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사랑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걷기가 일상이 된 시절을 떠올리면 고등학생 때가 생각난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이삼십분 정도였다. 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내리고 또 걷는 시간을 감안하면, 아예 걸어서 등하교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돈을 아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자식이 아무리 늦잠을 잤다 해도 절대 태워다 주는 분이 아니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내 두 발로 학교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집이 가까웠던 친구 하나와 매일 아침 함께 걸었다. 특별히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비밀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거의 2년쯤 아침마다 함께 걸었으니 제법 친해질 만도 한데, 우리는 그저 등교를 함께 하는 것에 그쳤다. 그 외에는 따로 연락을 주고 받거나 애써 어울리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주로 나눴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걷는 내내 수다를 떨었는지, 아니면 조용히 걷기만 했는지, 간혹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가물 거린다.
내게 유일하게 남은 느낌 하나는 그 친구가 꽤 편했다는 것. 너무 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예 친분이 없는 것도 아닌 그 적당한 거리가 편안함을 주었던 걸까. 그러고 보면 다른 친구들과는 늘 팔짱을 끼고 다녔는데 그 친구와는 그런 시도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독특한 관계였다. 고등학생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그저 함께 걷기만 하는 사이.
매일 날씨가 쾌청했던 건 분명 아니었을 텐데,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눈도 내렸을 텐데. 이상하게 내 기억 속의 풍경에는 늘 맑은 날만 있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나와 그 친구만이 존재한다. 그 시절 걷기가 좋다고 자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걸어야 하기에 걸었을 뿐이다. 그 길 중간에는 고등학생에게는 참새방앗간 같은 번화가도 있었고,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담아내는 탄천도 있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풍경과 꽁꽁 얼어붙은 탄천을 살금살금 건너던 일은 여전히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낯선 도시에 떨어질 때마다 가장 먼저 간절히 하고 싶은 건 정처없이 걷기다. 캄보디아 프놈펜에 도착한 건 자정 무렵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고단함에 바로 잠을 청했다. 여행지에서는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아도 아침이면 가뿐하게 몸을 일으키게 된다. 커튼을 열어젖히자 때마침 아침 햇살을 받으며 출근하는(?) 코끼리가 보였다.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이국적인 풍경에 빨리 뛰쳐 나가고만 싶었다.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무작정 미지의 세계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낯선 거리로 발을 내딛는 그 찰나는 여행에서 가장 가슴 떨리는 순간이다.
걷기는 걷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꼭 어디에 도착하지 않아도, 골목골목을 쏘다니고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생경한 풍경들을 보고 듣고 맡는 것만으로도 충만하다. 여행지에서의 걷기는 이방인과 정주인, 여행과 일상 사이를 오가는 행위다. 낯선 도시를 걸으며 나는 이방인처럼 여행을 하고, 동시에 그곳 정주인들의 일상을 지근거리에서 엿보며 내 안으로 흡수한다. 여행은 내게 걷기와 동의어다. 소매치기를 피하려 걷기도 했지만, 더 많은 걸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 걷기도 했다.
일상에서도 많이 걸으려 한다. 온가족이 쉬는 일요일이 되면 '오늘은 또 어디를 걸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올 가을에는 아이들과 한라산 영실코스를 걸었다. 십일 년차 제주살이를 하며 한라산을 내 두 발로 오르기는 처음이었다. 초창기 일 년은 자리를 잡는다고 마음의 여유를 내지 못했고, 오르려 할 때쯤 첫째가 뱃속에 찾아왔다. 다음을 기약한 것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이야.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르는 게 영 엄두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말았다. 아이를 키우며 부쩍 약해진 내 무릎도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큰 용기를 냈다. 찬란한 가을이 나를 자꾸 간지럽혔다.
어느덧 제법 자란 아이들은 때로 씩씩하게 때로 볼멘소리를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올랐다. 테이핑을 한 내 무릎도 생각보다 잘 버텨주었다. 윗세오름까지 가는 영실코스는 예상보다 걸을 만했다. 올라가며 펼쳐지는 광활한 풍경에 매료돼 아이들과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가족들과 함께 걸을 때가 참 좋다. 걸을 땐 걷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스마트폰도 내려놓고 잡념도 내려놓고 그저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같이 바라보며 이야기 나눌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게, 홀로 여행하던 때와는 또 다른 만족감을 준다.
어제도 가족들과 함께 걸었다. 어디를 걸을까 남편과 고민을 하다 집앞 올레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걷다가 지치면 버스나 택시를 타고 돌아오자며. 낮기온은 10-12도 정도, 바람은 3-4m/s. 이 정도면 최고의 겨울 날씨. 겨울철새들이 가득한 잔잔한 바다 위, 윤슬이 유난히 보석처럼 반짝였다. 길에 널어놓은 준치를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휴게소에 들러, 준치구이를 오물오물 씹기도 했다. 점점 선명해지는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길에서 엄마 아빠가 처음 만났어. 이게 수문이라는 거야. 뒤돌아 봐봐, 우리가 이만큼이나 걸었어. 옛날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걸었대. 걷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성산일출봉에 도착하자 첫째가 말한다. 말도 안돼, 여기까지 우리가 걷다니. 평소 차로 오던 곳을 두 발로 걸어서 도착하니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엄마 우리 몇 보나 걸었어?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1만 보가 넘었다. 숫자를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어 보이는 아이. 많이 걷고 나면 뿌듯해. 그치? 내 말에 아이는 다리가 좀 아프다면서도 뿌듯함이 무엇인지 아는듯 고개를 끄덕인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홀로 걷는 것도 좋고 함께 걷는 것도 좋다. 홀로 걷는 건 깊이 사유할 수 있어서, 함께 걷는 건 그 순간을 공유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올레길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좋았던 점 하나는 잘 걷는 사람이라는 것. 언제든 같이 걸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긴 여행 뒤라서 더 중요하게 생각됐을까. 남편은 가파른 곳을 가면 조금 툴툴 대지만 여전히 잘 걷는 편이다. 나보다 훨씬. 첫째는 감사하게도 어릴 적부터 오래 걸어도 안아달라 떼를 부린 적이 없다. 둘째는 종종 징징대지만 못 이기는 척 따라오는 편이다. 걷는 걸 사랑하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을 텐데. 남편과 나를 닮았다면 아이들도 언젠가는 이해하겠지. 왜 틈만 나면 엄마 아빠가 함께 걷자고 했는지.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어크로스 출판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라는 문구에 시선이 머문다. 걷기는 여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가만 들여다 보니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걷는 것처럼 살면 적어도 지치지는 않겠구나. 너무 애쓰지 않는 삶, 자연스레 유유히 흘러가는 삶. 뛰는 것도 멈추는 것도 아닌 그저 같은 속도로 계속 걷는 삶. 뚜벅뚜벅이라는 표현을 좋아해 자주 사용한다. 뚜벅뚜벅 걷는 사람의 평균 보행 속도는 4.8km/h. 삶에도 속도가 있다면 걷는 속도와 비슷하지 않을까. 인간은 몸을 떠나 살아갈 수는 없으니. 내 몸에 맞는 속도로 걸어가야 과부하에 걸리지 않는 게 아닐까.
걷는 건 느려 보이지만, 우리는 바로 그 속도로 아프리카를 떠나 전세계로 뻗어나간 호모 사피엔스. 걷기보다 최소 수십 배에서 최대 수백 배 빠른 교통수단에 몸을 싣고 살아가지만, 삶의 여유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 과거의 보행은 필수였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보행은 선택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어쩌면 시간이 아니라 걷기가 아닐까.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건 단지 걷는 시간인지도. 우리가 일깨워야 하는 건 두 발로 중력을 인식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감각인지도.
한 주를 열며 다만 바란다. '오감을 열고 더 많이 걷는 날들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