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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Oct 24. 2023

서사가 사라진 세상

장소 힐링 소설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경에 대하여

이번 보호자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은 <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였다. 두 손에 받아든 책은 낯설지 않았다. 한 손에 가볍게 들리는 크기와 무게, 작은 서점의 모습이 그려진 겉표지까지.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책이었다. 그러고 보니 새삼 이런 종류의 책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불편한 편의점>,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등.


<오늘도 고바야시 서점에 갑니다> 가와카미 데쓰야 지음, 송지현 옮김, 현익출판


그러고 보니 이런 책이 인기를 끈 지 제법 오래 되었는데 나는 한 권도 읽지 않았구나. 책은 쉽고 빠르게 읽혔다. 70년 동안 버텨온 동네서점을 대를 이어 지키고 있는 유미코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가는 출판유통회사 신입사원인 리카의 성장 이야기가 큰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10년째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보니 배울 점도 있고,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다.


책을 덮자마자 비슷한 종류의 <불편한 편의점>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역시 쉽고 빠르게 읽히는 책이었다. 찾아 보니 김호연 작가는 <불편한 편의점 1, 2>권으로 100만부의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인세만 10억이 넘는다. 성인 한 명이 일 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나라에서 이런 판매 수익을 올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책만 써서 밥 먹고 사는 게 모든 작가들의 꿈일 텐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 그런 작가는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런 험난한 출판시장에서 이른바 ‘장소 힐링 소설’이라 불리는 장르가 인기를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조 원에 이르는 웹소설의 인기도 그렇지만, 이런 소설들의 인기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연극 같다는 점이었다. 연극은 무대라는 한계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두 책은 모두 서점과 편의점이라는 하나의 장소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큰 중심 서사가 없는 대신 잔잔한 여러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큰 고난은 없지만 나름의 성장을 하고, 독자들은 소소한 감동과 위로를 받는다.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장소가 배경이지만, 나오는 인물들은 다소 이상적이라 판타지 같기도 하다.


책을 읽고 이우정 작가의 드라마 <응답하라>시리즈가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응답하라 1988>만 시청했는데, 드라마라기보다 시트콤 같은 느낌이었다(당시 이런 평론이 크게 논란이 된 적이 있지만, 나는 공감하는 편이다). 큰 서사는 없지만, 매회 새로우면서도 잔잔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흥미로운 시대적 배경과 뚜렷한 캐릭터 설정이 전체 이야기를 끌어가고, 시청자들의 관심도 촉발하는 듯했다.


일본의 유명한 만화 <심야식당>도 떠올랐다. 2006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이 만화는 늦은 밤에만 열리는 음식점을 중심으로, 여러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소설 분야에서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원조로 불린다. 이 소설이 출간된 게 2012년이다. <응답하라>시리즈의 첫 작품인 <응답하라 1997>이 방영된 시점 역시 2012년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인기를 끈 지 족히 십 년이 넘었다는 말이다.


긴 서사보다 짧은 이야기나 간결한 메시지를, 깊은 울림보다 잔잔한 위로와 감동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 생각할수록 기시감이 든다. 서점가에서 에세이가 인기를 끄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순서에 상관없이 아무데나 펼쳐서 읽어도 되고, 배경지식이 없어도 되는 호흡이 짧은 이야기. 그게 에세이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숏폼도 생각난다. 길이가 짧은 형태의 콘텐츠를 뜻하는 숏폼. 틱톡, 릴스, 스토리 등 동영상 역시 점점 짧아지는 추세다. 책이나 영화도 직접 보지 않고, 요약된 영상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긴 서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바쁜 삶이 오버랩된다. 위로와 감동은 받고 싶지만, 오랜 시간 깊이 빠져드는 건 거부하는 사람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더 짧게 더 빠르게 더 많은 걸 소비하는 사람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문장의 속뜻을 해석하려 애쓰고, 작가가 숨긴 장치나 의도를 찾는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다. 더 길고 자세한 이야기를 궁금해 하고, 더 깊은 사유를 하는 사람들이 줄고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입맛이 썼다. 이야기는 시대로부터 태어나고, 시대는 이야기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 끝에 책 한 권이 떠올랐다. <피로사회>로 유명한 한병철 재독 철학자가 최근에 출간한 <서사의 위기>였다. 이 책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슈만 좇느라 정작 자기의 생각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스토리 중독 사회를 고발한다. 여기서 나만의 생각과 맥락이 서사라면, 반짝하고 사라져 버리는 뉴스와 정보가 스토리다. 스토리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따온 말로, 24시간 동안만 볼 수 있는 짧은 게시물을 뜻한다.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다산초당 출판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조용히 감상하기보다 스마트폰을 꺼내 찍고 올리기에 바쁜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기보다 남의 생각을 빠르게 훔쳐보고 차용하며 자신의 생각이라 착각하는 사람들. 우리는 눈앞에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을 좇느라, 정작 진짜 숨겨진 이야기는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닐까.


바야흐로 서사가 실종된 사회다. 긴 이야기를 듣지 않고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 사회. 떠다니는 수많은 정보를 정신없이 습득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 인간이 직면한 수많은 문제들이 떠오른다. 한계에 봉착한 자본주의, 이미 시작된 기후변화,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등.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서사를 읽어야 한다. 역사를 알고 맥락을 읽어야,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점점 서사를 읽는 사람이 줄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모든 호모종을 제치고 유일한 인류로 남은 이유, 거기엔 분명 서사가 있다. 유일하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이야기를 믿는 종인 호모 사피엔스. 때문에 종교가 탄생하고 국가가 세워지고 이념을 만들 수 있었다. 이야기의 실종은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 이유의 상실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우리 사회를 어떤 세상으로 이끌게 될까. 아득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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