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4 얼룩소
문명과 비문명을 생각한다. 문명의 반대말은 비문명이다. 비문명의 동의어는 무엇일까. 미개가 될 수도 있고 야만이 될 수도 있다. 같은 단어라도 비문명은 신사적인 것 같지만, 동의어인 미개와 야만으로 넘어가면 비문명은 더 이상 신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야말로 글자 뜻대로 미개하고 야만적인 언어가 된다.
이준석 대표는 토론 내내 문명과 비문명을 언급했다. 휠체어 탑승 문제로 연착되는 건 문명이나, 바퀴를 일부러 승강장와 지하철 사이에 끼워 시위하는 건 비문명이라고 말했다.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지침을 달라. 어디까지가 문명이고 어디까지가 비문명인가.
우리는 분명 문명사회를 살아간다. 인간은 문명사회를 시작한 지 수천 년이 지났고 산업화까지 이루었으니 더는 문명사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게 더 어려워 보인다. 문명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의 여러 가지 기술적, 물질적인 측면의 발전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물을 뜻한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어디까지 발전해야 우리는 이 사회가 정말 문명화 되었다 말할 수 있을까. 발전의 범위는 누구를 기준으로 말해야 할까.
누군가에게 이 사회는 분명 문명화된, 충분히 발전된 세상일 것이다. 비장애인은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으며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빈부격차를 차치하고라도 기본적인 사회를 격없이 누릴 수는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비장애인은 건강한 성인을 뜻한다. 여기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세상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장애인뿐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에게도 노인에게도 세상은 그다지 문명화되어 있지 않다. 평균에서 벗어나는 이들에게 세상은 너무 높거나 너무 크거나 너무 빠르다. 박경석 대표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들에게는 사회 전체가 감옥이라고. 장애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대부분 사람들은 병이나 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장애를 얻는다. 장애를 얻어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혹은 너무 오래 살아서 불편해지는 세상. 이런 이들이 감옥처럼 살아가는 사회는 과연 문명적인가. 비장애인은 하루면 지구 반대편에도 도착하는 세상에서 장애인은 서울에서 예천까지 꼬박 이틀이 걸린다면, 그건 과연 문명화된 사회인가.
비문명화된 사회를 문명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 방식도 점잖게 문명스러운 방식으로 해야 하는 걸까. 그게 통하는 사회였다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이 만들어졌을까. 시위는 원래 비문명적이다. 미개하고 야만적인지도 모른다. 길을 막고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다. 시끄럽고 반복적이며 골치가 아프다. 듣기에 불편하고 낯설기도 하다. 이들은 미개하니 목소리 따위 들어줘서는 안 되는 걸까.
이들은 왜 이런 고의적인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점잖게 앉아서 대화만으로도 문제를 풀 수 있었다면, 굳이 복잡한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욕을 먹을 각오를 하며 시위를 진행했을까. 처음부터 비문명적인 시위를 원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없다. 도저히 문명적인 방법으로 먹혀 들지 않기에 사람들은 집단을 만들고 거리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인다. 욕 먹을 각오를 하고 온몸을 내던진다. 그래야 다만 몇 명이라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그래야 아주 조금이라도 그들이 설 자리가 넓어지니까. 누구나 언제든 시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갑자기 가족을 잃으면, 하루아침에 약자가 되면, 그 누구든 갑자기 비문명사회로 곤두박질 치는 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니까.
박경석 대표의 21년을 돌아본다. 그가 사고 후 장애를 얻은 뒤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다는 5년을 곱씹어본다. 그는 죽으려고 성서를 읽다가 살아야하는 이유를 깨닫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집도 세상도 감옥이었지만, 그 감옥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자 살기 시작했다. 박경석 대표는 이준석 대표와 싸울 마음이 없다고 했다.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목소리의 크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교묘히 언쟁을 부추기는 이 대표를 앞에 두고, 어떻게든 결과를 얻어내려는 그의 절박함 속에 지난한 세월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어떻게든 장애인의 권리를 찾기 위해 한 마디라도 더 의미있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고군분투하던 그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린다.
토론이든 대화든, 그게 설사 이준석 대표의 고의적 의도에 따른 농락이었든, 이번 기회에 장애인들의 요구가 실질적 예산 집행으로까지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가 2013년에 낸 책의 제목은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이다. 토론회에 나가는 게 소원이었던 그와 그의 동료들이 진짜로 행복해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그래야 우리는 문명이 통하는 세상을 비로소 만날 지도 모른다. 모두가 비로소 문명 사회를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