에 따라 구분하고, 취향의 등급을 나누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김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믿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생김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처럼. 지식인이어도 카페인이 맞지 않아 커피 맛을 모를 수 있고, 글쓰기를 싫어하거나 잘 쓰지 못할 수 있다. 지식과는 연관 없는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뛰어난 미각을 갖고 있을 수도 있고, 글쓰기가 취미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내가 가장 노력해야 했던 하나는 편견 걷어내기였다. 나이가 들수록 나도 모르게 박힌 편견들이 곳곳에 박혀 있는데, 이는 글을 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걸림돌이었다. 계속 글을 쓰려면 어떤 의견도 수용하고 내 안에서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편견이 많아지면 사고의 길이 막혀버린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글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나부터 달라져야 했다. 편견 없는 글이 되려면, 편견 없는 사람이 먼저 돼야 했던 것.
끊임없이 내 안에 잘못 박힌 돌덩이들을 찾아 빼냈다. 얼굴이나 몸매만으로, 나이나 지역만으로 사람을 재단하지 않기 위해 끝없이 나를 다그쳐야만 했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아직은 멀어 보인다. 내 안의 모든 편견을 제거하는 일.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 끝의 감각에 집중하며 다시 나를 더듬거린다. 이번엔 무엇을 빼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