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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취중잡담

지방은 산업/ 시대 변화에 따라가기도, 버티기도 버겁다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

by iid 이드

※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지인들이 익명으로 참여해, 술자리에서나 나눌 법한 솔직한 생각과 이야기를 가볍지만 진지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입니다.



“여긴 선택지가 없다”는 말, 그 담담함이 지방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지방에서 경력이 쌓인다고 해서 기회가 넓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시간과 함께 갈 수 있는 회사의 숫자가 더 줄어든다. 얼마 전 대전 출신의 디자이너와 술 한 잔 하는 자리에서 들은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서울로 올라온 이유는, 대전에서 오픈된 디자이너 공고는 다섯 곳이 전부예요.”

너무 담담하게 말하니 더 현실감 있게 꽂혔다. 생산직 실장님, 엔지니어, 회계, 마케팅까지 직군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여긴 그냥 선택지가 없어.” 이 말은 과장도, 비관도 아니다. 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느끼는 환경의 압축된 목소리다.


지난 1년 동안 지방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확실히 느낀 건, 지방의 위기가 단순히 한두 산업이 무너져서 생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산업·인구·상권·병원·학교·교통, 도시를 이루는 요소들이 동시에 약해지고 있고, 한 부분이 흔들리면 다른 부분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는 구조다. 이건 어느 하나만 고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방 도시들은 서서히 “여기에서 살아도 괜찮다”는 이유를 잃어가고 있고, 그 변화가 조용하지만 빠르게 쌓이고 있다. 이 상황을 지나치게 암울하게만 볼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 지방이 겪는 변화는 정책 몇 개로 단기간에 되돌릴 수 있는 유형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제조업의 터전, 조용히 힘을 잃어왔다: 조선업 회복은 예외였을 뿐

수도권에서 보면 “조선업 살아났다며? 지방 제조업도 다시 좋아지는 거 아냐?”라는 말이 종종 들린다. 하지만 지방 공단들을 직접 둘러보면 조선업 회복이 전체 흐름을 바꾸기엔 매우 제한적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지난 10여 년간 지방 제조업은 해외 이전, 자동화, 단가 압박, 글로벌 경쟁 심화에 밀려 조용히 체력을 잃어왔다. 예전에는 새벽 버스에서 생산직 인력이 쏟아져 나오고 공장 라인이 쉬지 않고 돌아갔지만, 지금은 공장 식당이 문을 닫고, 라인이 멈추고, 주차장은 넓기만 한 곳이 적지 않다.


포항, 광양, 여수, 서산, 군산, 창원 등 주요 제조업 도시들이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된 것은 이 지역 산업이 단기 경기 변동이 아니라 구조적 한계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이 지역들은 한때 국가 경제를 떠받쳤던 도시들이고, 지금의 변화는 단순한 불황이라기보다 산업 생태계의 축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대기업이 흔들리면 협력사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는 구조적 특성이다. 중소·중견기업들은 대기업 공급망에 묶여 있어, 한 곳이 흔들리면 수십~수백 개 기업이 동시에 타격을 입는다. 기존 공단이 만들어내던 고용 규모를 대체할 만한 새 산업의 고용력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지방 사람들은 국가 경제 성장과 별개로 일자리 선택지가 줄어들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진다. 이 흐름은 비관이라기보다 현실에 가까운 관찰이다.


제조업이 빠지면 서비스업이 도시를 떠받칠 줄 알았지만, 그마저도 불안정하다

제조업이 축소되면서 지방 도시는 자연스럽게 서비스업 중심 구조로 바뀌었다. 미용실, 카페, 편의점, 치킨집, 병원, 학원 같은 업종들이 도시 상권을 채우고 있고, 겉으로 보면 활기가 유지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서비스업은 도시를 유지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도시 전체를 다시 성장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생산 기반 없이 서비스업만 많은 도시들은 장기적으로 인구 유지가 쉽지 않다.


실제로 지방 중심 상권을 걸어보면 공실이 증가하고, 매출 변동이 심해지고, 인력난이 이어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가 상승과 인건비 부담도 있지만, 결국 모든 문제의 뿌리는 인구 감소다. 명절이나 주말에 지방 광역시 중심지를 가보면 예전처럼 젊은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많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가 눈에 더 띈다. 이는 지방 인구 구조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신호이며, 장기적으로 서비스업조차 안정적으로 버티기 어려운 환경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방 도시 전체가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지금 지방은 “서비스업 중심 도시”라기보다는 제조업이 빠진 자리를 서비스업이 임시로 채우고 있는 과도기적 구조에 더 가깝다. 이런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이후의 선택지를 판단하는 데 더 현실적이다.


지방의 인력난은 ‘채용난’이 아니라 청년층 자체가 사라진 ‘공급 절벽’이다

최근 지방 제조업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이건 단순히 채용이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청년층 자체가 지역에서 줄어드는 구조적 흐름이다. 많은 지역 대학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으며, 기계·전기·전자 같은 기술 계열 학과는 폐과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졸업생 대부분이 수도권으로 이동하며 지역 산업과 학교, 도시 인프라가 순차적으로 약해지고 있다.


이 공백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빠르게 채우고 있다. 제조업·건설업·물류·서비스업 전반에서 외국인 비중이 꾸준히 증가했고, 일부 산업은 외국인 없이는 운영이 어려운 단계까지 왔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인력난을 완화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는 한국 청년층이 생산직·기술직에서 더 멀어지는 흐름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도시의 복원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구가 줄면 학교가 줄고, 병원이 줄고, 교통이 줄고, 상권이 줄어든다. 이 흐름이 반복되면 기업의 채용난은 결국 도시 생태계 전체의 문제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상황은 비관이라기보다 현재 지방이 겪고 있는 전환기의 특징으로 보는 것이 맞다.


수도권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산업 구조 전환이 지방에 더 크게 영향을 준다

지방의 쇠퇴를 단순히 수도권 집중 탓으로만 돌리면 전체 흐름을 절반만 보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한국 제조업 구조 자체가 자동화·해외 생산 확대·디지털 전환·원가 경쟁 심화 속에서 전환 가능한 한계 지점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지방 제조업이 강점으로 삼아오던 산업 구조와 세계 시장의 흐름이 서로 어긋나기 시작하면, 그 영향은 도시 전체로 자연스럽게 전파된다.


새로운 산업이 지방에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스타트업, 테크기업, 서비스 기반 회사들이 지방 곳곳에 조금씩 생기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흡수하는 인력 규모는 과거 공단의 고용력과는 차이가 크다. 공단 하나가 5천~2만 명을 고용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현재 신산업의 인력 수요는 훨씬 작다. 고용의 규모가 달라지면 도시 전체를 지탱하는 구조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국가 GDP는 성장하고 있지만 지방 개인들의 체감 경제가 더 나빠지는 이유도 여기에서 나온다. 이 흐름은 비관이라기보다 한국 경제가 구조 전환을 겪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양면성이다.


도시별 체감 사례 — 이미 오래전부터 변화의 신호는 쌓이고 있었다

포항: 철강 쇠퇴 이후 상권 공실률 25%대까지 치솟으며 도심 공동화가 뚜렷함

군산: GM 철수·조선업 붕괴의 여파가 길게 이어져 상권이 회복되지 못함

여수: 석유화학 의존도가 높아 산업 변화의 충격이 자영업까지 확산됨

창원: 상남동 상권 붕괴는 제조업 도시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사례

울산: 산업 회복에도 인구가 계속 빠져나가며 중심 상권이 약해짐

부산: 광역시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인구순유출과 상권 침체가 동시에 발생함

대구: 동성로 공실 급증으로 “상권 붕괴의 상징”이 된 대표적 지역

광주: 충장로·상무지구 중심 상권이 장기간 침체 국면에 머무름

강원(원주·춘천·강릉): 관광도시도 인구 감소와 상권 공동화를 피하지 못함

서산·당진: 석유화학·철강 등 기간산업 부진이 지역경제 전반을 흔들고 있음

광양: 철강 경기 둔화로 산업 구조가 흔들리며 도심 활력이 급감함

익산: 상권 공동화와 인구 유출이 전국 최고 수준으로 나타남

김해: 제조업 약화 후 서비스업 중심 상권까지 악화되는 이중 타격

제주: 관광 중심 경제의 취약성이 폐업 급증과 인구 유출로 이어짐

충주·제천: 지방 제조업 둔화와 함께 지역 소비업종도 활력을 잃어가고 있음


지방의 변화는 축소가 아니라 ‘역할을 다시 정하는 과정’이다

지방에서 벌어지는 흐름은 단순한 쇠퇴라기보다, 도시가 맡아온 역할이 바뀌는 전환에 가깝다. 과거처럼 제조업 기반의 넓고 탄탄한 구조를 유지하긴 어렵지만, 도시가 줄어든다고 해서 반드시 의미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일부 도시는 작아지며 더 효율적으로 재편될 수 있고, 다른 도시는 지역 특성에 맞는 산업이나 생활 기반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예전의 지방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조건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현실적으로 정의하는 일이다.


앞으로 지방 도시에게 필요한 것은 인구를 무리하게 끌어오는 전략이 아니라, 남는 사람과 새로 오는 사람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규모의 경쟁이 아니라 질의 경쟁으로 전환하는 것이 지방의 다음 단계가 될 것이다. 작은 도시가 가진 장점—저렴한 생활비, 여유로운 공간, 느린 속도의 생활, 지역 커뮤니티—는 특정 세대나 직군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하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한국의 내수 기반은 결국 지방이 지탱한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수도권이 성장의 중심이 되는 흐름은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내수·제조·물류·에너지·농식품·관광 같은 실물 경제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지방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된다. 수도권이 아무리 커져도, 지방이 버텨야 나라 전체의 균형이 유지된다. 지방이 약해지면 수도권도 결국 비용과 부담을 떠안게 되고, 국가 단위의 내수 시장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의 변화는 지방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전체의 문제다.


술자리에서 “여긴 선택지가 없다”던 디자이너의 말은 지금의 현실이지만, 동시에 앞으로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방향을 보여준다. 선택지가 사라진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선택지를 다시 만들 공간으로 지방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방 도시의 미래는 성장과 쇠퇴의 이분법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기반으로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 작은 도시라도 자기 역할을 명확히 찾는 순간부터 회복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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