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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순우 Sep 22. 2023

책임감과 무기력감 그 사이 어딘가

1.

닷새 전 어마무시한 번개가 연달아 치며 폭우가 내렸다. 자려고 누운 아이들은 연신 번쩍거리는 하늘을 올려다 보다 결국 몸을 일으키더니, 번개맨처럼 팔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번개야 쳐라!" 말이 끝날 때마다 하늘이 번쩍거리니, 자신의 주문이 통하기라도 했다는 듯 싱글거렸다. 그때만 해도 바람은 남동쪽에서 불어왔다. 비는 집의 남동쪽 벽을 세차게 때렸다. 주택에 산다는 건 비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삶을 산다는 말이다. 비를 맞지 않아도 젖어드는 것 같고, 바람을 쐬지 않아도 흔들리는 것만 같다.


이틀 뒤 다시 비가 쏟아졌다. 닷새 전보다는 약한 비였고 번개는 치지 않았다.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바람이었다. 세기가 거세지고 방향이 바뀌었다. 불과 이틀만인데 북서풍이 불어왔다. 북서풍이 분다는 건 바람의 온도가 달라졌다는 말. 계절의 변화를 몰고 오는 바람이구나. 추워지겠다. 섬에 산다는 건 계절의 변화를 바람으로 가늠하는 삶을 산다는 말이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날짜를 셀 수 있을 것만 같고, 눈을 뜨지 않아도 하늘의 결과 바다의 빛깔을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침 공기가 다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전날과 불과 2, 3도 차이지만, 피부는 금세 온도의 변화를 알아차린다. 가벼운 외투가 필요하겠구나. 아이들에게 권하니, 아직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다. 씩씩하게 어제와 같은 옷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여느 아침과 같이 아이들과 손을 흔들며 잠깐 안녕을 한다. 우리는 매일 아침 헤어지고 매일 오후 다시 만난다. 아이들을 보내는 건 늘 가슴 한 켠이 허전해지는 일. 매일 아침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과 같은 일.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낯선 이 기분. 멀어져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읊조린다. 무탈하자.


2.

전화가 울리면 흠칫 놀란다. 아이를 기관에 보내면서 생긴 버릇이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전화보다는 메시지가 익숙해지면서, 전화는 울리는 것만으로도 위급의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모두가 잠든 짙은 밤이나 소수만 깨어있는 이른 아침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만 화들짝 놀랐다면, 이제는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에 울리는 전화벨에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학교에서 걸려온 전화라면 통화버튼을 누르는 손길마저 가늘게 떨린다. 삼 년 전 받은 한 통의 전화 때문이다.


병설유치원으로 달려가니 아이는 잔뜩 겁을 먹은 채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입을 벌려 보니 앞니 하나가 완전히 뒤로 꺾여 있었다. 장난감을 입에 물고 있다가 앞으로 넘어졌어요. 선생님은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색이 되어 있는 아이를 별 말 없이 꼭 안아주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아이는 내 품에 안겨 살짝 훌쩍였다. 그 뒤부터 학교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겁부터 난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옛말이 가슴에 들어와 문신처럼 박혔다.


자식을 키운다는 건 매일 아이를 홀로 물가에 내놓는 것과 같구나. 아이의 사회 생활이 시작되자 든 생각이었다. 아이는 내 손 안에서보다 제 발로 걸어간 땅 위에서 더 많이 자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뿐. 아이는 나로 인해 태어났지만, 자신의 의지로 걸어간다. 그 사실이 때로 감사하고, 때로 아득하다.


며칠 전에도 학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돌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작정한 듯 그동안 아이가 저지른 잘못들을 줄줄이 열거했다. 다행히 지난 번처럼 아이가 다친 것은 아니나, 선생님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아이는 친구들의 가슴에 상처를 냈다. 선생님이 언급하지 않는 순간들 속에서는 아이도 분명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아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내 품 속의 아이가 아닌 것만 같았다. 강한 아이의 기질도 있지만, 혹여 내가 잘못 가르친 게 아닐까.


엄마인데도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이에 대한 파편들 뿐. 누구의 말이라도, 여럿의 말을 합쳐 진실의 크기를 키우더라도, 결국은 부분일 뿐이다. 나는 결코 전체를 들여다볼 수 없다. 그 사실이 못내 답답하다. 나는 누굴 믿고 누굴 믿지 말아야 할까. 주섬주섬 모은 말들을 모아 나름의 전개도를 펼쳐놓는다. 내가 겪은 일도 한낱 조각일 뿐인데, 하물며 내가 겪지 않은 일이니 그 조각은 얼마나 형편 없는 것인가. 날카로운 단면에 찔리면서도 조각들을 이어붙인다. 점들은 선으로 잇고, 선들은 면으로 모양을 잡아 본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짐작일뿐.


아득해진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심해를 더듬거리는 느낌. 어떤 위험한 생물이 사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아이를 등에 업고 마냥 앞으로 헤엄을 친다. 마주 보고 더 안아줄 걸. 그래 너가 더 억울했겠다고 편이라도 들어줄 걸. 차마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아,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아, 나는 아이를 더 꼭 안아주지 못했다. 부모의 자리가 어려운 건, 아이에게 너는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다는 모순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 삶은 그리고 세상은 온통 모순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내가 간신히 깨달은 일말의 진리를, 나는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부모라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최후의 우주를 홀로 유영이라도 하듯, 나는 몸을 버둥거린다.      


아이가 가진 힘을 믿어야지, 사람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기대야지. 굳게 마음을 먹다가도 종종 털썩 주저앉는다. 자식에게서만 느낄 수 있다는 백퍼센트 책임감을 배우고자 엄마가 되었는데, 정작 낳고 보니 내 앞에 놓인 건 백퍼센트의 무기력감이다. 이런 사랑도 있구나. 열렬하지만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이런 사랑도 있구나. 아무 조건 없이 사랑을 주는 엄마를 갖는다는 건, 그 무엇과도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다던 박연준 시인의 글이 떠오른다. 그 글의 제목은 평온이었다. 아이에게 평온을 주기 위해 나는 나의 평온을 강제한다. 동동거리던 발을, 버둥거리던 손을 멈춘다.


3.

여름이 떠나간다. 가을이 다가온다. 곧 오름마다 하얗게 피어난 억새가 가을바람에 살랑이겠지. 제주의 가을은 억새와 귤이 익어가는 계절. 붉은 단풍보다 하얗게 부서지는 억새가, 노란 은행잎보다 주홍빛으로 익어가는 귤이, 가을이 되었다. 낯선 곳에서의 십 년은 한 계절의 상징을 바꿔놓았다. 단풍을 보지 않아도 이제는 마음이 허전하지 않다. 몇 해 동안은 가을마다 단풍을 찾아 헤맸다. 단풍을 보지 않으면 가을이 아니라는 듯, 단풍을 목도하지 않고는 겨울을 맞을 수 없다는 듯. 이제는 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을이 부정 당하는 건 아니라는 걸. 내가 눈을 감아도 바람은 방향을 바꾸고 스산함은 세상을 가득 채운다.


아이는 계절을 닮았다. 내 힘이 닿지 않아도 아이는 자란다. 내가 하염없이 바라보지 않아도 아이는 아이의 길을 간다. 그 명료한 사실이 갑자기 불어온 가을바람보다 더 서늘하게 가슴을 때린다. 아이는 내 손을 떠났다. 움켜쥘수록 아이는 더 빨리, 더 멀리 달아날 테지. 불안함에 움켜쥐었던 손의 힘을 슬그머니 뺀다. 아이는 아이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자. 매정하게 선을 긋는다. 아주 작은 문 하나만 열어둔 채. 언제든 아이가 뒤돌아보고 뛰어올 수 있도록. 그 문은 아이만 드나들 수 있다. 나는 오갈 수 없는 통로. 아이에게만 허용되는 문.

 

나는 그저 나의 자리에서 나의 글을 쓴다. 온몸에 잔뜩 들어간 힘이 이 글이 낸 작은 구멍으로 조금씩 빠져 나간다. 쉭쉭 노인의 숨소리 같은 거친 바람이 공기로 흩어진다. 그 공기 중으로 되뇐다. 사랑 사랑 그래도 사랑. 알았으면서도 다짐했으면서도 자주 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그 사랑이 아이의 마음에 평온을 심고, 아이는 그 힘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내가 해야 하는 모두.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 넣는다.




*글쓰기 모임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감은 '전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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