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특정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도, 정답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문의 : AI 클론 채팅, 자문/컨설팅 문의 )
여전히 많은 회사들이 짧은 근속 이력을 보면 눈살을 찌푸린다. 면접관이 이직 횟수 많은 이력서를 보며 이 사람 금방 나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틀린 판단이 아니다. 나도 그 관점 자체는 존중한다.
이유도 꽤 합리적이다. 사람이 조직에 합류해서 온보딩을 마치고, 업무에 익숙해지고, 실질적으로 투자 비용 이상의 기여를 하는 구간까지는 긴 리드타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계속 자리를 지켜주는 게, 새 사람을 뽑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이다. 단순히 온보딩 비용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팀워크, 조직문화, 암묵지 같은 눈에 안 보이는 것들까지 포함해서. 오래 함께한 사람이 조직에 주는 안정감과 신뢰는 숫자로 환산하기 어려운 가치가 있었으니까. 누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저 팀이랑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은 문서에 남지 않고 사람에게 남는다. 이런 논리는 오랫동안 꽤 설득력 있게 작동해왔고,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2026년이다. 그 논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IT 시대로 전환되면서 채용 시장은 이미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공채 중심에서 경력직·직무별·상시 채용 구조로 바뀌었고, 신입보다 검증된 전문가를 데려오는 게 더 낫다는 공감대가 빠르게 형성됐다. 그 과정에서 이미 장기근속의 전제 중 하나였던 한 회사에서 천천히 성장한다는 모델은 슬금슬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AI가 등장하면서 이 논리에 본격적인 균열이 생겼다.
온보딩 코스트라는 게 결국 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업무를 어떻게 하는지를 익히는 시간인데, AI가 그 과정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켜버렸다. 누구든 AI를 잘 쓰면 웬만한 직무에서 평균 이상의 결과물을 꽤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다. 전략적 인사이트나 깊은 도메인 판단이 필요한 영역은 여전히 별개지만, 실행 레벨의 상당 부분은 AI가 커버한다. 인수인계 기간, 맥락 파악, 관계 재형성처럼 예전에는 시간이 꽤 걸리던 것들도 AI 기반의 문서화와 정보 정리로 빠르게 압축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예전에는 새 사람이 조직에 적응하는 데 6개월에서 1년이 필요하다고 봤다면, 지금은 그 기간이 눈에 띄게 짧아지고 있다. 물론 관계를 쌓고 신뢰를 형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업무 자체의 러닝커브는 AI가 상당 부분 평탄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도 AI로 빠르게 맥락을 파악하고, 기존 문서와 데이터를 정리해 단기간에 실무에 뛰어들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건 단순히 기술의 변화가 아니다. 오래 있어야 제 몫을 한다는 전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이쯤에서 뭔가 이상하지 않나. AI가 온보딩 코스트를 낮추고, 인력 교체에 따른 스위칭 코스트도 상당 부분 상쇄해준다면, 장기근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회사 입장에서 새 사람을 빠르게 셋업할 수 있다면, 기존 사람을 오래 붙잡아두는 것에 예전만큼의 프리미엄이 붙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사람을 데려와서 빠르게 셋업하고 쓰는 게 더 유연하고 효율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직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이 AI로 상당 부분 대체되거나 범용화된다면, 굳이 그 조직에 오래 머물러야 할 이유가 예전보다 줄어든다. 어차피 다른 곳에 가도 AI를 통해 빠르게 맥락을 익히고 기여할 수 있다면, 환경을 바꾸는 것에 대한 심리적·실질적 장벽이 낮아진다. 서로에게 장기 관계의 실익이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또 다른 흐름들이 겹친다. AI로 경영 환경이 빠르게 바뀌면서 회사들도 내부 인력·조직·사업 구조를 훨씬 자주, 유연하게 바꾸고 있다. 분기마다 전략이 바뀌고, 그때마다 팀이 해체되거나 새로 만들어진다. 글로벌하게 레이오프가 일상화됐고, 주기적인 인력 쇄신과 조직 개편이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된다. 직접 고용보다 프리랜서나 긱 이코노미 형태의 유연한 인력 운영을 선호하는 경향까지 더해지면, 고용 관계 자체가 점점 단기 계약에 가까워지고 있다. 회사가 유연함을 택한 순간, 장기 헌신을 요구할 명분도 함께 희석됐다. 이 자체가 패러독스다.
회사도 개인도 성장 단계마다 사실상 다른 존재가 된다. 시리즈 A 스타트업과 시리즈 C 스타트업은 이름만 같지 필요한 역량도, 조직 문화도, 요구하는 역할도 완전히 다르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도 요즘처럼 세상이 빠르게 바뀌는 환경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2년 전과 지금이 전혀 다른 회사처럼 돌아가고 있는 조직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렇게 보면 장기근속이란 결국 매 성장 단계마다 그 회사가 새로 요구하는 역할을 계속 수행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스테이지가 바뀔 때마다 사실상 다시 채용 심사를 통과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초기 스타트업에서부터 함께하며 모든 성장 단계를 소화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역량이 어느 한 단계에 머물지 않고 계속 앞서 있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정도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조직에만 머무르는 게 오히려 그 사람에게 손해일 가능성이 높다. 시장이 그 사람을 더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 테니까.
결국 장기근속을 요구한다는 건 매 스테이지마다 재입사 수준의 적합성을 갖춘 사람이 계속 있어주길 바라는 것과 같다. 그런 기대가 현실적인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왜 이 기준은 아직도 살아있는 걸까. 내 생각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예측 가능성과 주도권이다.
아무리 AI가 도입되고 자동화가 진행됐다 해도, 사람이 갑자기 빠지면 사업 계획에 구멍이 생긴다. 당장 대체를 해도 그 공백을 메우는 데 시간과 수고가 들고, 그사이 계획했던 것들이 틀어진다. 채용 공고를 올리고, 면접을 보고, 온보딩을 시키는 그 시간 동안 사업은 멈추지 않는다. 구멍난 채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회사는 인력을 예측 가능한 자원으로 다루고 싶어 한다. 내가 필요로 하는 시점까지는 있어줬으면 하고, 떠날 시점도 내가 결정하고 싶다는 거다. 사업이라는 게 결국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고, 그 사람이 언제 빠질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은 경영 입장에서 꽤 큰 리스크다. 인력 계획을 수립하고 사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이건 충분히 이해되는 욕구다. 문제는 그 욕구를 채용 기준처럼 개인에게 전가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가 더 솔직한 얘기인데, 주도권 문제다. 태양의 노래 가사처럼 나는 바람 피워도 되는데 너는 바람피지 말라는 것과 꽤 비슷한 구조다. 회사는 경영 전략이나 환경 변화에 따라 인력을 줄이거나 조직을 바꾸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그건 불가피한 경영 판단이다. 그런데 직원이 먼저 나가겠다고 하면 그건 신뢰 문제나 배신이 된다. 같은 이탈인데 방향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진다. 회사가 사람을 내보내는 건 구조조정이고, 사람이 회사를 나가는 건 이직이 된다. 같은 헤어짐인데 누가 먼저 말하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거다. 레이오프를 단행한 회사가 몇 달 뒤 채용 공고에 장기근속 우대라는 문구를 버젓이 올리는 장면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력에 대한 의사결정의 주도권은 회사에게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는 거다. 이 전제가 유지되는 한, 회사가 먼저 관계를 끊는 건 경영이고 직원이 먼저 끊으려 하면 태도 문제가 된다.
결국 두 가지 모두 회사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욕구처럼 보이지만,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치르는 비용을 개인에게만 전가하고 있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장기근속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다. 예측 가능성과 주도권에 대한 욕구는 조직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으니까. 다만 그 기준을 그대로 들이대는 게 여전히 합리적인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장기근속을 요구하거나 그것 자체를 미덕으로 여기는 건 어쩌면 일종의 고집일 수 있다. 역량이 이 단계에 맞는지, 포지션이 지금의 조직에 필요한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그냥 오래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기준으로 삼는 거다. 그런데 그 고집의 독은 회사와 개인 양쪽에 동시에 퍼진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미 역량이 현재 단계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실제로 필요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고, 조직이 변화해야 할 타이밍을 놓친다. 개인 입장에서는 성장이 멈춘 환경에서 오래 버티다가 정작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잃는다. 서로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개인 입장에서는 한 회사에 대한 충성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여가 나에게도 의미 있는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게 더 현실적이다. 회사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래 있어준 사람을 우대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단계에 맞는 사람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는 게 조직에도 훨씬 이롭다.
이 모순을 모른 척한 채 관성처럼 이직 횟수를 따지는 회사라면, 어쩌면 그 회사야말로 시대 변화를 가장 뒤늦게 읽고 있는 조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대가는 생각보다 조용히, 그리고 넓게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