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을 보고 사랑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사랑은 사소하게 시작된다. 우연한 눈마주침, 작은 손끝의 스침, 작지만 섬세한 배려, 멈추고 다시 걸어가는 작은 쉼표 하나에도 감정은 들어있다. 그 사소함과 우연들이 모이고 쌓이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사랑이 시작됐구나. 배우 박해일이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슬픔이 닥치는 걸 폭풍처럼 들이닥치기도 하지만 잉크 한 방울이 서서히 물에 퍼지듯 젖을 때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랑도 퍼지는 속도와 방법이 다를뿐 사소한 것들에서 시작해 마침내 한 사람을 장악하고야 만다.
그러니 사랑은 사건이라기보다는 사고에 가깝다. 예상치 못하게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오기도 하고, 작은 충돌들이 지속되다 어느 순간 쨍 하고 깨어지는 유리잔처럼 그렇게 서서히 누적되다 시작되는 것,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소하게 시작되고, 폭풍처럼 혹은 시나브로 다가와 머리와 몸을 온통 혼란스럽게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으로 살아있고 사랑으로 의지하게 되는 삶들. 그래서 사랑은 미약한 시작에 비해 그 결과가 자못 위대하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힘이 내포되어 있는 감정이 바로 사랑이니까.
나는 사랑을 사랑한다. 가슴 떨리는 사랑의 예감과 몸과 마음과 정신을 내바치는 사랑의 순간과 저물어가는 사랑의 찢어지는 아픔까지 나는 모조리 사랑한다. 이제껏 사랑만큼 나를 성숙하게 한 감정은 없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고, 동시에 가장 인간답지 않은 한계를 넘게 하는 힘을 사랑은 가지고 있다. 주체나 대상 혹은 시점에 따라 사랑은 완전한 포용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 완전한 파괴에 이르기도 하는 것. 그래서 사랑은 달콤하고 사랑은 위험하다.
<헤어질 결심>의 사랑은 위험하지만 위험하지 않다. 짝이 있는 사람의 금지된 사랑이기에 위험하지만 사랑으로 감싸 안기에 결코 위험하지 않은 것. 그 모순을 안은 두 주인공은 자기 자신은 붕괴하되 상대는 사랑으로 감싸는 결론을 택한다. 사랑한다는 한 마디 말보다 더 강렬한 그 선택으로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의 사랑이 된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을 완성한다.
한동안 멜로나 로맨스에 시큰둥했다. 사랑의 안정을 택한 내게서 꽤 멀어진 이야기이기도 했고, 남녀의 사랑보다 부부나 부모 자식간의 사랑 등 또 다른 결의 사랑에 익숙해져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오롯이 사랑에 집중하는 이야기를 보자니 조금 부끄러워진다. 사랑의 가치를 한동안 저평가해온 나를 돌아본다.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으로 살아낸 시간들을 되뇐다. 그 사랑이 어설프고 미완성이었다 해도 그 때의 내게는 분명 간절했으니, 사랑의 끝이 어떤 모습이든 내게는 그 사랑을 평가절하할 자격이 없다. 사랑은 끝나도 그 시간의 자취는 내 안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테니.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형사물일테지만, 내게 이 영화는 순도 백 퍼센트의 사랑이야기였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정면에 내세워 다루기를 꺼려하는, 섬세한 소통과 꼿꼿한 절제로 ‘마침내’ 사랑에 이르는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이야기였다. 영화의 마지막, 폭풍처럼 밀려드는 파도와 그 바다를 거닐며 서래를 목놓아 부르는 해준의 모습은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그 마지막 장면은 긴 러닝 타임 내내 모두가 숨기고 억눌러왔던 폭풍같은 운명같은 사랑의 본모습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