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왔다. 다행히 계획한 비행기를 모두 타고 이곳 치앙마이로.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절로 우러났다. 남편은 제주 집에서 출발한 지 꼬박 18시간만에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제주의 삶에 만족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여행을 계획해 떠날 땐 지리적인 한계가 아쉽다.
남편과 어디를 갈까 하다가 주말에만 열린다는 코코넛 마켓으로 먼저 향했다. 마켓도 마켓이지만 사실 코코넛 나무가 그림처럼 줄지어선 곳이라는 게 궁금증을 유발했다. 마켓은 규모가 엄청 크진 않았지만 다양한 물건들과 음식을 팔고 있었다.
안쪽 깊숙이 들어가니 아기 염소들 무리가 눈에 띄었다. 동물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있나. 게다가 너무나 귀엽고 깜찍한 아기 염소라니. 말라버린 탯줄이 여전히 배꼽에 매달려 있는 염소들이 여럿이었다. 큰 염소들을 위해 풀을, 작은 염소들을 위해 우유를 먹이주기 유료 체험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풀과 우유를 하나씩 받아 먹이를 줬다. 우유는 가장 힘이 없고 작은 아기 염소에게 주었다. 혼자만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기에 일부러 곁으로 가서 벌리지 않는 입을 간신히 벌리고 우유를 흘려주었다. 조금 맛을 보더니 그제야 젖꼭지를 빨던 아기 염소. 어딜 가나 덜 먹고 잘 치이는 녀석들을 보면 마음이 동한다.
가족이 모두 모인 기념으로 사진도 여러 장 찍고, 코코넛 아이스크림과 코코넛 팬케이크도 먹고, 아이들이 또 먹고 싶다고 한 꼬치구이도 시켜먹었다. 꼬치구이는 길에서 먹는 것보다 비싼 10바트였지만 양이 좀 더 많았다. 코코넛 아이스크림은 저번에 아이들과 갔던 카페보다 훨씬 맛났고, 코코넛 과육과 우유 등이 어우러진 팬케이크는 건강한 맛이랄까.
먹는 것에는 왜 지갑이 잘 열릴까. 물건은 무척 신중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사면서, 먹을 거리는 아이들이 원하면 웬만하면 지갑을 열어 사준다. 불량식품이나 먹어서 득 될 게 하나 없는 경우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코코넛 마켓을 나와 그동안 우리가 다닌 곳 중 남편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몇 곳을 함께 다녔다. 올드시티로 우선 가서 남편도 냉장고 바지를 하나 사고, 왓 쩨디루앙을 방문하고 커피 맛집도 가보고 님만해민의 큰 쇼핑몰도 함께 가보고. 남편은 생각보다 비싸다는 말을 많이 했다. 이곳 물가가 한국보다 저렴한 건 사실이지만 너무 큰 기대를 하기엔 제법 비싼 음식과 물건이 많다.
저녁에는 타페 게이트부터 왓 프라싱까지 1km에 걸쳐 열린다는 선데이 마켓으로 향했다. 가장 큰 야시장이고 가장 저렴하게 물건을 판매한다는데 어떤 곳일지 궁금했던 터였다. 시장의 규모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메인 스트리트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빠지는 골목과 사원 안쪽까지 상인들이 좌판을 깔고 별의별 물건과 음식을 다 팔고 있었다.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마켓은 치앙마이가 얼마나 큰 국제적인 관광도시가 됐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장면 같았다. 마켓은 한 번 들어서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거의 모든 길에 차량 통행을 금지하고 마켓이 들어선 까닭이었다. 치앙마이의 장사꾼이란 장사꾼은 이곳에 다 모였나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금액도 그 어떤 가게나 마켓보다 저렴했다. 서로 경쟁이 되기 때문인지 물건도 가장 다양하고 값도 가장 쌌다. 아이들의 부서진 불상을 대신할 금속으로 제작한 불상도 다시 사고, 첫째가 맛보고 싶어한 아보카도 스무디도 마셔보고, 남편 반바지, 코끼리 마그네틱 등 그동안 사고 싶지만 사지 못했던 물건들을 죄다 구입했다.
전부 둘러보기에는 시간과 체력이 허락치 않았던 우리는 계속 빠져나갈 곳을 찾다, 프라포클라오 로드에서 숙소가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슬슬 걸어나왔다. 성곽 남쪽 게이트인 치앙마이 게이트까지 걸어나와 볼트로 차량을 불러 숙소로 돌아왔다. 그랩보다 볼트가 저렴하다는데 인증 절차에서 자꾸 오류가 나서 이용을 못하다가 결국 성공해 타기 시작한 볼트. 그랩보다 조금 더 저렴한 듯하다.
규모와 인파에 적잖이 놀랐던 선데이 마켓. 물건 뿐만 아니라 버스킹 하는 사람들, 그림 그리는 예술가들도 있어 축제에 버금가는 마켓 같았다. 꽤 많이 걷고 구경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지도를 보니 그리 길지 않은 코스라 깜짝 놀랐다. 얼마나 많은 사람 속에 있었던 걸까.
다음날에는 볼트를 불러 도이수텝 사원으로 향했다. 도이는 이곳 언어로 산을 뜻한다. 도이수텝 사원은 수텝 산 해발 1,000m높이에 지어진 사원이다. 남편이 오면 함께 가려고 그동안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볼트로 기사를 부르니 메시지가 바로 날아온다. 사원에서 내려오는 차량을 부를 수 없을 거라며 왕복 서비스를 이용하겠냐고 묻는다.
여러 말들이 오가고 흥정 끝에 사원에서 1.5시간을 보내는 조건으로 550바트를 주고 다녀오기로 약속을 했다. 숙소에서부터 꼬박 40분 정도를 달려갔다. 산을 오를 때는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따라갔는데 그 풍경이 한국의 산 같기도 했다.
사원 입구까지 오르니 차량이 제법 많았다. 특히 빨간색 썽태우가 잔뜩 줄을 지어 주차돼 있었다.
도이수텝 사원까지는 306개의 계단을 직접 오르거나 오른편 입구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케이블카인 줄 알았는데 크기나 작동방식이 엘리베이터에 가까웠다. 평소라면 걸어갔을 텐데 남편이 갑자기 계단만 걸으면 무릎 통증이 심하게 오는 바람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랐다.
입장료 30바트에 왕복 엘리베이터 비용이 20바트, 일인당 총 50바트가 들었다. 현금만 받는다. 엘리베이터는 언뜻 보면 스위스 융프라요흐를 오르는 레일 같았다. 그에 비하면 구간도 짧고 차량 크기도 훨씬 작았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엘리베이터는 양쪽으로 두 개가 운영되고 있었다. 속도가 느리지만 워낙 짧은 구간이라 금방 위아래를 오고갔다.
이 높은 곳에 어떻게 이런 사원을 지었을까. 1500년대 란나왕국 때 오랜 기간에 걸쳐 지었다는데 규모가 꽤 상당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중국의 만리장성도 그렇지만, 대규모 건축물을 짓는다는 건 왕국의 힘을 보여주는 일과 같다. 란나왕국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도 엿볼 수 있지만 동시에 어떤 노동력이 들어갔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파란 하늘 아래 태양빛을 받으니 불상도 파고다도 금빛으로 반짝였다. 태국 사람들은 금색을 무척 좋아하는 듯하다. 중요한 장식이나 물건들은 대개 금색으로 되어있다. 입장권 뒤에 사원 안내도가 있어서 그걸 보며 사원을 작게 그리고 크게 두 번 돌았다. 한 번은 신발을 벗고 한 번은 신발을 신고. 사원 안쪽은 신발을 벗고 걸어야 한다.
사원 동쪽에는 치앙마이 시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치앙마이 국제공항과 시내의 크고작은 건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야경이 무척 멋질 것 같지만 다시 오긴 힘들겠지. 꽤 길게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머무는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다.
사원에서 내려와 사원 앞 가게들도 좀 구경을 하다 다시 볼트를 타고 내려왔다. 님만해민에 들러 남편이 꼭 먹고 싶다는 푸팟뽕커리를 먹고 내가 마셔보고 싶었던 바리스타 챔피언 카페라는 Roast8ry에서 롱블랙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 일찍 숙소로 들어갔다. 커피는 밸런스가 너무 좋았다. 근데 기본 말고도 엄청 다양한 응용 메뉴가 있어 주문이 쉽지만은 않았다. 결국 우린 기본을 맛봤지만.
아이들은 오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 속으로 들어가고 남편과 나는 한쪽에 앉아 아이들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제일 얕은 곳에서만 첨벙대던 둘째가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갑자기 발이 닿지도 않는 곳까지 진출해 헤엄을 친다. 꽤 먼 거리를 구명조끼를 입고 스노클링 장비를 끼고 오갔다.
녀석은 늘 스스로의 속도대로 방식대로 세상을 탐색하는 편인데, 느린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갑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의 잠재력과 방향을 믿고 늦더라도 계속 기다리고 지켜봐줘야겠다고 새삼 생각하게 된 순간.
이렇게 또 이틀이 쏜살처럼 지나갔다. 이제 치앙마이 여행을 마무리해야 하는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