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과학 덕후가 되었다. 나를 과학으로 안내한 건 다름 아닌 첫째 아이다. 돌이 조금 지난 무렵부터 첫째는 과학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동물, 그중에서도 코끼리를 유달리 사랑했다. 코끼리가 손톱만한 크기라도 그려져 있는 책은 죄다 꺼내 읽어달라고 졸랐다. 코끼리 사랑은 공룡으로, 공룡은 곤충으로, 곤충은 파충류로 진화했고, 요즘은 온갖 동물 종이 접기와 과학 학습만화 읽기에 푹 빠져 있다.
과학책을 자주 읽어주다 보니 점점 과학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시골에 살다 보니 아이의 관심사를 뒷받침해 줄 만큼의 사교육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관심을 지속하는 데 내가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 고민하다 생각한 게, 나도 함께 관심을 갖는 것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과학책을 하나씩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의 관심을 따라 생물에 먼저 관심을 두었다. 이어 천문학책과 물리학책도 보게 되었다. 한참 진화에 빠져 있었고, 요즘은 물리가 참 재밌다. 점점 발전하는 뇌과학도 흥미로운데, 특히 의식과 명상에 관한 연구를 응원하며 지켜보는 중이다.
한 모임에서 과학을 덕질하고 있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과학을 덕질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덕질이라고 하면 연예인이나 특정 예술 분야가 떠오르기에, 학문에 속하는 과학이 덕질 대상이라 분류해보지 않았던 것. 곰곰 생각해 보니, 이건 아무래도 덕질이 맞는 것 같다. 흥미로운 과학책을 보면 당장 넘겨보고 싶어 안달이고, 과학커뮤니케이터들의 강연이나 토크 영상을 즐겨 본다. 오리온자리 부근에서 새로운 별 수천 개가 발견됐다는 기사나 AI에게 심호흡을 지시하면 능력이 향상된다는 기사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정독을 한다. 혼자 있을 때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속도를 떠올려 보거나, 다른 행성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을 상상하니, 덕후 중의 덕후인 듯하다.
얼마 전에는 독서모임에서 과학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혼자 흥분해서 말을 너무 많이 하고 말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연거푸 과학 이야기를 하고는, 돌아서서 한참 내 행동을 돌아보았다. 나는 왜 그리 흥분을 했을까. 과학에 별로 관심도 없고, 흥미로워하지도 않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왜 실수라고 생각될 만큼 수다를 떨었을까. 나는 사람이 그리웠다. 함께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과 자리가 너무나 간절했다. 아이들과 남편과 종종 과학 이야기를 하지만, 더 깊고 넓은 이야기를 함께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
나는 왜 이렇게 과학을 좋아할까. 문과 출신에, 과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듯 보이는 나는 대체 왜 과학에 이토록 진심일까. 이유를 곰곰 생각하다 보니 이 문장이 떠올랐다.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떨림과 울림, 김상욱 지음, 동아시아 출판, P269>
이 문장을 처음 읽고는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과학이 지식이 아니라니.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라니. 이후 접하는 과학책과 과학커뮤니케이터들을 통해서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과학의 태도는 다름 아닌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모르는 건 확실히 모른다고 말하는 용기.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 함구하는 겸손. 그게 과학적인 것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몰려 있을 것만 같은 과학계의 태도가 무지의 인정이라니. 무지를 인정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있을까. 남들만큼은 알고, 남들만큼은 가졌고, 남들만큼은 경험했다고, 자신을 과장하는 게 인간의 특징이 아니었나. 나 역시 그런 거짓된 언어와 몸짓 속에 갇혀 살았던 시절이 있지 않았나. 그런데 무지를 인정한다니. 이 말은 나를 떨리는 동시에 울리게 했다.
“과학은 지속적인 연구와 보정작업을 거치면서 객관적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한 세대에 진리로 통하던 것이 다음 세대에 완전히 폐기될 수도 있고, 더 큰 밑그림의 일부로 판명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매력이다.” <엔드 오브 타임, 브라이언 그린 지음, 와이즈베리 출판, p305>
그 어떤 진리라 해도 새로운 진리 앞에 틀림을 인정하고, 전체가 아닌 부분임을 받아들인다는 것. 이런 자세가 내게는 더없이 근사해 보였다. 홀딱 반할 만큼.
우리의 두뇌는 ‘정확한 이해’보다 ‘빠르고 간단한 이해’를 선호하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신중한 평가보다 빠른 판단이 생존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빠르고 간단한 이해가 아니라 신중하고 정확한 이해의 과정이다. 하나의 진리가 나오기까지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의 세월을 할애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스포트라이트는 몇몇 유명한 과학자들이 받지만, 그 과학자들 뒤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과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진화를 거스르며 자신의 생을 걸고 있는 것. 진리라고는 없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진리인 것을 알아내기 위해 오늘도 물질과 싸우는 사람들. 이런 과학계에 더 없는 매력을 느꼈다. 덕후가 될 만큼.
에세이를 주로 쓰는 사람에게 과학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쓸모만으로 세상을 바라봤다면 과학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걸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걷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내 글에 과학이 녹아들고 있다는 걸. 인간이나 사람 대신 호모 사피엔스를 적고, 인간이나 사회의 어떤 현상을 이해할 때 진화적으로 접근한다. 물론 조심스럽다. 일부만 하는 인용은 악용이 될 수도 있기에,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아닌데 적용한다는 게 과욕이 될 수도 있기에, 글을 쓰면서 과학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단단히 점검한다. 그런데도 자꾸 나도 모르게 과학을 말하는 건,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좋아하면 나누고 싶다. 함께 이야기하고 싶고. 더 많은 이들이 과학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과학을 마땅히 알아야 할 교양으로 받아들이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 과학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다. 과학은 물질을 탐구하니 인간미라고는 없을 것만 같지만, 사실 어떤 학문보다 인간과 세상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과학의 가장 근원에는 인문학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물음이 걸린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레 인문학적 관점이 자란다. 과학을 바탕으로, 과학이 이룩한 토대 위에 인문학을 쌓게 된다. 결국 과학도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을 알기 위해 시작한 학문이기에. 내게 인문학과 과학은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은 분야로 인식된다.
사오십 대가 모이면 하는 이야기는 대동소이하다. 자녀 이야기를 하거나 골프 이야기를 하거나 주식 이야기를 하는 것. 모두가 아이를 기르고, 모두가 골프를 치고, 모두가 주식을 하는 건 아닐 텐데. 우리는 왜 모두가 같은 궤적을 돈다는 듯 비슷한 이야기만 하는 걸까. 이런 이야기 대신 과학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과학을 넘어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종이고, 어떻게 이 땅에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하는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는 무엇인지. 우주에서 사고가 가능한 생명체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일상에서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안에 또 하나의 꿈이 자란다. 과학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꿈. 창백한 푸른 점에서 꾸는 푸르디푸른 꿈이다.
*<창백한 푸른 점>은 칼 세이건이 쓴 책의 제목으로,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를 뜻한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과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