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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Jan 31. 2022

짝퉁을 걸치면 짝퉁인생일까

찐인가 짭인가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야

고등학교 때 소풍을 앞두고 나는 이태원을 가곤 했다. 소풍때마다 사복을 입어야 했는데 내가 가진 돈으로는 원하는 브랜드의 옷을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 시절 내가 살던 지역의 친구들이 유독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었고, 그 브랜드의 옷은 티셔츠 한 벌에 십 만원이 넘어갔다. 엄마는 학생에게 그런 옷을 사줄 수 없다 버텼고 나는 결국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이태원을 갔다. 짝퉁을 사러.


그 시절 이태원 뒷골목과 건물 지하 상가에는 짝퉁이 정말 많았다. 진퉁은 십만 원이 넘어가는데 짝퉁은 몇 만 원이면 살 수 있었다. 짝퉁에도 급이 있어 A급의 경우 금액이 더 비쌌다. 어떻게든 좋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싶었던 나는 그런 짝퉁들을 사다 입었다. 그 시절 나는 그런 옷을 입어야 내 자신이 명품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 옷들이 나를 빛내줄 거라 굳게 믿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내가 입은 이 옷이 짝퉁이라는 걸 가장 잘 아는 건 누구보다 나 자신이었다. 진퉁과 정말 똑같은 옷인데도 입고 나가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당당해지려고 사 입은 옷이 당당하지 않았던 것. 한번은 별로 친하지 않은 한 친구가 내게로 다가와 뚫어져라 옷에 박힌 로고를 쳐다본 일이 있었다.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오 설마 진퉁? 그 순간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내가 입은 옷이 진퉁이라 주장할 수도 없었고, 짝퉁이라 고백할 수도 없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가고 시간이 흘러 집안 사정이 좀 나아지면서 내게도 진퉁이 늘어갔다. 더이상 나는 이태원에 가지 않았다. 진퉁이 많아질수록 내 삶도 진짜가 되어간다고 믿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친구들 때문에 학창시절에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어느 순간 내가 그렇게 변해 있었다. 타인의 차림새를 뜯어보며 진퉁인지 짝퉁인지를 가늠하려 한 것. 진퉁이면 속으로 인정을 하고 짝퉁이면 뒤에서 비웃는 그렇고 그런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겉은 진퉁을 걸쳤지만 속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면서 어느 순간 나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겉으로는 상관없다 말하면서 누구보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스스로가 언행불일치의 삶을 살고 있다고 깨달은 것. 그 불일치가 나는 짝퉁을 걸친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리고 오래 방황했다. 어떻게 하면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무엇을 걸치든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로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질문을 참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던졌다. 나는 진심으로 언행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 지난한 시간과 반복된 물음을 거쳐 나는 어느 순간 명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명품을 들든 짝퉁을 들든 그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사실로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가 명품을 걸치면 나의 탐욕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만 같아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 출연자가 짝퉁을 걸쳤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언론들은 그 사람이 걸친 아이템들이 진품이 아니라고 기사를 써댔다. 네티즌들은 여기에 동조해 그 사람이 그동안 입고 걸친 모든 아이템들을  찾아내 짝퉁이라 비난하고 있다. 그러다 한 매체는 모두가 가짜는 아니었다며 한국명품감정원에 의뢰해 진위여부까지 확인하고 나섰다. 이 기사는 조목조목 물품을 하나씩 따져가며 진품인지 가품인지를 대중에게 알린다.


대체 우리는 한 사람이 가진 모든 물품을 다 꺼내 왜 이렇게까지 장황한 사회적 검증 절차를 거치고 있는 걸까. 진퉁이든 짝퉁이든 그게 기사를 쓰고 비난을 하고 검증을 할만큼 중요한 일일까. 진퉁과 짝퉁의 비율이 어느 정도여야 사람들은 이 사람의 인생이 전부 가짜는 아니었다고 이야기하게 될까. 진품이 많을수록 그 사람의 인생이 진짜인 걸까. 가품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럼 가짜 인생이라도 살고 있는 걸까.


가품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건 불법이다. 수사를 진행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다. 하지만 한 개인이 가품을 사는 건 범죄로 보지 않는다. 유튜버는 공인일까 공인이 아닐까. 공인이 아니라 해도 영향력 있는 방송에서 가품을 입은 건 문제다. 진품인 척 하고 제대로 해명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두고 이렇게까지 언론과 네티즌이 한 인간 자체가 짝퉁인 것처럼 몰아가는 게 정상일까. 가족까지 털어내며 마녀사냥을 하는 게 과연 옳을까.


이쯤 되면 명품에 환장하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불경기가 심각한데도 명품 산업은 고공행진을 한다. 가격이 오를까봐 텐트를 치고 새벽부터 기다려 물건을 구매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명품을 살까. 수백, 수천을 호가하는 물건은 정말 그 돈의 가치를 지닐까. 명품은 정말 명품일까. 명품을 가지면 사람도 명품이 될까. 그런 식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건 과연 옳을까.


어린 시절 나는 왜 짝퉁이라도 가지려 그토록 애를 썼는지 돌아본다. 나는 무시 당하고 싶지 않았다. 돋보이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브랜드가 나를 드러낸다고 착각했다. 내면의 나를 채우려 들지 않고 겉모습으로만 나를 남에게 드러내려 했다. 내면이 부실하니 외면에 집착한 것. 한갓 브랜드로 사람을 나누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편협한지 알지 못했다. 명품에 환장하는 문화도 결국 여기에서 기인한다. 인정받고 싶어서.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돋보이고 싶어서.


치장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인지도 모르겠다. 진화적으로 인간은 배를 채우고 나면 자신을 치장했다고 한다. 그만큼 돋보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것. 수렵채집 시절 이성에게, 타인에게 자신이 돋보이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건, 나를 지키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 결국 그 시절의 치장은 생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치장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명품을 많이 걸칠수록 우리는 생존에 유리해지는 걸까. 타인에게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려면 명품을 꼭 많이 가져야 하는 걸까. 진품과 가품을 잘 구별하는 사람은 매력적인가. 우리는 이토록 명품에 목을 맬 만큼 생존에 급급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 사회가 발전해 안전망이 두터워지고 더이상 생존에 목숨 걸 필요가 없어지면, 사람들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가치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될까.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상시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가 끝났는데도 인간은 왜 여전히 치장에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갈까. 자신의 치장에서 그치지 않고 남의 치장까지 간섭하고 평가하려 드는 사회는 과연 옳은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서로가 서로를 재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눈을 가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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