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너무 많다. 요즘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다. 말이 너무 많다. 음성지원도 안 되는 말들이 너무 많이 허공에 떠돌아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이때다, 싶었을까. 마치 누구 하나 잡아 족칠 사람이 필요했다는 듯, 너도 나도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어 뜯는다. 물어 뜯기는 입장이 됐다면 이 상황을 의연하게 넘길 수가 없다. 무는 쪽도 물리는 쪽도 다들 제정신이 아니니까. 생사가 걸린 일에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힘, 이걸 가리켜 메타인지라고 한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은 왜 중요할까. 경거망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신나게 써대던 현안글을 줄이고 있는 건, 내가 정말 목소리 낼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글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언뜻 아는 것으로는 글을 쓸 수 없다. 아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글은 판단을 하게 한다. 팩트만 전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뉘앙스는 그래서 무섭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며 언어적인 것보다 비언어적인 측면에서 더 상처를 받듯, 글도 마찬가지다. 아 다르고 어 다른 언어는 은연 중에 글쓴이의 생각을 드러낸다. 아무리 조심해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글을 쓰면서 종종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 든다. 기사든 칼럼이든 댓글이든 글을 쓸 때 신중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판단은 신중해야 한다. 사법 절차가 지난하고 복잡한 건, 이해관계는 복잡하고 판결은 힘겹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과정을 지켜 판결을 이끌어내도 찝찝한 게 사람 간의 일이다. 누군가는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누군가는 판결을 의심한다. 사람이 하는 일에 완벽이나 완전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그래서 늘 어렵다. 하물며 도덕조차 시대에 따라 얼마나 얼굴을 달리 하는가.
그러니 그 어떤 것에도 판단하는 일은 신중해야만 한다. 양쪽 입장을 들어봤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정확한 상황을 알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당사자라 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상황이라는 건 복잡미묘한 것이다.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유가 단 하나인 경우는 단언컨대 없다. 문제는 반드시 복합적으로 얽혀서 나타난다.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자료 하나만으로 전체를 볼 수는 없다.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 완전한 양쪽의 입장이 나오기 전까지. 전체 사건의 밑그림이라도 그려볼 수 있을 만큼 상황 분석이 끝날 때까지. 사법부의 판결이 나올 때까지. 비슷한 일을 겪어본 사람이라해서 그 상황을 지레 짐작하고 판단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어딘가에서 비슷한 희생자가 나왔다 해서 그걸 연결해 함부로 가해자로 낙인을 찍어서도 안 된다. 상황을 좀 안다 해서 한쪽을 피해자로, 다른 한쪽을 가해자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건 명백한 월권이다.
나는 모른다. 특수교육의 현실도 모르고, 시스템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른다. 아동학대 정황이 포착됐을 때 부모 입장에서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를 학대로 봐야 하고 어디까지를 교육으로 봐야 할지도 나는 모른다. 경험이 일천하고, 취재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비장애아의 경우도 명확히 알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장애아다. 그 아이의 장애가 어느 정도이며, 어떤 증세를 갖고 있고, 어떻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 교우관계는 어떻고, 교사와의 관계는 어떤지, 어떤 교육과정을 밟아왔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해도, 모두를 알고 있다 말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 입을 다물어야 한다. 모르는 문제에 섣불리 왈가왈부하는 건,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 붓는 격이다. 입이 근질거려도 참아야 한다. 확실한 건 단 하나 뿐이다. 이 사건은 결코 단순한 잣대로 판가름할 수 없다는 것. 교육 행정시스템과 장애교육의 현실, 장애인에 대한 시선, 교육에 대한 과몰입, 교사의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교육 3주체(교직원, 학생, 학부모)의 복잡한 이해관계, 그동안 쌓여온 수많은 일들이 종합적으로 엮여 벌어진 일이라는 것.
굳이 가르자면, 모두가 피해자다. 엉망진창인 시스템, 인력난에 시달리는 특수교육, 장애에 대한 몰이해, 개개인의 이기심과 인내심 부족 등. 학생과 교사 모두를 함께 막아줄 방패 하나 제대로 설계하지 못한 한국 교육의 처절한 실패다. 학교의 존재 이유가 온통 성적인 나라의 민낯이다. 특수교육에 대한 진지한 성찰 한 번 해보지 못한 교육계의 패배다. 이런 총체적인 난국 속에 벌어진 일을 마녀사냥 한 번 한다고 대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그 사이 사람만 죽어 나간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죽인다. 입이 참 가볍디 가볍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방영할 때 사건이 터졌다면, 교사를 마녀사냥 했을 거라는 말은 그래서 뼈아프다. 이 상황에 모든 건 타이밍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나 무책임하다. 기사 하나하나에 주목하며, 일희일비 하는 것 또한 바람직한 자세가 아닌 것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다림이다. 그리고 기다림을 앎으로 채워가는 지혜다. 진짜 특수교육의 실체를,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의 교육 현실을, 특수교사의 자격을 넘어 근무 여건을, 문제가 생겨도 뒷짐만 지고 있는 책임자들의 민낯을, 똑똑히 살펴야 한다. 그 뒤에 판단을 해도 늦지 않다. 그 뒤에 말을 보태는 게 우리 사회에 이롭다.
우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바라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더 멀고 아득한 곳이다. 갈 길이 참 멀다. 그렇게 수많은 마녀사냥을 하고도 또 하고 있는 모습이 한탄스럽다. 언제든 손가락은 내가 될 수도 있다.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것. 모르면 알 때까지 기다리는 것.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것. 이 세 가지만 지켜도 세상은 좀 덜 시끄러울 텐데. 기다리지 못하는 걸 보면 사람들은 늘 두드릴 무언가가 필요한 모양이다. 나의 분노를 담아 사정 없이 내리칠 무언가. 결국 찢어발겨질 때까지 때리고 또 때릴 무언가. 그 무언가가 사람이라는 현실이 참 아프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