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의 정신승리 가이드
[Edited by iid the HRer]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니, 편하게 봐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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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을 하다 보면 늘 부딪히는 고민이 있다.
“내가 매일 하는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가끔은 눈에 띄는 성과도 있다.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거나, 규정을 정비하거나, 성과관리 체계를 손질할 때다. 그 순간만큼은 HR 스스로도 보람을 느낀다. 눈앞에서 변화를 확인할 수 있고, 주변에서도 “좋아졌다”라는 반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은 길지 않다. 대부분의 HR 업무는 제도 설계가 아니라 운영이다. 채용 공고를 열고, 문의에 답하고, 급여를 맞추고, 노무 문제를 조율하는 일상적 반복이 이어진다.
더 큰 문제는 반복에서 오는 지침이다. 이미 수없이 가이드를 했음에도 대표나 구성원은 또다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배움이나 변화에는 관심이 없는 듯, 늘 제자리로 돌아온다. HR은 이때 큰 허무감을 느낀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결국 변하지 않는구나.” 반복되는 질문과 무반응은 HR의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그래서 많은 HR이 자기 일을 스스로 깎아내린다. “나는 제도도 못 만들고, 늘 잡무만 하고 있다”라고.
그러나 사실 이 고민은 HR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사도, 부모도, 리더도 비슷한 벽에 부딪힌다. 사람의 변화를 기다리다 지치고,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자신의 노력이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R은 더욱 직접적으로 이 문제를 겪는다. HR의 일 자체가 사람의 변화와 조직의 적응을 다루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변화에 욕심을 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HR이 추구하는 진짜 변화는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가치관과 태도의 전환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인의 생명이나 재산이 위협받는 극단적 상황이 아니라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위기 상황이 아닌 이상, 사람은 원래 하던 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렇다 보니 HR 담당자의 말은 쉽게 흘러간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HR의 반복된 안내만으로는 사람을 바꾸기 어렵다. 오히려 “또 불평하는구나”라는 반응만 돌아오기 쉽다. 그래서 사람 자체가 변하길 기대하는 순간, HR은 가장 큰 소모를 경험한다.
그렇다면 HR의 변화는 어디서 오는가? 나는 늘 말한다. “ver 1.0을 기대하지 말고, ver 0.1을 만들라.”
역사를 보자.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체제 전환은 ver 1.0이다. 하지만 그 거대한 교체 이전에도 수많은 작은 변화가 있었다. 제도와 법, 생활의 습관, 사소한 규범들이 조금씩 변하며 쌓였다. 과거의 언어와 제도가 조금씩 낡아지고, 새로운 관습이 틈입하고, 사람들이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해 임시로 만든 장치들이 누적되었다. 그 작은 변화들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일상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면 하나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 누적이 어느 순간临계점을 넘어 새로운 체제를 열었다. 우리는 흔히 “시대가 바뀌었다”라는 거대한 언어로만 설명하지만, 그 속에는 ver 0.1이 무수히 깔려 있다.
HR도 다르지 않다. 거대한 성과주의 제도를 도입하거나 조직 구조를 전면 개편하는 것이 혁신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조직이 건강하게 굴러가는 힘은 작은 ver 0.1에 있다. 오늘 채용 절차를 조금 개선하는 것, 면접 질문을 더 정교하게 다듬는 것, 팀장의 갈등 조율 방식을 미세하게 바꾸는 것, 급여 오류를 줄이기 위해 검증 프로세스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 이처럼 소소한 수정 배포들이 쌓여 어느 순간 조직 전체의 1.0을 만든다. 큰 변화를 만든 사람으로 기록되는 건 대표일 수 있지만, 그 기반을 지탱하는 건 HR이 매일 다듬은 ver 0.1이다.
여기에 몇 가지 사례를 덧붙여보자. 채용에서 전형 전체를 뒤엎는 대신, 마지막 질문 하나를 “최근 1년 동안 가장 몰입했던 경험은 무엇인가요?”로 바꾼다. 이 작은 질문 하나가 지원자의 태도를 더 잘 드러내고, 채용의 정확도를 높인다. 온보딩도 마찬가지다. 방대한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지 않아도, 입사 첫날 팀 리더가 직접 30분 동안 “우리 팀이 일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적응 속도는 크게 달라진다. 성과관리 역시 대대적 개편이 필요하지 않다. 피드백 템플릿에 “다음 분기에 더 시도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라는 문항을 한 줄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구성원은 평가 대상에서 제안 주체로 바뀌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이 ver 0.1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도 인간은 점진적 변화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다이어트에서 하루 100kcal를 줄이는 것은 사소해 보인다. 공부에서 10분을 투자하는 것도 별 것 아니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100일, 1년이 쌓이면 그 차이는 압도적이다. HR의 일상적 대응과 미세한 개선도 마찬가지다. 순간에는 하찮아 보이지만, 누적되면 조직의 생존을 결정짓는 힘이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는 모든 변화가 단일한 원인에서가 아니라 무수한 작은 인연과 조건이 얽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결국 거대한 혁신(ver 1.0)이라고 부르는 것도, 작은 버전 업(ver 0.1)의 끊임없는 누적일 뿐이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이미 현실은 작은 축적들로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HR 스스로가 이 ver 0.1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거대한 변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은 크지만, 실제로는 소소한 대응의 연속이기에 스스로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바로 그 작은 버전 업이 조직의 생존을 지탱하는 기반이다. 매일 버텨내고, 대응하고, 쳐내는 일상들이 없었다면 회사는 이미 곳곳에서 균열을 드러냈을 것이다. 오히려 ver 0.1을 지속적으로 쌓아올리는 힘이야말로 HR이 존재감을 증명하는 진짜 방식이다.
ver 0.1은 티 나지 않는다. 하지만 0.1이 열 번 모이면 1.0이 되고, 1.0이 열 번 모이면 10.0이 된다. 결국 HR이 매일 만들어내는 자잘한 대응과 미세한 개선이 쌓여 조직의 근본적인 변화와 성과를 이끌어낸다. 눈에 잘 보이지 않고, 기록조차 남지 않는 순간들이 사실은 회사의 기반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 따라서 HR이 해야 할 일은 ‘내가 큰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는 자책이 아니다. ‘오늘도 0.1을 쌓았다’는 자기 인정이다. 그 인정이 없으면 HR은 쉽게 번아웃된다. 하지만 그 작은 의미를 인정할수록 오래 버틸 수 있고, 더 큰 변화를 기다릴 수 있다. 매번 새로운 제도나 프로젝트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작은 개선과 대응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HR의 진짜 역할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 작은 ver 0.1이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성숙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HR이나 팀장이 반드시 개입해야 했던 갈등이, 이제는 구성원들끼리 모여 스스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예전에는 HR이 억지로 시켜야만 가능했던 피드백이, 어느 날은 팀 채팅방에서 자발적으로 오가며 서로의 성장을 돕는 방식으로 바뀌어 있다. 심지어 과거에는 매출과 성과만 이야기하던 대표가, 어느 날 “우리 팀이 이렇게 버텨줘서 가능했다”라는 말을 꺼내기도 한다. HR이 매일 쌓아온 ver 0.1이 결국 대표의 언어와 조직의 행동에 스며든 것이다.
이렇듯 HR의 보람은 거대한 성과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대규모 업데이트가 아니라, 매일 소소하게 배포되는 수정 버전에서 온다. 채용 공고의 한 문구를 다듬는 일, 급여 계산에서 오류 가능성을 줄이는 검증 절차를 더하는 일, 구성원의 민원 메일에 조금 더 정성스러운 답을 남기는 일. 이 모든 것들이 ver 0.1이다. 티 나지 않지만, 이런 대응과 개선이 없다면 조직은 이미 곳곳에서 흔들렸을 것이다. 작은 ver 0.1이야말로 조직을 움직이는 힘이며, HR이 자리를 지켜낼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