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는 커다란 두 개의 창문이 있다. 카페가 내가 속한 세계라면 두 개의 창은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얇은 장벽이다. 창문은 세계 너머의 날씨와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만 공기는 차단한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구나. 공기가 제법 차겠구나. 오늘은 햇살이 참 포근하구나. 투명하게 바깥세상을 보여주는 창문 때문에 나는 가끔 착각한다. 내가 지금 있는 이 공간이 나의 사회라고. 나는 사회에 나와 있는 거라고.
카페는 사회가 아니다. 감옥에 더 가깝다. 불특정 다수가 오가고 말을 섞지만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내가 카페에서 틈틈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대부분의 관계가 일회성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관계만을 두고 사회에 나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말하기는 어렵다. 꼬이고 엮이며 울고 웃는 인간관계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자주 착각에 빠진다. 여기가 나의 사회적 공간이라고. 나는 분명 세상에 발을 딛고 있다고.
글도 사실 창에 가깝다. 세상 그 자체라기보다 세상을 드러내는 하나의 창인 것. 글은 내게 세상과 나를 연결해 주는 매개이기도 하다. 나는 글을 통해 나를 드러내고, 타인은 내 글을 읽으며 나라는 한 사람을 알아간다. 글을 쓰면서 줄곧 생각해 왔다. 소심한 나는 글로 세상과 만나고 있다고, 세상과 맞서고 있다고. 나는 격렬하게 세상과 분투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글로 정의를 말하고, 글 속에서 정의로워진다. 글이라는 투명한 매개 때문에 자주 잊는다. 내가 여전히 나만의 감옥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진실을.
첫 아이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진짜 사회로 나가는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외면했다. 웬만하면 학교에 가지 않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한 것. 내가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면 학교 일에 관여하는 보호자는 대부분 치맛바람이었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아이를 더 유리한 자리에 두려는 욕심을 가진 이들이 학교를 더 자주 찾아갔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는 나는 학교를 먼발치에서만 바라봤다.
그런 내 생각이 구시대적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를 자주 방문하는 보호자들은 개인적인 이권을 위한 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책을 읽어주거나, 뒤에서 묵묵히 각종 행사를 기획하거나 돕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학교는 좋은 학교라고 소문난 혁신학교다. 고여 있는 곳이 좋은 학교가 될 리 만무하다. 그 속의 구성원들이 제 역할을 해낼 때 조금 더 나은 학교가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모른 척하기가 어려웠다. 아이를 맡기기만 하고 무임 승차하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짙어졌다.
그러다 작은 일 하나를 맡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은 금세 그 규모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일은 많고 손은 늘 부족했으니. 일을 하던 사람들만 항상 고생을 자처하고 있었으니.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하나 둘 일을 떠맡다 보니 꽤 많은 양의 일을 혼자 감내하고 있었다.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과 한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앓는 소리를 할 줄 모르는 나의 성향도 영향을 미쳤다. 일 년을 정리하는 자리에 이르러서야 나는 내가 꽤 힘든 일을 홀로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말았다.
한 번 터진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흘러내릴 때가 있다. 그만 울고 싶은 데도 제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올 때, 비로소 깨닫는다. 짐작보다 훨씬 응어리가 컸다는 걸. 감정이 북받쳐 오르면 안 해도 될 말까지 흘러나오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말과 눈물을 잔뜩 쏟아낸 뒤에야 나는 나의 일 년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나는 왜 이제와 이런 감정들을 뱉게 되었는지.
나는 오만했다. 한동안 스스로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글을 꾸준히 쓰면서 낮았던 자존감이 올라가고, 타인을 품을 수 있는 그릇도 넓어졌다고 자부했다. 글 속에서만 자존감이 올라가고 글 속에서만 넉넉한 줄 모르고, 나는 성급하게 굴었다. 여전히 예민하고 아직도 눈치를 많이 보며, 자주 불안감에 시달리는 스스로가 이번 일로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채고 조치를 취하거나 도움의 손길을 구해야 했는데, 미련하게 나는 타인만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 여전히.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게 거짓처럼 여겨졌다. 글 속의 내가 행복한 척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글을 꾸준히 쓰면 스스로가 변하고 삶도 나아질 거라 말하고 있는 나의 글들도 전부 가짜인 것만 같았다. 부끄러웠다. 숨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지만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나는 내 자리에서, 내가 마주한 사회에서 어떻게든 다시 길을 찾아야만 했다.
다행이라면 괴로움 속에서 헤매다 숨어있는 희미한 희망 하나를 마주하게 된 것. 나는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예전보다 더 빨리 일어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부족함을 덜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욕심이라는 걸 알아채면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아스라한 불빛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글을 쓰면 글만 쓰고 싶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 사회는 외면하고 글 속에서만 정의로운 척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게 그럴싸해 보이는, 아주 쉬운 길이니까.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글이 나의 온 세상이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글자 속에서만 헤엄치다, 사람들과 살을 맞대고 눈길을 마주치며 상처와 위안을 주고받는 진짜 세상 속에서의 내가 어떤 모습인지를 잊고 살지도 모른다.
위태로운 나의 창을 바라본다. 바깥세상이 없다면 창문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바깥세상이 있기에 창이 존재하고, 창이 있기에 나는 세상에 나가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창문 안에서만 바라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직접 공기를 피부로 느껴야 비로소 세상의 진짜 온도를 알 수 있다. 내가 견딜 수 있는 온도가 어느 정도인지, 나는 어디까지 발을 디딜 수 있는 사람인지도 어림할 수 있다.
그러니 다시 용기를 내보려 한다. 아직 부족하지만, 여전히 나는 지독히 나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나는 시나브로 변하고 있으니.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 겁 없이 문을 열어젖힐 날이 올 거라 믿으며, 다시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나에게 더 예민한 내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나를 먼저 보듬어야 타인도 품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하며, 움츠러드는 어깨를 편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