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순우 Apr 01. 2022

혐오할 자유는 없다

혐오를 권리이자 자유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프로젝트 얼룩소에 성소수자가 남긴 글에 한 사람이 답글로 ‘혐오할 자유’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현재는 삭제된 상태다. 나중에 비판이라는 말로 단어를 수정했다.) 그 답글창은 그날 저녁 내내 시끄러웠다. 당장 사과하라는 말과 얼룩소 행동강령에 위배된다는 말 등 혐오를 무찌르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얼룩소라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다른 플랫폼이었다면 오히려 혐오의 자유가 칭송받았을지도 모른다. 찬찬히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머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또렷이 뇌리에 다섯 글자가 새겨졌다. ‘혐오할 자유’


혐오의 사전적 의미는 싫어하고 미워함이다. 실제 내게 혐오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훨씬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단어로 여겨진다. 영어로는 hate 혹은 disgust. hate보다는 disgust가 의미에 더 닿아보인다. 나는 disgust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토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너무 싫은 나머지 토가 나올 것만 같은 상태, 어쩌면 그게 혐오인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숨겨진 혐오를 들여다본다. 나 역시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주장만 옳다는 사람들, 다짜고짜 하대하는 사람들, 차별적인 단어를 죄의식없이 사용하는 사람들, 잘 알지 못하면서 비난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그들이 정말 싫고 미워진다. 웬만하면 그런 사람들과는 연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을 혐오하지만 혐오하는 마음을 꺼내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내 안에 감추고 나만 느낄뿐이다. 겉으로는 그들에게 티내지 않는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똑같이 예의를 갖춘다. 미워하는 마음을 꺼내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마음은 꺼내 보이는 순간 미움으로 그치지 않는다. 논란이 되고 문제가 된다. 하물며 한 집단이 한 사람이나 집단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될까. 바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 여성이나 성소수자 혐오가 그렇고 사이버렉카가 그렇다.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 내가 모든 종류의 혐오를 거부하는 건 언제나 누구라도 혐오자에서 혐오대상자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혐오는 쉽다. 편을 가르고 미워하면 된다. 이해는 어렵다. 이해를 하려면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경청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이해의 영역에 도달한다. 혐오는 그 과정을 거부하는 게으른 사람들의 분노 표출에 불과하다.


혐오가 번지는 건 이렇듯 쉽기 때문이다. 이해보다 미움이 더 쉽고 빠르기 때문에 혐오는 한번 시작되면 마른 날 들불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간다. 혐오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건 언제든 자신도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고 손가락질 받을 수 있다. 그게 혐오의 속성이다. 미세한 다름도 용납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돌려세워 손가락질 하는 것, 그게 바로 혐오다.


학창 시절 힘 센 친구 하나가 한 무리의 친구들을 돌아가며 따돌림했다. 일주일은 누구, 일주일은 또다른 누구, 이런 식이었다. 친구들은 어떻게든 자신은 대상자가 되지 않기 위해 힘 센 친구의 말에 더욱 복종했다. 따돌림 받는 친구의 편을 드는 건 금기와 같았다. 자신도 같이 따돌림 받을까봐 무서웠으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갖은 노력을 해도 소용은 없었다. 자신의 차례는 결국 돌아온다.


아이들의 이 잔혹한 따돌림에서 혐오할 자유를 허락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길어올린다. 지금 당신은 혐오의 자유를 언급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결국 당신도 언젠가는 따돌림을 받는다. 아무리 힘 센 친구에게 붙어 내 순서를 없애려 안간힘을 써도, 혐오가 반복되는 상황 자체를 없애지 않는다면 언젠가 반드시 당신 차례가 온다.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혐오가 문화가 되고 혐오가 선거전략이 되고 혐오가 장사가 되는 세상에 산다. 혐오를 죄의식 없이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일 때, 정치권은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사람들은 집단으로 미움을 정당화해 타인을 사냥한다. 그 사냥으로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한다. 혐오를 문화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혐오는 혐오일 뿐이다. 혐오를 문화라고 부를 때, 혐오는 자유이므로 혐오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혐오할 자유는 없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 있더라도 면전에 대고 나는 당신을 혐오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건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 이 최소한의 선이 사라지면 질서는 무너진다. 길거리는 온통 혐오가 넘치는 무법천지의 세상이 될 것이다. 세상은 원래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더 많으므로. 이미 온라인 세상은 그렇게 무법천지가 되었다. 책임감 없는 플랫폼과 익명성에 기대 혐오를 자유라 일컫는 사람들로 인해 엉망이 된 지 오래다.


혐오를 하지 않는 것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최소한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한 아주 기본의 약속이다. 혐오는 권리가 아니다. 권리는 아무 용어 뒤에나 붙일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니다. 고귀한 것에만 권리를 더할 수 있다. 인권이 그러하고, 참정권이 그러하며, 행복 추구권이 그러하다. 혐오의 권리는 없다. 권리라는 말을 함부로 혐오 따위에 붙여서는 안 된다.


혐오할 자유를 권리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얼굴을 볼 수 없는 온라인이라고는 하나 내 글이 나약한 대상에게 미칠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처음 한 명의 죽음은 자살이더라도 두번째는 타살, 그 다음은 학살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언제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에게 부정적인 혹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혐오를 몰아내려다 혐오에 빠져버린 부끄러운 내 글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공평’과 ‘올림픽’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