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페 문을 또 닫았다. 지난주는 폭설로 이틀을 쉬어갔고, 크리스마스 날은 오픈하려 했지만 전날 종일 내린 비로 집에만 있었던 아이들을 못본 척 할 수가 없어 결국 또 문을 닫았다. 폭설로 자연 눈썰매장이 된 중산간으로 향했고, 2년만에 아이들과 신나게 눈썰매를 탔다. 아이들에게 제주에서만 이렇게 공짜 눈썰매장이 있다고, 육지에서는 모두 돈을 내고 눈썰매장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엄마는 육지 눈썰매장 가본 적 있어? 아이들의 질문에 떠오르는 한 장면. 초등학생 때였나. 웬일인지 부모님과 함께 자연농원 눈썰매장으로 향했고, 길게 늘어선 차들과 어마어마한 인파에 부모님은 그냥 집으로 차를 돌렸다. 그래도 가고 싶었는데, 처음인데, 수많은 말들은 무시됐고 그 뒤로 우리 가족은 다시는 눈썰매장을 가지 않았다. 내 기억을 들려주니 아이들은 나를 위로한다. 엄마 속상했겠다. 글쎄...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 그 뒤로 눈썰매는 아니지만 스키나 보드를 타러 자주 갔었어. 이제는 하얀 슬로프를 지치며 내려오기보다 바라보는 게 더 즐거운 중년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날 눈썰매를 너무 신나게 탄 건지. 둘째가 어젯밤부터 갑자기 열이 올랐다. 독감이다 코로나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지레 겁을 먹었다. 카페 문을 닫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다행히 독감은 아니란다. 아이는 낮동안 다시 열이 오르지 않았다. 다행이었던 날이구나 그러고 보니. 이제야 깨닫는 오늘의 감사한 지점.
2.
연합뉴스 어플을 깔면 속보가 날아온다. 오랜 습관처럼 속보를 받아본다. 기사를 쓸 것도 아니고 취재를 나갈 것도 아니고 보고를 할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다. 연합뉴스 속보가 얼마나 빠른지 현장에서 체험을 했던지라 놓지 못하고 있는 습관 같은 것. 아이와 병원을 다녀온 뒤 집에 들어와 한숨 돌리고 있는데 속보가 떴다. 40대 사망자가 이선균인지 확인 중이라는. 덜컥 가슴이 내려 앉았다. 며칠 전 19시간의 조사를 받고 나왔다는 그의 얼굴 사진을 스치듯 봤던 기억이 났다. 19시간, 그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처음에는 좀 관심있게 지켜봤지만, 금세 나는 그의 기사에서 관심을 거뒀다. 언론들이 앞다퉈 선을 넘고 있었고 밝혀진 사실은 없고 추측만이 난무했으니까. 그 더러운 플레이들에 내 조회수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이따금 그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나는 경찰이 흉악범이라며 피의자 얼굴을 공개할 때마다 그 가족을 떠올린다. 주변 사람들을 생각한다. 누군가는 잡혀갔지만 누군가는 일상을 살아야 한다. 누군가는 죄가 있을지언정 누군가는 죄가 없다. 우리는 너무 쉽게 궁금해 하고 너무 쉽게 입에 올리며 너무 쉽게 판단한다.
경찰이 결국 신원을 파악했다. 그렇게 갔구나. 누군가는 추모를 하고 누군가는 언론과 수사당국을 꼬집고 누군가는 사람이 죽었다고 갑자기 태도가 바뀐다며 여전히 날을 세운다. 누구를 위해 칼춤을 추는지, 무엇을 위해 칼날을 벼리는지 돌아보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황망함이라는 단어를 글에 써본다. 쓰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는 걸, 적고 난 뒤에야 깨닫는다. 주저했던 글들이 떠오른다. 글로도 싸우지 못한 나의 현주소를 곱씹는다.
3.
아이의 학교는 외부에서 '좋은 학교'라 불리는 곳이다. 막상 들어가서 관찰한 그곳에는 몇몇 사람들의 희생이 깔려 있었다. 몇 년째 묵묵히 보상도 없이 그저 아이들만을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지나칠 수가 없어 발을 디디다 보니 제법 깊숙이 발을 담그게 됐다.
경이로울 정도로 오랜 시간 희생을 자처한 사람이 내년도 학부모 회장으로 추대됐다. 모두들 축하한다고 말하는데, 당신이 아니면 누가 하느냐고 다들 입을 모으는데, 나는 왈칵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나는 차마 그에게 또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도망을 가고 싶다면 가라며 문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피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받아들었다.
짐작되지 않는 깊은 마음이 감사해, 길어도 길어도 마를 줄 모르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믿기지 않아, 자꾸 눈물이 흘렀다. 내가 할 일은 돕는 게 아니라, 내 몫을 하는 것. 거드는 게 아니라 알아서 하는 것. 그 깊은 사랑을 배우고 함께 실천하는 것. 나보다 더 오뚝이 같은 사람을 만나 참 많은 것을 배운다.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나도 몸을 일으킨다.
4.
올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활동이 오늘로 끝이 났다. 매주 한 번 아침마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울고 웃던 시간들. 작은 쓰기 활동도 함께 했는데 일년치 활동지를 모아 작은 책으로 엮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몇 개월 전 자신이 썼던 글과 글씨를 보면서 새로워 하는 아이들. 쓰는 건 곧 생각이라는 걸, 읽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야 함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내 뜻은 얼만큼 전달 됐을까.
함께 책을 읽어준 사람들끼리 마니또를 정해 책을 교환했다. 선물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들떴다. 선물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늘 더 좋다고 생각해왔기에. 그런데 내가 받은 책을 보면서 마음이 찡해진다. 내가 받은 선물은 에곤 실레의 <자화상>. 에곤 실레가 적은 단상들과 편지글을 모은 책이다. 책과 함께 들어있는 작은 쪽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예술은 한다는 것. 예술을 하는 삶을 살다 삶이 예술이 된 사람의 책을 선물 드립니다. 멋진 미래를 응원합니다."
예술이라. 삶이 예술인 삶은 어떤 삶일까. 책도 메시지도 간결하지만 명확하고 무심하지만 사려깊다. 넘겨본 앞장에는 에곤 실레의 탄생일과 사망일이 적혀 있다. 공교롭게도 사망일이 내 생일이다. 물론 백 년도 더 전에 죽은 화가지만, 같은 날짜에 괜히 눈길이 머문다. 그리고 이어서 떠오르는 이태원. 내 생일은 이제 언제나 이태원과 함께다. 괴로움은 원망이 되고 원망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결의가 된다. 절대 잊지 않아야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글자들이 가슴에 들어와 박힌다. 어머니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에곤 실레의 삶도, 누구보다 민감하고 나약하지만 강인하고 곧았던 그의 모습도. 이 책을 내게 선물한 이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었던 걸까. 책을 선물한다는 것, 사려 깊게 그 사람을 위한 책을 선물한다는 것, 생각보다 훨씬 더 근사한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이제야.
5.
글 유목민이 된 것 같다. 원고 마감을 한 뒤의 나는 계속 표류 중이다. 글도 끝을 내지 못하고 시작도 잘 하지 못한다. 게시하는 것조차 망설인다. 잠시 기존의 습관들을 제거하고 살았다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게 어색하다. 기존의 것들 중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까. 고민이 깊어간다.
앞으로 나는 어떤 동력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할까. 그저 쓰는 것에서 머물고 싶지 않아 나는 내게 묻는다. 무엇이 쓰고 싶냐고, 어떻게 쓰고 어디에 나눌 것이냐고. 나는 아직 답을 모른다. 원고를 마감하고 나서야 '글에 대한 글'이 내가 쓰는 첫 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수긍했다. 그냥 쓰다 보면 그 글들이 나의 좌표가 될까.
표류 중이라는 사실이 속상하면서도, 가능성을 지닌 상태라는 사실이 싫지만은 않다. 너무 애쓰지 않되 너무 거리를 두지도 않는, 적정한 거리를 가늠한다. 가다 보면 또 가시화 되는 무언가가 있겠지. 발자국은 깊지 않아 파도에 쓸리더라도, 내가 꾸준히 걸어간 거리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니.
"예술가들은 내면이 넘치도록 차 있어서 자신들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자화상, 에곤 실레 p31>
처음 글을 쓸 때는 내 안에 차오르는 말들을 주체할 수 없어 덜어내는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 상태인가. 내일은 종일 이걸 곱씹어 봐야지. 숙제 하나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