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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의 기억

by 박순우

2022/04/15 얼룩소



제주로 이주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가장 강력히 반대한 건 시아버지였다. 시아버지는 당장 호적에서 이름을 파버리겠다며 남편을 뜯어 말리셨다. 그럼에도 우리는 제주로의 이주를 결정했다. 그 당시 남편과 나는 제주로 가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주를 결정하고 각종 준비를 하며 세 계절을 흘려보낸 뒤, 우리는 제주에 정착했다. 2013년 가을이었다.


다음 해 봄, 시부모님이 제주로 오셨다. 시아버지는 폐소공포증으로 배나 비행기를 타지 못하신다. 제주에 오기 위해 몇 달간 약을 드셔야 했다. 신기하게도 약을 꾸준히 드신 뒤여서인지 시아버지는 흔쾌히 비행기에 몸을 실으셨고, 그렇게 제주로 오셨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우리가 새로 마련한 집과 가게를, 그리고 관광지 몇 곳을 둘러보셨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던 날이 그러니까 2014년 4월 16일이었다.


시아버지는 아침에 나갈 준비를 하시면서, 자연스럽게 TV 리모컨을 찾으셨다. 나는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곧 공항으로 향할 시부모님을 챙기고 있었다. 그때 TV에 속보가 떴다. 망망대해에 가라앉고 있는 한 척의 배가 보였다. 세월호였다. 인천에서 제주로 오던 한 척의 배가 그렇게 가라앉고 있었다. 오보와 속보가 이어지고 우리 가족은 실시간으로 대형참사를 목격하고야 말았다.


당장 나는 시아버지가 걱정됐다. 제주에 오시는 것도 힘들었는데, 대형참사가 벌어진 날 비행기를 타셔야 한다니. 행여나 비행기를 취소해야 할까봐 걱정이 됐다. 다행히 시아버지는 약의 힘으로 비행기 타는 내내 답답함을 느끼지 않으셨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날 세월호는 영영 가라앉아 버렸고, 나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다리던 생존자의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세월호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은 제주로 향하다 사고를 당했다. 아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배에 탔을까. 남겨진 가족들에게 제주는 어떤 섬으로 기억될까. 절대 오고 싶지 않은 땅이 된 건 아닐까. 나는 이 생각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그 무렵 나는 슬슬 아이 갖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노력해도 아이는 오지 않았고, 그저 이렇게 아이 없이 살아도 괜찮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모두 내려놨을 때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찾아왔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그 해였다. 그 아이가 올해 여덟 살.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도 어느덧 8년이 흘렀다.


힘들게 얻은 자식이어서 그런지 내게 육아는 한동안 행복이었다. 둘째 갖는 것도 전혀 꺼려지지 않았다. 엄마로 사는 게 좋았다. 나도 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고, 동시에 절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도전의 영역이 육아였다. 그렇게 나는 점점 엄마가 되어갔다.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이미 엄마였던 친구 하나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볼 수 없다고 했다. 엄마가 되고나서야 친구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세월호 사건은 마주하면 할수록 고통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는 고통도 커져갔다. 그 속에 타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에 내 아이의 모습이 투영됐다.

세월호 사건이 벌어지던 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첫 조카가 올해 고등학생이 되었다. 조카는 세월호의 여파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면서 단 한 번의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보호자에게 수학여행을 가는 것에 대한 찬반을 물었고, 그때마다 번번이 반대의 목소리가 더 높아 무산됐다고 한다. 조카는 억울해 했다. 어른들은 세월호를 핑계로 아이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학창시절의 추억까지 직접 편집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늘 그렇듯 죄가 없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것도, 침몰하는 배를 넋 놓고 바라본 것도, 남은 아이들까지 피해자로 만들어버린 것도 모두 어른이었다.


한동안 세월호 기사를 기피하던 나는, 어느 순간 다시 정면으로 마주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외면한다는 친구의 의견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불편할수록 마주해야 한다. 다시는 벌어지면 안 되는 일일수록 더 알아야 한다. 알아야 바꿀 수 있다. 마주하고 기억해야 조금이라도 변화가 시작된다. 마주하는 게 고통스럽더라도 그 안에 내 자식이 투영되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오버랩되는 한, 우리는 결코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일 년에 단 하루, 그저 기억한다는 문구 하나를 SNS에 올리는 요식행위라도 좋다. 그렇게라도 기억하고 있음을, 연대하고 있음을 드러내야 남아있는 이들이 또 찾아온 4.16을 버텨낼 수 있다. 또다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참사를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별 것 아닌 내 기억들을 나열한다. 그날은 영영 잊을 수 없는 날이므로.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우리 모두가 생생히 그날을 기억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렇게 세월호는 모두의 가슴속에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으므로.


이렇게 별 것 아닌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당신 역시 당신의 그날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함께 각자의 그날을 이야기한다면, 조금 더 아픔을 나눌 수 있고 진실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이렇게 여전히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글로 연대하고 있다는 걸, 조금이라도 보여준다면 남겨진 이들이 혼자라고 느끼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러니 당신도 이야기를 들려달라. 그날의 당신만의 이야기를. 그건 결코 당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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