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지인들이 익명으로 참여해, 술자리에서나 나눌 법한 솔직한 생각과 이야기를 가볍지만 진지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입니다.
문득 어린 시절 본 만화가 자꾸만 떠오른다. 은하철도 999. 철이라는 소년이 메텔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여인과 함께 기계인간이 되기 위해 은하철도를 타고 떠나는 이야기.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도 이 만화는 단순한 SF 모험담 이상의 무언가를 던져줬다. 뭔가 불편하고, 뭔가 씁쓸하고,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느낌.
그 시절엔 그냥 막연히 느꼈던 것들이었다. 왜 기계인간들은 인간을 사냥하는지, 왜 가난한 사람들은 인간으로밖에 못 사는지, 왜 철이 엄마는 기계인간의 총에 맞아 죽어야 했는지. 답은 없었지만 질문은 남았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어른이 된 지금, 다른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다. 그런데 요즘, 이 만화가 자꾸 생각난다. 그것도 점점 더 자주. 뉴스를 볼 때도, 출퇴근길 지하철에서도, 누군가와 AI 이야기를 나눌 때도. 은하철도 999의 어떤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은하철도 999의 세계관은 이렇다. 인간 그대로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영생을 위해 자신의 몸을 기계로 개조한다. 하층민은 인간이고, 엘리트와 귀족은 기계인간이다. 분명 그들도 원래는 인간이었을 텐데, 기계 몸을 얻고 나면 인간들을 차별하고 탄압한다. 심지어 사냥감으로 여기기도 한다.
메인 테마가 AI는 아니다. 로봇과 안드로이드가 중심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들은 지금 우리가 AI 시대를 맞이하며 마주하는 것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발전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999호는 수많은 별을 거쳐간다. 각 행성마다 다른 모습, 다른 문제를 보여주는데, 이게 묘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비춰주는 거울 같다.
어느 행성에선 자유가 최고의 가치였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지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면 안 된다는 원칙. 얼핏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결국 그 '자유'라는 게 누구의 기준인지, 어디까지가 침해인지를 두고 끊임없이 충돌한다. 문제는 그 경계를 정하는 권력이 결국 강자에게 있다는 거다. 약자의 자유는 쉽게 '침해'로 규정되지만, 강자의 침해는 '자유'로 포장된다. 지금 우리가 표현의 자유니 혐오 표현이니 하며 싸우는 것, 누군가의 생존권이 누군가의 편의와 충돌할 때 어느 쪽이 우선시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행성에선 합성품이 일반적이고, 진짜 음식은 부자들만 먹을 수 있었다. 가격이 몇 배씩 차이 났다. 부자들만 진짜를 먹을 수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합성품으로 배를 채운다. 맛의 차이보다 더 잔인한 건, 그게 점점 당연해진다는 거다. 합성품을 먹고 자란 세대는 진짜 맛을 모른다. 그러니 박탈감도 없다. 요즘 유기농이니 프리미엄이니 하는 식품 가격 보면 50년 전 만화 속 미래가 이미 도착한 게 아닌가 싶다. 건강하게 먹을 권리마저 계층에 따라 나뉘고, 그게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어간다. 더 무서운 건 다음 세대는 이게 원래 그런 거라고 받아들인다는 것.
같은 우주를 여행하면서도, 기계인간들과 인간들이 느끼는 시간은 달랐다. 영생을 얻은 기계인간들에겐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그저 흘러가는 시간일 뿐이지만, 유한한 인간들에겐 매 순간이 절박하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사회도 비슷하다. 누군가에겐 평생이 걸린 문제가, 다른 누군가에겐 그냥 스쳐 지나가는 뉴스거리일 뿐이다. 시간의 밀도가 다르다. 여유 있는 사람들에겐 천천히 흐르지만, 절박한 사람들에겐 미친 듯이 빨리 흐른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누군가는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뛴다.
기계인간이 되려면 돈이 필요했다. 많은 이들이 빚을 내서 기계 몸을 샀다. 그렇게 영생을 얻었지만, 그 영생이 빚을 갚기 위한 노동으로만 채워진다면 그게 과연 원했던 삶일까. 감정도, 피로도 느끼지 못하는 기계 몸으로 끝없이 일만 한다. 어쩌면 그게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고통도 없으니까. 학자금 대출, 전세대출, 신용대출로 얽힌 채 월급날만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우리는 아직 고통을 느끼는데, 그게 나은 건지 더 불행한 건지 모르겠다.
기계가 모든 일을 대신하는 행성도 있었다. 인간들은 움직일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편하긴 한데, 인간으로서의 기능은 다 퇴화해버렸다. 처음엔 다들 좋아했을 거다. 편하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움직이는 게 귀찮아지고, 그다음엔 움직일 수가 없어진다. 근육이 퇴화해서가 아니라, 움직여야 할 이유를 잃어버려서. AI가 다 해줄 거라며 점점 더 많은 걸 맡기고 있는 지금, 우리도 어쩌면 천천히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근육, 판단하는 근육, 선택하는 근육들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행성에선 누군가 좋은 의도로 개입했다가 재앙을 불러왔다. 자신의 기준으로 본 '좋음'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면서 말이다. 묻지도 않고, 동의도 구하지 않고. 선의로 포장된 독선, 동의 없이 강요되는 '발전', 피해자의 목소리는 묻히고 가해자는 영웅인 줄 아는 구조.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효율이라는 명분으로, 발전이라는 깃발 아래 누군가의 삶터가 사라지는 걸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다.
전쟁을 하는 행성도 있었다. 기계인간 전사들은 죽지 않으니까 계속 싸운다. 전쟁이 왜 시작됐는지도 잊은 채로. 그냥 싸우는 게 프로그램되어 있으니까.원래 목적은 사라지고 시스템만 돌아간다. 누구를 위한 건지, 왜 하는 건지도 모른 채.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이 그렇지 않나. 회사에서, 사회에서, 원래 왜 이렇게 하기로 했는지도 모르는 규칙들을 그냥 따르면서 산다. 관성으로. 누군가 물어보면 원래 그랬다고, 다들 그렇게 한다고 대답한다. 마치 프로그램된 것처럼.
기계인간들은 영생을 얻었다.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피가 흐르는 인간을 부러워한다. 따뜻함, 감정, 유한함. 기계가 되면서 버린 것들이 사실은 인간다움의 핵심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닫는 거다. 철이는 긴 여정 끝에 안드로메다의 프로메슘 성에 도착한다. 거기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기계 몸을 얻을 기회를 맞지만, 결국 깨닫는다. 인간성을 잃은 영생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그래서 그는 선택한다. 유한하지만 따뜻한 인간으로 사는 것을.
은하철도 999가 1977년에 연재를 시작했다는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무려 50년 뒤의 현재를 이렇게 정확히 예측한 것처럼 보이다니. 인간성의 상실, 극심한 양극화, 기술에 대한 맹목적 추종.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날로그를 그리워하고, 진짜를 갈망하는 아이러니. 하지만 결국 선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우리의 모습까지.
작가 마츠모토 레이지는 어쩌면 그냥 인간 본성을 꿰뚫어본 것뿐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이게 모든 걸 해결해줄 거라 믿고, 현재의 문제들은 일단 덮어둔다. 산업혁명 때도, 인터넷 혁명 때도, 그랬듯이.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은하철도 999의 어느 행성쯤에 와 있을까. 자유의 경계를 두고 싸우는 행성? 합성품만 먹는 빈곤의 행성? 빚만 갚는 행성? 아니면 이미 모든 걸 기계에 맡기고 퇴화하는 중? 아마 전부일 것이다. 동시다발적으로. AI가 모든 걱정을 해결해줄 거라 믿으며, 우리는 고용률 감소와 실업자 증가에 대해선 눈을 감는다. 중소기업들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도 특정 기업, 특정 계층에만 부가 집중되는 구조는 그대로 둔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효율'이라는 명분으로.
기계인간들이 영생을 얻고도 인간을 부러워했듯, 우리도 어쩌면 나중에 깨닫게 될지 모른다. 편리함을 얻는 대신 잃어버린 것들이 사실은 더 소중했다는 걸. 그때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별을 한참 지나온 뒤일 수도 있다. 은하철도 999는 계속 달린다. 우리를 태우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다음 정거장이 더 나을 거라 믿으며. 철이처럼 용기 있게 내릴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끝까지 타고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