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할 수 없었던 하루를 보내고
비가 온다. 계속 온다. 매일 온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내리겠지. 요즘은 날씨를 잘 확인하지 않는다. 어차피 날씨는 계속 비일 테니까. 바람이 더해지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아침이면 식구들에게 당연하게 우산을 권한다. 장화도 신겨 보낸다. 길 여기저기가 웅덩이가 됐으니, 장난치기 좋아하는 아이들의 신발과 양말은 쉽게 젖고 만다.
기후위기는 어떤 지역은 가물게 하고, 어떤 지역은 폭우를 내리게 한다더니 한반도는 후자인가 보다. 중부지방은 눈이 많이 왔다는데, 제주는 줄곧 비만 내린다. 한라산 정상 부근에는 눈이 왔을지도. 한라산과 가장 먼 동쪽에 사는지라 늘 흐린 날씨에 한라산을 못 본 지 오래되었다. 파란 하늘을 언제 봤던가. 기억이 가물거린다.
이 정도면 장마라 칭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여름날 장마보다 더 징하게 오래 내리는 것 같다. 여름 장마는 중간중간 해를 만날 수도 있는데 요즘은 통 볼 수가 없다. 곧 3월 말이면 고사리 장마도 있을 텐데... 가만, 이번엔 다르려나. 작년까지만 해도 고사리 장마가 있었는데 분명. 날씨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올해는 태풍철이 되기 전에 지붕 공사도 해야 하는데... 하늘만 쳐다보다 겨울이 멀어지고 있다.
어제는 둘째의 어린이집 졸업식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노란색 봄꽃을 넣은 꽃다발을 예약해 두었다. 선생님께도 선물하고 싶어 핑크톤의 꽃다발도 함께 주문했다. 어린이집으로 향하기 전에 꽃집부터 들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굳게 닫혀 있는 문,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 없는 공간.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어제 주문했던 채팅방을 열었다. 아무리 톡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도 답이 없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바닷가 앞이라 비바람은 우산을 들고 서있을 수 없을 정도로 세차고, 손끝과 발끝은 점점 얼어붙어 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혹시나 싶어 인근 카페에 들러 혹시 다른 연락처를 아는지 물었지만 모른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숙소도 운영한다는 말에 숙소 번호로도 연락을 해봤지만 역시 꺼져 있다. 발만 동동 거리다 졸업식에 늦을 것 같아 빈손으로 급하게 출발을 했다. 화가 났다. 무언가를 미리 주문하고 연락 두절 상태에 놓이기는 처음이었다. 특별한 날인데, 아이와 약속을 했는데, 돈도 벌써 모두 입금을 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고객과의 연락을 어겼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시골 마을이라 꽃집이 흔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유명인이 꽃을 사갔다며 대대적으로 홍보도 한 집이었는데. 배신감과 난감함이 뒤섞여 어지러웠다. 악플을 달아볼까, 소문이라도 낼까. 나쁜 마음이 자꾸 솟구쳐 올랐다. 그렇게 혼돈스러운 상태로 급하게 차를 몰아 어린이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제야 연락이 왔다.
“정말 너무 죄송해요. 어제 쓰러지는 바람에.” “그럼 문자라도 주셨어야죠.” “장소가 어딘가요?” “OO 어린이집이에요.” “그쪽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30~40분 뒤에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쓰러졌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쓰러졌다 쓰러졌다 쓰러졌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전화를 했지? 쓰러진 게 정말 맞을까. 핑계를 대는 건 아닐까.
나는 간신히 졸업식을 시작하기 직전에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아이는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고서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이와 손 잡고 단상으로 나가는 순서가 있었는데, 그 순서가 오기 직전에 꽃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급하게 나가서 꽃을 받아오느라 꽃가게 주인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다행히 순서에 늦지 않아 아이와 손을 잡고 예정된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꽃다발 포장은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급하게 뛰어왔을 테지.
둘째는 첫째와 달리 앞에 나서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어린이집에 처음 들어갔을 때 멋모르고 책을 가장 많이 읽었다며 독서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아이가 내게 말했다. ”엄마 다시는 어린이집에 독서통장 보내지 마. “ 그랬던 아이가 졸업식 당사자가 되어 단상 앞에 서고, 상장을 받고 노래를 불렀다. 빨리 자리로 들어가고 싶어 몸을 배배 꼬고 인사를 대충 하고 노래도 들릴 듯 말 듯 부르긴 했지만.
그만큼이라도 제 역할을 수행한 게 대견했다. 그새 조금 더 자랐구나 싶었다. 늘 아기 같기만 했는데. 뭐가 그리 급했는지 9개월 만에 뱃속에서 나와 차마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던 작고 작은 아이였는데. 한 번씩 눈물이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요즘은 한 번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곤 한다. 벌써 갱년기는 아닐 텐데 참 주책맞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중간중간 쓰러졌다던 꽃가게 주인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메아리쳤고.
사진을 찍고 인사를 하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졸업장, 상장, 선물, 꽃다발, 거기에 우산까지.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바람은 세차기만 했다. 아이를 데리고 간신히 짐을 날라 차에 실었다. 그렇게 둘째의 우당탕탕 졸업식도 끝이 났다. 기후위기를 관통하는 저출생 시대의 귀한 아이들의 졸업식이.
꽃가게로부터 연락이 왔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기본 사이즈 꽃다발을 서비스로 해주겠다고 한다. 확인은 했지만 답을 보내지는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욕을 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순순히 알겠다 답하기도 싫었다. 무응답은 때로 더 많은 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내 자리로 돌아와 곰곰 생각에 잠긴다. 꽃이란 무엇인가. 축하하기 위해,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주고받는 선물이다. 꽃을 주문한다는 건 특별한 날이라는 말과 같다. 그런 날 고객과의 약속을 펑크 낸다면 그 고객은 여느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화가 날 것이다. 꽃은 밥이 아니니, 꽃은 생필품이 아니니, 너무나 특별한 것이니.
특별한 걸 판매한다는 게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 일인지를 그제야 깨닫는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며 타인의 특별한 날을 책임진다는 건 얼마나 무겁디 무거운 일인가. 지인 중에 풍선아트를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삶도 비슷하리라. 만일의 사태에 대한 대비책을 반드시 세워야 하는 업이 이 세상에는 있다는 걸 배운다.
나는 여전히 모른다. 꽃가게 주인이 쓰러진 게 사실인지 아닌지. 정말 쓰러졌다면 어떻게 그 아침에 갑자기 꽃을 포장해 배달할 수 있었을까. 혹 핑계는 아닐까. 괜한 심통에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정말 쓰러졌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영원히 진실을 알 수는 없겠지. 진실은 늘 저 멀리에 있다. 잡히지 않는 진실은 내려두고, 생각할수록 어지럽기만 한 어제의 일은 접어두고, 대신 타인의 삶 한 조각을 더 깊이 알게 됐음에 감사해야지. 화를 이어가는 것보다 그게 더 나를 위한 일이라 믿는다. 그렇게 나는 다시 평정심을 찾는다.
그나저나 나는 과연 꽃 서비스를 이용하게 될까. 알 수 없는 날씨만큼이나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 그리고 진실이구나 싶어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이 난다. 에잇 부럼이나 사다 까먹어야지. 알 수 있는 건 오로지 정확한 시간뿐이니, 째깍째깍 잘도 흘러가는 날짜뿐이니. 지구는 뜨거워도 차가워도 늘 돈다. 태양에 잡아먹히기 전까지는 계속 돌겠지. 그전까지는 늘 한결같다는 게 묘한 위로가 되는 순간이다. 결론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