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우 Sep 20. 2024

나를 위한 글을 쓰지 않고

우연히 접한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본다. 나는 지금 왜 눈물을 흘리는가. 눈물의 이유는 단지 공감인가, 아니면 내 안에 숨은 어떤 문제 때문인가. 청소년반 아이들의 이번주 글감은 ‘취미’다. 마감 시간에 맞춰 글을 내느라 고군분투했을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글을 읽어내려 간다. 행복과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단어가 눈을 사로잡는다. 아이들의 글을 분석하기 전에 나는 나를 돌아본다. 취미였다가 일이 된 글,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있는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단 하나, 죽을 것 같아서였다. 쓰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던 시간이 내게 있었고, 그 절실함이 나를 책상 앞에 앉게 했다. 그렇게 쓰다 책도 한 권 내고 글방도 열었으니 늦게 시작한 것치고는 꽤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성과를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으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을 살핀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나. 세상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곰곰 몰두해 보니 내가 없다. 나를 위한 글이 없다. 한동안 나를 위한 글을 쓰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어쩌면 갑자기 쏟은 눈물의 원인은 나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어디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나는 괜찮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에세이를 쓸 때는 수시로 나를 돌아봤다. 그래야 쓸 수 있는 게 에세이였으니까. 나를 알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가늠해야 글로 옮길 수 있었으니까. 지금의 나는 무엇을 위해 쓰고 있는 걸까. 책 한 권을 냈다고 작가라도 된 양 세상에 그럴싸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원하던 글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는데 거기에 내가 없다. 거기에 나를 위한 글이 없다. 취미로 시작한 글이 나를 살리고 생업이 되었는데, 그곳에 내가 없다니. 기쁨이 없다니.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은 무엇인가. 나는 왜 쓰는가.     


한동안 학교 일이 너무 많아 글을 잘 쓰지 못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나를 위한 글을 쓰지 않으니 혈관이 콱 막혀 버린 것만 같다. 글 좀 썼다고 모든 걸 깨달은 듯 으스대고 있었던 건 아닐까. 회복력이 좋아져 더는 나를 위한 글을 쓸 필요가 없다 자만했던 건 아닐까. 아무리 쓰러져도 벌떡 일어날 수 있다고 나를 과신한 건 아닐까.     


최근 여러 일을 겪으면서 나는 줄곧 남 탓을 했다. 그 사람이 못나서, 그 사람이 꼬여서, 그 사람 속이 좁아서...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수시로 되뇌며 상처 받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걷어지지 않는 섭섭함과 실망감들이 나를 휘감았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 같지 않은 타인을 탓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개운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쏟아진 눈물의 근원을 찾다 보니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아이가 보인다. 다 치유된 줄 알았지만 여전히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고, 두려워 하는 작은 아이. 제대로 위로를 받아 본 적도, 감정 표현을 해본 적도 없어, 오랜 시간 눈치만 보고 나를 드러내지 못한 아이.    

글로 나를 많이 안아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안아줘야 하는 아이가 내 안에 웅크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미련하게도. 이제야. 겨우. 매일 에세이를 쓰며 온통 나를 향해 있던 시선은 어디로 간 걸까. 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아등바등하느라 정작 나를 놓친 걸까. 매일 안아줘도 또 안아줘야만 하는 어린 아이처럼, 나도 나를 안고 또 안아줘야만 하는구나.      


고등학교 시절 방송제를 준비하던 때를 종종 떠올린다. 나는 그때도 책임감이 남다른 아이였고, 내가 맡은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가 담당하던 프로그램까지 모조리 알고 간섭하려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한 친구 내게 직언했다. “왜 너가 다 하려고 그래?”      


차장이라서, 책임감이 남달라서, 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사실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책임감을, 타인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 내 눈으로 모든 걸 지켜보고 관장해야만 안심하는 사람. 그 뼈아픈 말은 오래도록 나를 쫒아 다녔다. 무슨 일을 도모하려 할 때마다, 그룹이 함께 일을 해야 할 때마다 그 말을 아프게 되새겼다.      


나는 혼자 일하는 게 편한 사람이다. 함께 하는 것보다 혼자 생각하고 기획하고 만들고 나누는 게 속 편한 사람. 나의 기질 때문인지, 자라온 환경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글쓰기가 세상 가장 사랑하는 일이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결국 관계 속의 사람이니 모든 걸 혼자서만 할 수는 없다. 글에서만 정의로운 게 아니라, 내 삶도 글을 따라가길 바라니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 나눠야 하고 도움을 청해야 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   

  

웅크리고 있는 내 안의 어린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여전히 사람을 두려워하는 나를 발견한다. 손 내밀기 어려워하고, 부탁을 하느니 차라리 혼자 힘으로 하고 마는, 지나친 책임감에 짓눌려 결국 힘든 나를 외면하는 어리석은 나.      


감당해야 하는 일들, 쓰고 싶은 글, 써야 하는 글, 엄마의 자리 그리고 아내의 자리까지. 방학 뒤로 폭풍처럼 내게 몰려든 모든 것들을 가만가만 응시한다. 결국 글로 쏟아내고 내 안에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야 다시 앞으로 걸어갈 힘이 생긴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던 미련한 나를 끌어 안는다.      


책을 내고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주위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나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쓸 수 있는 것보다 쓸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한동안 소설이 쓰고 싶었다. 글 안에 숨고 싶었다. 여러 가면들 사이에 숨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소설을 쓸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긴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을 해낼 수가 없다. 시간의 문제인지, 마음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끙끙 대는 사이 나는 결국 글 뿐만 아니라 나를 놓치고야 만다. 시간을 따지고 조건을 살피다 시간만 흘러 버렸다. 눈물이 흐르고야 나는 지금 내가 직면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이렇게 미련하다. 타인과 세상을 향해서는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 스스로에게는 이렇게 둔감하다. 그 시간들이 끝난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 아니었구나.     

 

세상을 위하기 전에 나를 위해야 하는데... 나를 사랑해야 세상에 스며들 수도 있는데... 나는 여전히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버둥대다 나만 흩어진다. 이런 나를 놓을 수는 없으니 다시 세차게 안아줘야지. 나를 위한 글을 또 써내려 가야지. 내 삶은 흐르고 나 또한 조금씩 변해가니. 이런 나도 언젠가는 더 쉽게 물과 섞일 거라 믿으며.


매거진의 이전글 돈으로 모든 가치를 매기는 세상이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