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우 Sep 14. 2023

고마워, 도서관

공공도서관을 가기 시작한 건 중학교 때였다. 친구들과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다 함께 도서관으로 향하곤 했다. 공부를 한다는 건 핑계였고, 수다를 떨고 밥을 먹고 서가를 들락거리며 책 제목만 들여다봤다. 그러던 어느 날 실컷 놀다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자리로 돌아오니, 쪽지와 캔음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여중을 다니고 있었고, 당시만 해도 아직 이성에 눈을 뜨지 않은 순진한(?) 학생이었던지라 그 쪽지와 캔음료가 반가우면서도 두려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 또래 남학생이 수줍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쪽지의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였다. 다음날 다시 도서관에서 만나자고 적혀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받은 고백에 얼떨떨해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연애를 해본 적이라고는 없는, 평소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딱히 나누지도 않던 똑 단발 친구들이었는데도 그랬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고 친구들은 다 함께 또 도서관을 오자고 약속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옷차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스스로를 꾸미는 방법을 모르는, 교복이나 입고 다니는 그렇고 그런 학생이었다. 일요일이라 사복을 입고 가야 하는데, 뭘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몰랐다. 입을 만한 사복도 없었다. 고민을 하다 옷장 안에서 발견한 품이 넓은 청재킷을 꺼내 입었다. 예쁨과는 거리가 먼 옷이었다. 내게는 이상한 고집 같은 게 있는데, 이성이라고 못박고 만나는 자리일수록 멋을 덜 부린다는 점이다. 소개팅 자리에서 한 번도 치마를 입은 적이 없다.


아무튼 별로 예쁘지도 않은 그 재킷을 떡하니 입고 나가니 친구들이 한 마디씩 했다. 이게 뭐냐, 남자를 만나는데. 이쁘게 입고 좀 나오지. 나는 옷이 그리 중요한가라는 의문을 품었고, 쪽지를 건넨 남학생과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친구들은 어딘가에서 이 장면을 숨어서 지켜보았고.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집 전화번호라도 주고받았을까. 아마도 그랬겠지. 그 시절 유일한 연락 수단은 그것뿐이었으니까. 26~27년 전인데, 휴대폰은커녕 호출기도 이메일도 없었다.


중요한 건 그 뒤로 남학생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는 것. 그 뒤로도 도서관을 계속 갔지만 그 남학생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친구들은 그놈의 청재킷 때문이라고 했고, 나는 아쉬우면서도 후련했다. 두려운 마음을 그제야 떨칠 수 있었으니까. 여학교를 다니다 보니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남학생의 존재가 막연히 두려웠다. 목소리가 굵어지고 어깨가 벌어지고 솜털 같은 턱수염이 자라는 남학생은, 내가 알던 친구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아쉽게도 그날 이후 내게 쪽지를 건네는 남학생은 더 이상 없었다. 신도시로 전학을 가면서 자연스레 그때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전학을 간 뒤에는 고등학생이 된 뒤에야 도서관을 다녔다. 칸막이가 있는 독서실보다 널따란 테이블에 여럿이 앉아 자유롭게 공부하는 분위기를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갑갑한 열람실보다 자료실에 놓인 커다란 책상에 주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문학소녀는 아니었다. 글 쓰는 사람 중에는 소싯적 문학소녀인 사람들이 많던데, 나는 도서관을 자주 다녔지만 문학에 빠진 학생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연애소설을 들춰보긴 했지만 그리 관심이 많지 않았다. 공부와 상관없고 유명하지도 않은 이상한 책들을 뒤져보는데 오히려 관심이 많았다. 그중에는 야한 책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런 책을 발견하면 친구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득대며 함께 보곤 했다.


읽지는 않고 서가를 왔다 갔다 하며 어떤 종류의 책이 세상에 있는지를 구경하는데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고3 때 틈만 나면 책을 읽는 짝꿍을 만나면서 책의 재미를 조금씩 알아갔다. 이후에는 다독가까지는 아니어도 책을 읽는 사람이긴 했는데 주로 빌려보았다. 대학 도서관이나 동네 도서관에서. 당시 성업했던 도서대여점에서도 자주 책을 빌렸다. 비디오도 함께 대여할 수 있는 곳이어서 책과 비디오를 함께 빌리곤 했다.


책을 사는 비용은 늘 부담스러웠다. 책을 놔둘 공간이 많지도 않았지만, 책을 사서 보기에 이십 대의 나는 가난했다. 아주 가끔 책을 샀다. 카페를 열면서 그렇게 하나둘 모은 책들을 손님과 함께 보려고 꽂아두었다. 어느 날 문득 살펴보니 책에서 정치적인 색깔이 많이 드러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뒤로 그런 종류의 책을 모두 빼고, 대신 에세이나 소설 위주의 책을 꽂아두었다. 카페에 머무는 한두 시간 동안 가장 손쉽게 손님들이 꺼내 읽는 책은 주로 에세이였다. 언제부턴가는 나를 위한 책이 아니라, 손님을 위한 책을 샀다.


나를 위한 책을 사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았다.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도서관에 없으면 희망도서로 신청해 받아보았다. 받는 데까지 시일이 제법 걸리지만, 내가 읽는 책을 전부 사서 읽는 건 사치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렇게 빌려본 책 중에 '이 책은 두고두고 읽겠구나', '언젠가 이 부분을 내 글에 인용할 것 같다'싶은 책만 하나둘 구입하고 있다. 요즘은 내 취향에 맞고 소장각이다 싶은 책은 읽어보기 전에 사기도 한다.  


여전히 도서관을 사랑한다. 시골 도서관이라 서적 보유량은 도시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매달 희망도서를 신청할 수 있고 인기 있는 책을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간은 쾌적하고 사서분들은 친절하고, 적은 보유량임에도 보석처럼 박혀 있는 책들을 찾아보는 기쁨이 있다. 사서분이 내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우리 가족이 매주 도서관을 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었다. 아이들은 서로 더 많이 빌리겠다고 아웅댄다.


며칠 전 도서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보통 예약도서나 희망도서 찾으러 오라는 연락은 문자로 하기에 웬 전화인가 했는데, 의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우리 동네 다독자로 뽑혔단다. 1년에 한 번, 독서의 달인 9월에 시상하는 상이란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도서관에서 가장 많은 책을 대출한 사람이라는 것. 상장과 상품 증정이 있으니 방문해달라고 했다.


전화를 받고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내 이름으로 빌렸지만, 상당수가 아이들 책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습만화를 좋아하다 보니, 도서관에 있는 웬만한 만화는 한 번씩 다 빌렸을 정도로 아이들의 책을 많이 빌렸다.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양은 1인당 10권인데, 그중 70%는 아이들 몫이었다. 그러니 내가 받아도 되는 상인가 싶어 민망했다. 우리 가족을 대표해 받는다고 생각하면 좀 나았지만.


오전에 도서관에 들러 상장과 상품을 받고 사진도 하나 찍었다. 보도자료에 실린단다.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새로 빌린 책과 함께. 상품은 무려 5만 원어치의 문화상품권. 매달 세 권씩 희망도서를 신청해 받는 것도 감사한데, 상품권까지 주다니. 동네 도서관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다독자 인증서! 이렇게 감사할 때가! ©박현안


최근에는 아이 학교의 새로 지은 강당 안에 새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야간 도서관도 운영하고 있어,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질질 슬리퍼를 끌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좀 읽다 오곤 한다. 동네 도서관보다는 서적 보유량이 적지만, 아이들 친화적인 인테리어에 친구들도 만날 수 있어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그동안 도서관을 위해 야근을 마다하지 않으신 선생님들과 지킴이 봉사자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난다.


오늘 상을 받은 뒤 빌려온 책은 <E=mc2>라는 과학책이다. 데이비드 보더니스라는 과학 전문 작가가 적은 책으로, 특이하게 사람이 아니라 공식에 대한 전기다. E=mc2라는 위대한 공식이 나오기까지 연관된 무수히 많은 사람과 사연들을 따라가는 책이다. 과학책이지만 무척 쉽게 읽힌다. 온라인 서점에는 최근에 나온 책도 있던데 내가 빌린 건 2001년에 나온 초판본 21쇄다. 이 책이 너무나 읽고 싶었는데 도서관에 딱 자리하고 있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참 여러모로 감사한 도서관이다.


도서관은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이자, 꿈을 키울 수 있는 곳이고, 인간의 지식과 지혜가 모여있는 신전이다. 아직도 읽을 책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막막하다가도, 여전히 읽을 책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흐뭇하다. 다시 지적 유희를 위해 책을 펼친다. 시골에 처박혀 살아도, 별다른 일 없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도, 책만 있으면 언제든 어떤 세상으로든 떠날 수 있다. 책은 진정한 마법의 타임머신. 도서관 덕분에 나도 아이들도 자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저 그런 단상들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