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
※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지인들이 익명으로 참여해, 술자리에서나 나눌 법한 솔직한 생각과 이야기를 가볍지만 진지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입니다.
모바일의 시작과 함께 마케터의 커리어를 쌓아갔다. 스타트업이 막 생겨나던 시기였고,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빠르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실험 자체가 성장 전략이었고, 어떤 시도를 해도 결과가 나왔다. 실패도 성과였고, 잘못된 결정조차 배움이 되던 분위기였다. 모바일 광고 상품이나 트래킹 툴 같은 건 거의 없던 상황이라, 적당한 데이터를 보여주기만 해도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지금처럼 복잡한 대시보드도 없었고, 어떤 지표가 정확한지 따지기보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었다. 시장은 빠르게 성장했고, 마케터는 그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과를 만들었다.
마케터들의 직무는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프로덕트 마케터, 콘텐츠 마케터, 퍼포먼스 마케터, 브랜드 마케터, 그로스 마케터 등 이름은 다양해졌지만, 결국 하는 일은 같았다. 돈을 쓰고, 그 돈으로 성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 모든 역할의 핵심은 예산 집행이었다. 그리고 그 예산은 원래 단기 숫자가 아니라 회사의 장기 방향을 정하는 기준이었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요즘 마케팅 회의실 풍경은 모두 비슷하다. 화려한 대시보드가 회의실 중앙을 채우고, 우리 모두는 ROI와 ROAS라는 지표를 숭배한다. 그리고 ‘최적화 중이다’, ‘데이터 정합성 이슈가 있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자주 대고 AARRR 단계별 action을 이야기한다.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논쟁은 숫자로 수렴한다. 필요한 이야기이고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15년 동안 이 바닥을 굴러본 내 눈에는, 그 대시보드만큼이나 새빨간 거짓말이 없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데이터’는 사실 예산에 대한 언급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가장 허울 좋은 방패일 뿐이다. "이 캠페인의 ROAS가 300%니까 성공입니다." 좋다. 하지만 그 300%를 달성하기 위해 브랜드의 가치와 장기적 신뢰를 얼마나 깎아 먹었는지 우리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당장 낼 수 있는 가장 쉬운 성과에만 집중하며 브랜드가 ‘싸구려 세일즈맨’처럼 보이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매출을 올려야 한다, 브랜드 가이드와 다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 없다 등등 논쟁하기 좋은 소재들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자랑하는 그 수많은 데이터와 AI 툴은 단지 ‘우리가 지금 얼마나 단기적인 노예인지’를 증명해주는 족쇄나 다름없다. 매체에서 주는 숫자이고, 그 숫자가 진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데이터·AI·ROI 중심 구조가 강화될수록 40대 마케터가 축적해온 경험 기반 인사이트는 평가 기준에서 밀려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15년의 경험으로 장기적인 브랜딩 예산의 필요성을 안다. 그러나 조직은 "왜 사람의 직관에 투자해야 하냐?", "측정할 수 있는 건가?"라고 묻는다. AI와 자동화 툴이 내놓는 숫자보다 경험이 비용 효율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실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보니 더 힘들 건 사실이다.
논리적으로 잘 설득해야 한다라고 하면 당신 말이 맞다. 최종 의사결정에서 효과적으로 작용된 적은 없지만. 40대 리더들은 '비용 효율이 낮은 중간 관리자'로 분류되면서도, 가장 무거운 '장기적인 책임'을 떠안고 있다. 아무도 예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우리 세대는 조용히 뒤로 밀려난다.
우리는 지금 '비용 효율'이라는 칼날 위에 서 있다. 구조조정의 다른 면을 매일 회의실에서 보고 있는 거다. 결국 이는 예산을 단기 숫자로만 판단하는 구조에서, 예산을 결정하는 사람과 예산의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이 서로 다르게 작동하면서 생기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다.
결국 그 칼날은 결국 가장 효율이 낮다고 판단되는 우리 40대를 향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 현실을 분노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의미 없다. 이것이 2025년 마케팅 업계의 진실이다. 화려한 대시보드 뒤에 숨겨진 예산과 책임의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 균열은 실제 업무 현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구조적인 문제다. 단기 숫자를 우선시하는 조직일수록 판단의 근거는 데이터에 맡기고, 그 데이터가 만들어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사람에게 전가된다. 특히 40대는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결과를 관리해야 하지만, 그 경험 자체는 의사결정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모순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균열은 단기 지표 중심 구조에서 장기 전략을 맡아야 하는 사람에게만 책임이 몰리는 현실적인 문제다. 기업은 빠른 성과를 요구하지만, 장기 관점은 쉽게 무시된다. 우리는 전략과 단기 성과를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이 과정에서 40대 리더들은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지만, 조직은 그 균형을 ‘효율이 낮다’는 말로 평가하곤 한다. 그렇다고 이 현실을 거부한다고 해서 구조가 바뀌지는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나 체념이 아니라, 어떤 책임이 실제로 우리 몫인지 냉정하게 구분해 받아들이는 태도다. 결국 이 자리는 단단하지만은 않지만, 쉽게 무너질 만큼 약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버티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