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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Feb 21. 2024

아이가 도시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육아삼쩜영] 기사입니다.

https://omn.kr/27hrc


첫째는 누구보다 자연을 사랑하는 아이다. 동물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말을 제대로 하기 전부터 동물 책만 가져와 읽어달라고 조르더니, 말을 하기 시작하고 행동반경이 넓어지면서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동물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제주도 시골마을에 살다 보니 어디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숨어 있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바쁘게 움직이는 수많은 곤충들을 만날 수 있다. 개미, 노린재, 공벌레, 메뚜기, 거미 등.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 아이는 풀숲을 헤치며 곤충들을 찾는다. 새끼손톱만큼 작은 사마귀나 메뚜기를 만나면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녀석들의 몸집이 점점 불어나면 아이는 신이 나서 여기저기 곤충들을 잡으러 다닌다. 잡는다기보다 거의 줍는 수준이라고 할까. 잡고 풀어주기를 반복하다 보면 곤충들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여름을 지나 자연스레 가을에 도달한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커지고 날이 추워지면 벌레들도 점점 사라지는데, 아이는 이를 무척이나 아쉬워한다. 무당벌레가 겨울을 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다 종종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오히려 반가워한다. 함께 살자며 벌레를 굳이 잡지 않고 놔둔다. 벌레 친화적인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아이는 벌레의 한 해 살이를 통해 자신의 일 년도 배워가는 듯하다. 


그렇게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자연을 사랑하던 영락없는 시골 아이가 요즘 들어 조금씩 변하고 있다. 도시의 맛을 점점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설 연휴 동안 육지에 있는 양가를 방문하는 김에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빌딩 숲 속을 거닐고 커다란 쇼핑몰과 박물관도 들르고, 한강과 청계천도 걸었다. 지하철도 타고 버스도 타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짧은 시간 동안 나름 알찬 연휴를 보냈다.


             

▲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아이들이 서울 도시모형을 관람하고 있다. ⓒ 박순우

 


서울을 쏘다니던 중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 우리도 서울에서 살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순간 복잡한 심경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이 좋아?" "응. 할 것도 많고 좋은 것도 많은 것 같아." 아이들의 눈에 서울은 어떻게 보일까. 무엇이든 풍족하게 넘치는 화려한 도시로 보이지 않을까. 자연을 그리 좋아하던 아이의 눈에도 물질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게 씁쓸하게 다가왔다.


점점 더 반짝이고 규모가 커지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마음이 심란해진다. 이런 곳에 어떻게든 발을 붙이며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자본주의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도시에 나까지 굳이 발을 붙이고 싶지 않다는 양가적 감정이 든다. 


서울은 모든 게 빠르고 편리하다. 돈만 있으면 살기에 정말 좋은 곳이 내게는 서울이다. 반면에 내가 사는 시골은 느리고 불편하다. 배달되는 음식은 거의 없고,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의 범위도 좁다. 돈의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줄어든 곳이 내게는 시골이다. 그게 내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고.


아이의 말에 괜히 심통이 난 나는 쪼잔하게 서울의 좋지 않은 점을 줄줄이 나열했다. "엄마는 서울이 별로야. 사람도 차도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공기도 안 좋고, 집값도 너무 비싸고, 경쟁도 너무 심해." 아이가 내게 물었다.


"경쟁이 심한 게 왜 나빠?"

"적당한 경쟁은 발전에 도움을 주지만, 심한 경쟁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니까."


나는 아이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엄마는 사실 서울에 살 정도로 돈이 많지 않아. 서울의 집값과 제주의 집값은 많이 다르거든."


아이는 평소 내 말을 무척 신뢰하는 편이다. 내 말을 잠자코 듣더니 한참 뒤에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냥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건데, 심하게 경쟁하면서 살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아이가 긴 생각 끝에 꺼낸 한마디 말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아이는 도시와 시골의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아이는 내가 꺼낸 말들의 의미를 어떻게 소화한 걸까.


아이에게 엄마라는 이유로 너무 일방적인 의견을 들려준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급히 말을 더했다.

"지금은 아직 네가 어려서 엄마아빠랑 같이 살지만, 네가 어른이 되면 어디에서든 살아봐. 도시에서도 살아보고 다른 지역에서도 살아봐. 다른 나라에서도 한 번 살아보고. 어느 곳이든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 여기저기 살아봐야 너한테 맞는 곳이 어딘지도 알게 될 거야. 넌 어디에서든지 살 수 있어."


'어디에서든지 살 수 있다'는 말을 뱉으며 가슴이 뜨끔했다. 우리는 정말 어디에서든지 살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지만, 내 입은 굳게 닫힌 채 다시 열리지 않았다. 아이도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고. 

             

▲  한강공원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 아이의 눈에 서울은 어떻게 보일까. ⓒ 박순우

 


아이에게 세상의 문법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편이다. 누군가는 아이의 상상력이나 창의력이 줄어든다며 환상을 심어줘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허황된 이야기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서울과 지역의 차이를 직접 피부로 느끼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자니 마음이 복잡하다. 


아이는 언젠가 내 품을 떠나 자신만의 땅을 찾아갈 것이다. 그 선택이 혹여 나와는 다른 선택이더라도, 세상 풍파에 휩쓸리는 선택이더라도, 괜한 말을 보태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아이는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야 하는 주체자이니, 그게 서울이든 지방이든 도시든 시골이든 한국이든 외국이든 아이가 원하는 곳에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지지할 생각이다. 내가 제주를 삶의 터전으로 선택했듯 아이에게도 자신만의 땅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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