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현 나르시시즘의 착취 패턴과 그 피해에 관하여
이 글은 누군가에겐 명백한 학대에 대한 기억이자,
누군가에겐 무수한 관계 속에서 느껴온 무형의 착취와 피로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너무 많이 공감하고,
너무 빨리 이해하며,
너무 섬세하게 다가온다.
당신을 누구보다 먼저 눈치채고,
당신이 꺼낸 말 이전의 감정까지 먼저 짚어낸다.
당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들이 그만큼 따뜻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그만큼 오래도록
'생존을 위해' 훈련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위협'과도 같은 공포와 불안이다.
당신이 '사랑'이라 느꼈던 것은,
당신 안의 사랑의 힘이 너무도 커서,
불순한 그들의 언어를
순수한 당신의 언어로 '번역'해버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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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친절은 진심이 아니다.
그들의 경청은 배려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감시'이고,
그들의 깊이는 '치밀한 모방'이다.
그들은 당신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을 잃지 않기 위해
당신을 위하는 척하고,
당신을 이해하는 척하고,
당신의 감정에 동화된 척하며,
당신 안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든다.
당신의 정체성을 조용히 관찰하고,
그것을 복제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마음에 스며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의 말투, 감정, 고백, 슬픔이
당신의 것인지 그들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당신이 드러낸 '당신'을 그대로 반영하여
'이상적인 거울'처럼 기능한다.
당신은 그 거울을 보며 생각한다.
'드디어 나와 꼭 맞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다'라고.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당신도, 그 자신도 아니다.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당신,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그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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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패턴>
1단계: 이상화 — 당신은 완벽한 공급원이다
초반, 그들은 헌신적이다.
당신의 사소한 말도 기억하고,
당신의 미세한 감정 변화도 알아챈다.
당신이 필요로 하기 전에 먼저 손을 내민다.
당신은 생각한다.
'이 사람은 나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구나.'
하지만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주는 인정과 확신'이다.
당신이 그들을 칭찬할 때,
당신이 그들에게 기댈 때,
당신이 그들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은 비로소 '나는 충분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을 놓을 수 없다.
당신은 그들의 '존재 증명서'이자 '트로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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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착취 — 당신의 경계선이 허물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은 조금씩 지쳐간다.
그들은 항상 당신의 반응을 확인한다.
메시지를 보내고, 즉각 답장이 없으면 불안해한다.
"내가 뭘 잘못했어?"
"요즘 뭔가 달라진 것 같아"
"나만 널 좋아하고, 나만 널 생각하네"
당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늦게 답하거나 당신의 '일상을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불안은 당신을 '조급'하게 만든다.
당신은 설명하고, 안심시키고, 다시 웃어 보인다.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방식을 미뤄두는 순간,
당신의 경계선은 조금씩 허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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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당신의 시간을 빼앗지만,
'함께 있고 싶어서'라고 포장한다.
그들은 당신의 감정을 소모시키지만,
'너무 좋아해서', '내가 여리고 예민해서 미안해...'라며
'알아주지 않는' 당신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들은 당신의 에너지를 빨아들이지만,
'나는 너밖에 없어'라고 정당화한다.
당신은 점점 지치지만,
그 '입이 막히고 숨이 막힌 듯한 피로'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 한 번도
명확하게 요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당신이 눈치챌 수밖에 없도록
'약하고 상처받은 척'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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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평가절하 — 당신이 부족해진다
어느 순간, 당신은 알아챈다.
이 관계에서 당신은 항상
'더 잘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이 조금이라도 지친 표정을 보이면,
그들은 조용히 위축된 얼굴로 묻는다.
"내가 귀찮게 했구나."
당신은 부인할 수밖에 없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하지만 소용없다.
그 순간, 당신은 이미
'그들을 다치게 한 사람'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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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하면,
그들은 말한다.
"나랑 있는 게 힘들어?"
"요즘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아."
"너 없으면 나는 혼자야.."
"나 요즘 너무 힘든데, 너를 만나면 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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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잘 나고 독립적이라 열등감과 불안이 자극되면,
그들은 투사적 회피를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마치 다른 사람의 생각인 것처럼 이용한다.
"나는 너한테 다 얘기했는데, 너는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
"원래 사람들은 다 이래.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래. 그건 네가 이상한 거야"
"사람들이 다 너에 대해 그렇게 말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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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공감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슬퍼한다.
"나는 네가 이해해 줄 거라 믿었는데..."
"너는 내가 힘든 것도 몰라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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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가스라이팅 한다.
"네가 너무 예민하고 부정적인 거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그것도 장난으로 못 받아들여?"
"웃자고 한 소리에 왜 이렇게 예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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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거리를 두려 하면,
그들은 극단적으로 무너진다.
"난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데..."
"나는 너밖에 없는데, 너마저 날 떠나면..."
"네가 아니면 날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
이 모든 문장의 공통점은 하나다.
'당신이 잘못했다'는 직접적 비난은 없지만,
'당신이 부족하다'는 암시가 가득하다.
그들은 당신을 비난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런 나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저 '상처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방어할 수 없다.
당신은 그저, 감정이 풍부하고 헌신적이고 여리고 섬세한 착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
예민하거나 배은망덕하거나 냉정한 '가해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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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폐기 — 당신은 더 이상 쓸모없다
당신이 더 이상 그들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게 되면,
그들은 마치 '어제까지 사랑을 속삭였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괴하고 불편한' 냉기를 뿜어낸다.
일반적인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서 오는 '식어버린 감정'과는
그 질감이 다르다.
– 보통 사람들은 답이 늦을 때 미안해하지만,
그들은 당신의 메시지를 확인하고도 '안 읽은 셈' 친다.
– 질문을 하면 "아, 배고파"라며 자기 할 일만 하거나
'눈앞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에 몰두한 척하며 무시한다.
당신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유령'이다.
– 당신이 힘들다 말하면 "나도 힘들어"라며 당신의 입을 막는다.
당신의 고통은 그들을 성가시게 하는 '소음'일 뿐이다.
– 눈빛에서 모든 온기가 사라진다. 분노조차 없는,
마치 '고장 난 기계를 보며 지루해하듯 무미건조한' 시선만 남는다.
– 화를 내는 대신 투명 인간 취급을 하며,
당신이 "제발 뭐라도 말해달라"라고 빌게 만든다.
– 헤어짐을 통보할 땐 "너처럼 좋은 사람에게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라며 '착하고 비련한 나'와 '버려진 너'의 프레임을 만들거나,
"네가 예민해서 내가 질린 거다"라며 죄책감을 전가한다.
(– 이별을 통보당했을 때도 본질은 똑같다. "난 너무 사랑했는데.. 그 사람한테는 부족했나 봐.."라며 자기반성의 가면을 쓰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네가 어떻게 나를 버릴 수가 있어", "나는 너 없으면 죽을 거 같아.."라며 죄책감을 전가한다.)
당신은 혼란스럽다.
'내가 뭘 잘못했지?'
'왜 갑자기 이렇게 달라졌지?'
당신은 다시 붙잡으려 한다.
더 다정해지고, 더 이해하려 하고, 더 미안해한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당신이 필요 없다.
진짜 다정한 사람은,
다가갈 때도 멀어질 때도
불필요한 것들은 정제한 채 상대를 배려한다.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것만이 배려가 아니다.
당신이 마음 편하게 끊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다정한 사람들의 배려다.
하지만 그들의 다가옴은 폭격이고,
그들의 멀어짐은 유기다.
그들의 열기는 당신을 긴장시키고 태우기만 할 뿐,
'편안함'도, '일관성'도 없다.
그들의 냉정은 인간적인 감정이 배제된 채,
쓸모가 다한 물건을 쓰레기통에 넣고 뒤돌아보는 듯한 '서늘한 무관심'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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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신이 모르는 사이,
그들은 이미 다음 사람을 찾았다.
새로운 누군가에게
다시 한번 '이상적인 거울'이 되어주고 있다.
그 사람도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드디어 나에게 꼭 맞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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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가면과 전략>
만약 당신이 거리를 두려 한다면:
그들은 '자기반성 모드'로 전환한다.
"내가 요즘 너무 힘들었나 봐."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이 기댔던 것 같아."
"미안해, 나 이제 바뀌어볼게. 지켜봐 줘."
당신은 다시 안심한다.
'역시 이 사람은 성찰하는 사람이야.'
하지만 결국,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만약 당신이 끝까지 수용한다면:
그들은 '더 깊은 요구'와 '더 강한 착취'를
'더 당연하게' 하기 시작한다.
"너와 나는 모든 걸 공유한 사이야. 나만큼 너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우리 말고 누가 서로를 이렇게 이해하겠어?"
"이 정도 잘못은 다들 하는 거야. 난 어쩔 수 없었잖아."
"아닌 척하지 마. 너도 똑같을걸?"
당신은 점점 질식한다.
하지만 쉽게 떠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공공연하게
'그들의 유일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명확히 거부한다면:
그들은 '피해자 모드'로 전환한다.
"너는 나를 이용만 하고 버리는구나."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데..."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무너졌어."
"(주변인에게) 난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하고 헌신했는데.. 그 사람은 아니었나 봐.. 내가 부족했던 거겠지.. 근데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는 건.."
은밀한 나르의 피해자는
보통 똑똑하고 성숙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너덜해진 마음으로 관계를 끝낸 후에도,
홀로 고통을 견디며 상대에 대한 배려와 예의를 지키려 한다.
그리고 그런 당신에게,
나르의 '플라잉 몽키'가 된 주변인들의 '2차 가해'가 날아들기 시작한다.
*플라잉몽키: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타깃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리 가해자'나 '메신저'로 활용하는 주변의 제3자들, 즉, 나르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대신 오물을 던져주는 '조력자들'.
"왜 그랬어.."
"그렇게까지 해야 해? 잘 지냈잖아"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잘 풀어봐"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그 사람은 네 생각해서 그런 건데, 네가 회피하거나 나약한 거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건 없는지 한 번 되돌아봐"
당신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
하지만 당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
당신은 그저,
'당신의 경계를 지켰을 뿐'이다.
-
그들은 당신을 울리지 않는다.
당신을 화나게 하지 않는다.
대신,
당신이 감히 울거나 화낼 수 없게 만든다.
당신이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순간을 슬퍼하지만,
용납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당신이 계속 웃어주기를 바란다.
계속 좋은 말만 해주고 품어주기를,
계속 고마워하기를,
계속 염려하고 반응하기를,
계속 혼란한 연민과 미안함에 갇혀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존재 가치를 확인받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들은 당신의 감정을 마비시키고,
자신을 의심하게 하며,
고립되게 만든다.
당신은 혼자가 된다.
관계 안에서.
그리고 당신은 어느 순간,
이 관계가 왜 이토록 무겁고 죄책감으로 가득 찼는지 모르게 된다.
당신은 말할 수 없다.
'이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해'라고.
왜냐하면 그들은 단 한 번도
명확하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당신이 당신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상처받고, 슬퍼하고, 위축되고, 약해 보였을 뿐이다.
그들은 "당신이 이해해 줄 거라 믿었는데..."라며 슬퍼한다.
"나는 당신을 위해 그런 건데..."라며 위축되어 보인다.
"나는 원래 이렇게 예민하고 약해"라며 지치고 안쓰러워 보인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당신이 어떻게 그래..."라며 서운해 보이고,
사라질 듯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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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방비하게 이해하고 혼자 감당한 그 시간 동안,
오히려 그들은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헌신하며
당신의 모든 것을 아는,
'좋은 사람'이 되어있다.
당신은 혼란스럽다.
'내가 예민한 건가?'
'내가 너무 차가운 건가?'
아니다.
당신의 죄책감과 외로움은
그들이 설계하고 심어둔 것이다.
그들은 고통스러워하는 당신을 느낀다.
그리고 속으로 안도한다.
'이제 나는 다시 착한 쪽에 있다'는 도덕적 쾌감 속에서.
당신의 공기를 빼앗은 후에야 숨을 쉬고,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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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아야 할 것>
당신은 사랑받은 게 아니다.
필요에 의해 '소비'당한 것이다.
'사랑'은 당신을 채우고 편안하게 한다.
'필요'는 당신을 조여 오고 눈치 보게 만든다.
그들은 당신을 사랑한 적 없다.
당신에게 기생하며 당신의 감정과 에너지를 빼앗아,
자신을 겨우 연명해 왔을 뿐이다.
그들의 미안함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충분한 사람이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좌절'과 '슬픔'이다.
그들의 슬픔은 당신을 향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더 이상 불안을 채워주고 자신을 증명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과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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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분명히,
타인을 해할 의도를 갖고 행동하기도 한다.
그리고 분명히,
자신이 그렇게까지 타인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름’은 순진한 무지가 아니다.
그것은 '반복된 회피의 결과'이자,
'스스로 택한 맹목'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단지,
알게 되면 자신이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두려워하기에
병적으로 '외면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는 결백이 아니라,
'계산된 비겁'이다.
그 외면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가장 치밀하게 저지르는 '무한의 악'이다.
그들에겐 '악의'와 '무지', 이 모두가 진실이다.
즉, 그들이 가진 유일하고도 강력한 진실은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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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조'를 유지하는 한,
그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말이나 행동의 변화는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다.
더 교묘하고 세련된 언어로 자신을 포장하고,
더 고도화된 연출로 자신을 드러내고,
'변하는 척'을 반복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렵지 않다.
그리고 당신조차도 모르게
당신은, 자신의 생기를 깎아
'그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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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지금도 누군가의 따뜻함 속에서
자기 존재를 입증받고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또 한 사람의 경계선은 허물어지고,
또 하나의 사랑은 착취로 오염된다.
그들의 가면은 섬세하고, 안쓰럽고,
지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가면 뒤엔
비틀린 욕망으로 일그러진, '밑이 빠진 공허'가 있다.
그리고 그 공허함은
당신을 필요로 한다.
당신이 혼란스럽고 무너질수록,
그들은 비로소 채워짐을 느낀다.
-
당신이 빠져나오는 방법은 하나다.
그들의 '슬픔'을 책임지지 않는 것.
그들의 '불안'을 안심시키지 않는 것.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내려놓는 것.
'아무리 마음이 쓰여도, 그들로부터 자신의 경계를 지키는 것'
당신은 그들의 구원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도 당신의 천생연분이나 구원자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당신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당신을 소모시켜 자신을 채운 사람'일 뿐이다.
당신이 떠날 때,
그들은 무너진 척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모르는 사이,
그들은 이미 다음 거울(타깃)을 찾고 있다.
은밀한 그들은,
자신의 불안과 추악함이 새어 나와도
자신을 계속 믿어주려 노력하고
자신을 오랜 시간 깊이 들여다봐 줄,
선량하고 공감능력이 높으며
인간에 대한 이해심과 호기심이 많은,
강한 자아와 빛을 갖고 있는 사람만을 거울로 삼는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그들은,
그렇기에 더 이해받거나 면죄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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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이 꽃을 뒤집어쓴다고 똥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멀리서 보는 이들에겐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지만,
가까워지면 그 악취와 독성에 질식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안다.
그것은 무서워서 피해야 하는 게 아니다.
그 독성의 전염을 막기 위해 피해야 하는 것이다.
길바닥에 개똥 하나도 신발로 밟지 않으려
두 눈 똑바로 뜨고 조심스럽게 다니는데,
온 일상에 염증을 일으키고,
자아 장벽을 무너뜨려 부패시켜 버릴 위험을
우리는 간과하며 산다.
우리 몸에 대변이 묻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즉시 씻어내는 것'이듯,
전문가들은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으로
'접촉 금지'를 권고한다.
씻어내지 않고 그 위에 약을 덧바르는 것은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씻어낸 후 회복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부터 그것에 경각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
자신을 믿고 나르와 어울리게 된 주변의 누군가는
아무리 씻어내도 나을 수 없는 병에 걸리거나
평생의 후유증을 안고 살게 될 수도 있다.
모든 더러움이 즉각적인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
어떤 것은 천천히 스며들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면역체계와 경계선이 무너진 뒤다.
그 병의 전염성과 치명성이 매우 강하고
전조증상조차 없이
모든 것을 썩어 들어가게 한다는 것을,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모를 수 없다.
-
우리는 악을
연민할 수도,
이해할 수도,
미워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미숙하고 결핍되거나
잘못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 멈추지도,
책임지지도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