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고
1999년 미국 콜럼바인 총격 사건, 열세 명이 사망하고 가해자인 두 명은 현장에서 자살한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사건이다. 내게는 영화 <엘리펀트>로 기억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인 수 클리볼드가 쓴 책이 바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이다. 이 책은 내게 최고의 육아서이자, 최악의 육아서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할 책이다.
책을 열면서 공포를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마주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진실일수록 불편한 법이다. 편견을 깨는 책일수록 그렇다. 내가 편견 덩어리였다는 걸 깨닫는 처절한 자기 정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불편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이 책을 펼치면서 내가 믿어왔던 어떤 세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래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가해자의 엄마가 될 수 있기에.
육아를 하면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아이들에게 궁극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건 타고난 기질일까, 보호자의 양육일까였다. 육아를 하며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육아서를 하나씩 읽곤 했다. 육아서마다 기질을 강조하기도 하고, 보호자의 양육태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기질보다 양육자의 자질에 더 방점을 찍었던 건 어떤 자신감 때문이었다. 잘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초보 엄마 시절이었다. 그 오만방자함 때문에 범죄기사를 접할 때마다 나는 부모의 탓을 했다. 잘못 키운 탓이라 여긴 것.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모를 수가 있나, 어떻게 저 지경이 되도록 부모란 사람이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아이보다 부모를 더 탓하곤 했다.
내 자신감과는 달리 아이들은 자랄수록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자아를 찾아갈수록 고집이라는 게 생겼고 다양한 기질들이 발현됐다. 나와 꼭 닮은 것 같다가도 또 전혀 다른 영혼인 게 자식이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늘어만 갔고, 그럴수록 나의 책임감은 더 커져 갔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만큼이나 묵직한 '어떻게 키워야 하나'의 질문들이 부채처럼 내 안에 쌓여갔다.
이 책을 마주하고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끔찍한 범죄의 가해자인 딜런 클리볼드의 가정이 나의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면 가해자를 악인으로 치부한다. 가해자가 나고 자란 가정이 평범하지 않을 거라 짐작한다. 그게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굳이 낱낱이 파헤쳐 원인을 찾는 것보다 단순히 악인으로, 악인들의 가정으로 치부하는 게 쉽기에 우리는 그런 오해들을 기정사실화한다.
저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시작했음에도,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라는 첫 문장을 읽고 나는 한동안 숨이 막혔다. 끔찍한 범죄자가 자신이 낳은 사람임을 인정하는 이 한 문장에는, 16년 동안 아들이 저지른 그날의 일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했는지 돌아보며 살아온 한 여인의 투쟁과 같은 삶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책을 넘길수록 충격은 배가 됐다. 딜런의 부모는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했고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아이를 키웠다. 그럼에도 아이는 부모의 바람대로 살지 못했다. 사건이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나서야 수는 자신의 아이가 궁극적으로 저지른 일은 자살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16년 동안 수많은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자살은 뇌의 병으로 저지르게 된다는 걸 알게 된다.
흔히 우리는 자살을 생에 당당히 맞서지 못한 비겁한 자들의 최후 선택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녀가 만난 수많은 전문가들은 자살을 택하는 건 뇌건강의 문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자살은 한 순간에 결정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오랜 시간 누적돼온 문제가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상태와 만나게 되는 시점에야 비로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수는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친구와의 모임에서 요즘 더없이 행복하다는 말을 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 시각 딜런은 심각한 우울에 빠져 있었지만 가족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청소년기는 일상적인 반항에 가려져 우울증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책에는 감쪽같이 자신의 상태를 숨기고 일상을 살며 마지막을 준비한 아들과 아주 작은 단서라도 눈치 채 물고 늘어졌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자책하는 엄마의 몸부림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섬뜩했던 또 하나는 살인과 자살이 우리의 일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끔찍한 사건 기사와 기록적인 자살 통계를 접하면서도 나와는 멀다는 안일함을 나 역시 갖고 있었다. 수 역시 자신의 주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일을 겪은 뒤 수는 비슷한 아픔을 경험한 수천 명의 사람들로부터 공감의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모임을 통해 평범한 가족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건,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과 악마의 얼굴을 한 아들의 모습을 일치시켜야만 했던 대목이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과 용서의 장면이었다. 세상에는 절대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들을 해야 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걸 결국 해내는 이들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참회하는 마음으로 속죄하듯 삶을 이어간 수의 지난 세월을 끊임없이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수는 결국 후회한다.
공부를 할수록 딜런에게 어떻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것들을 배워간다. 설교하는 대신 귀를 더 많이 기울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할 말이 없을 때 내 생각과 말로 빈 공간을 채우는 대신 말없이 같이 앉아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p419
이 책은 읽어도 읽지 않아도 혼돈이다. 그럼에도 부모라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마주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은 숱한 논쟁 끝에 기질과 육아의 영향을 각각 절반 정도로 결론내렸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또다른 결론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누구보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책임감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 이 책을 펼쳤다. 다 읽고 난 뒤 나는 오히려 육아의 책임감으로부터 조금 가벼워지는 모순점에 놓이게 됐다. 아이가 괜찮은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기를 여전히 바라지만, 그 모든 성장에 대한 책임이 내게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된 것.
아무리 내가 낳았다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모든 걸 해줄 수는 없다. 모든 걸 쏟아붓는다고 자식이 잘 자라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꼭 해줘야 하는 단 하나가 있다면 멀지 않은 곁에 늘 존재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언제든 기댈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게 아닐까. 그럴려면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으로 아이들의 현재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이 책의 저자인 수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죽는 게 오히려 나은 삶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살아남아 연구에 몰두해온 그녀의 지난 16년 세월에 고마웠다. 살아야만 밝힐 수 있는 진실이 있다. 견뎌내야만 닿을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이 책은 분명 그 지점에 놓여있다.
또다시 미국에서 총기 난사사건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다. 이런 시점에 가해자의 엄마가 쓴 책을 꺼내보는 게 자칫 가해자를 옹호하는 걸로 비춰질까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이 시점이기에 다시 한번 꺼내어 본다. 문제는 늘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