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d] 평가제도 수립 케이스, 그 과정의 기록 공유

이드의 HR 커피챗 시리즈

by iid 이드

※ 내가 쓰는 글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특정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도, 정답을 말하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문의 : AI 클론 채팅, 자문/컨설팅 문의 )


의외로 HR 컨설팅 요청 중 가장 많은 것이 평가보상 제도 세팅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회사가 비슷한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평가보상 제도가 있으면 직원들이 그 제도에 맞춰서 알아서 잘 일할 거라는 기대. 제도가 먼저고, 행동 변화가 뒤따른다는 믿음. 근데 이게 사실 선후가 완전히 바뀐 소망이다. 제도는 이미 바뀐 행동을 담는 그릇이지, 행동을 바꿔주는 마법의 도구가 아니다.


그래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제도 자체는 제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을 하면 대부분 고개를 갸웃한다. 평가제도라고 하면 정교한 KPI 설계, 잘 짜여진 OKR 구조, 전사-팀-개인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성과 연계 체계 같은 것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것들은 복잡하고 어렵다. 하지만 그건 평가제도의 '부산물'이지 '본질'이 아니다.


평가제도의 본질은 결국 두 가지다. 회사에서 성과란 뭔가, 그리고 그 성과를 어떻게 들여다보고 이야기할 건가. 이 두 가지가 명확하게 서 있으면, 나머지 껍데기들 — 양식이든 프로세스든 점수 체계든 — 은 책 한 권 펼치거나 AI한테 물어보면 금방 나온다. 진짜 어려운 건 그 본질을 세우는 과정이다.




합류, 그리고 현실 파악

과거 A회사 입사 당시 대표님이 내게 던진 요청은 세 가지였다. 시니어·리드급 채용과 파이프라인 확보, 레벨링 세팅, 그리고 평가보상제도 수립.


앞의 두 가지를 간단히 얘기하면, 시니어·리드급 채용은 오랜만에 내가 직접 발로 뛰면서 아웃바운드를 돌려 비교적 빠르게 세팅했다. 시니어 채용은 파이프라인이 생명인데, 당시엔 그 파이프라인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직접 후보자를 찾고 연락하고 만나는 과정을 빠르게 돌렸다. 레벨링은 당시 내부 인력이 주니어 중심이라, 미들·시니어부터 데려와야 기준선이 잡힌다고 판단했고 채용팀 구축부터 먼저 진행했다. 레벨이라는 건 결국 비교 대상이 있어야 의미가 생기는 거니까. 주니어만 있는 조직에서 레벨을 나누면 그건 연차 순서 정리밖에 안 된다.


세 가지 미션 중 채용과 레벨링은 비교적 실행의 영역이었다면, 평가보상제도는 성격이 좀 달랐다. 만드는 것 자체보다 그걸 조직이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식부터 만들지는 않았다. 먼저 들여다본 건 세 가지였다. 이 회사에서 실제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사업의 방향과 전략은 뭔지, 그리고 여기서 일 잘한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누구이고 왜 그런 평가를 받는지.


당시 회사는 굉장히 애자일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다. 일단 해보자 하면 직원들이 와 하고 달려가서 해보고, 잘 되면 조직을 만들고, 안 되면 접는 식이었다. 주니어 중심의 구성이다 보니 업무의 체계화나 전문성보다는 빠르게, 열정적으로, 직무 구분 없이 일단 뛰는 게 미덕이었다. 자연스럽게 우수인재의 기준도 열정적이고, 빠르고, 회사 요구에 불만 없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전문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기엔 시니어도 없었고, 일의 난이도를 따져볼 견적 자체가 없었으니까.


솔직히 이 단계가 나쁜 건 아니다. 시장이 아직 정리되기 전이고 사업이 유동적일 때는 이런 역량이 오히려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스타트업 초기에 체계부터 잡겠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하지만 내가 합류한 시점에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시장의 경계가 잡히기 시작했고, 경쟁도 치열해졌고, 일의 난이도와 복잡도가 눈에 띄게 올라가고 있었다. 더 이상 열정과 속도만으로 해결되는 국면이 아니었다. 일의 질을 이야기해야 할 타이밍이 온 거다.




1년 6개월, 조직이 바뀌는 순서

그래서 나는 꽤 긴 시간을 잡았다. 1년 6개월. 제도를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뀌는 시간이다. 내가 세운 3단계 플랜은 다음과 같다.

1단계 — 일 잘한다는 것의 의미를 바꾼다

2단계 — 사람이 아닌 일로 평가받는 구조를 만든다

3단계 — 평가 결과가 보상과 연결된다


1단계: "열심히"에서 "잘"로

제도보다 먼저 손대야 하는 건 '성과'라는 단어의 정의였다. 아무리 정교한 평가 시스템을 깔아놔도, 사람들 머릿속에 일 잘하는 것이 곧 열심히 오래 앉아있는 것이라는 공식이 박혀 있으면 소용없다. 평가표만 바뀌고 실제 일하는 방식은 그대로니까.


이 단계에서 한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직무를 구분하고, 조직을 체계화하고, 일의 구조를 잡았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시니어와 리더들의 합류가 함께 이루어졌다. 판을 짜려면 판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이제 그냥 열심히가 아니라 '잘'이 중요해졌다. 과정도 물론 보지만, 퍼포먼스와 결과가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1년 6개월 전체 과정에서 이 1단계가 제일 힘들었다. 리더나 프로세스를 바꾸는 건 구조의 문제라서 설계하고 실행하면 어느 정도 따라오는데,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건 차원이 다르다.


가장 큰 저항은 과거의 우수인재들에게서 나왔다. 그동안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빠르게 뛰어서 핵심인재로 인정받던 사람들이, 새로운 성과 정의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이건 우리 회사가 지금까지 성장해온 방식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본인들이 틀린 게 아니라 회사가 갑자기 기준을 바꾼 거라는 논리였다. 사실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실제로 기준이 바뀐 거니까. 다만 시장이 바뀌었고 사업이 바뀌었고, 그래서 성과의 정의도 바뀌어야 했을 뿐이다.


일하는 태도의 변경도 쉽지 않았다. 어제까지 직무 구분 없이 뭐든 빠르게 치고 나가면 칭찬받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자기 직무의 전문성 안에서 깊이 있게 일하라고 하면 오히려 답답해했다. 오늘 정리해서 내일부터 시행 같은 게 통하지 않는다. 리더들이 먼저 이 개념을 체화해야 하고, 리더들이 팀원들에게 실제로 그렇게 일하도록 매니징해야 하고, 회사는 지속적으로 같은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한 번 말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반복되어야 체질이 바뀐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우수인재가 더 이상 우수인재가 아니게 되기도 하고, 그에 따른 불만, 이탈, 때로는 갈등도 생긴다. 제도 전환의 필연적인 비용이다. 피할 수 없다면 미리 준비하고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



2단계: 사람이 아닌 일로 평가받기

1단계에서 성과의 정의를 바꿨다면, 2단계는 그 성과를 실제로 들여다보고 이야기하는 구조를 만드는 단계다.


당시 회사의 근본적인 문제는 평가라는 행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리더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업무 수행의 선임 정도 역할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의사결정과 업무 지시가 대표로부터 직접 내려왔기 때문이다. 애자일하게 빠르게 움직이던 시절엔 그게 효율적이었다. 대표가 직접 판을 보고 직접 지시하고 직접 평가했으니까. 자연스럽게 모든 성과의 인정과 평가는 대표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구성원 입장에서는 내가 한 일이 어땠느냐보다, 대표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전부였다. 일이 아니라 사람이 평가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조직이 커지면 대표에게도 한계가 온다. 모든 직무의 전문가일 수 없고, 모든 구성원의 업무를 하나하나 들여다볼 수도 없다. 개발자의 코드 퀄리티를, 디자이너의 작업물 수준을, 마케터의 캠페인 효과를 대표 혼자 판단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2단계의 핵심은 이 구조를 뒤집는 것이었다. 조직의 위계와 구조 안에서, 리더가 팀원의 일을 리뷰하고, 팀원은 그 리뷰를 받는 시스템과 문화를 만드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중심으로 대화하는 방식을 조직에 심는 것이다.


다만 평가를 한 번도 안 해본 리더에게 갑자기 등급을 매기라고 하면, 그건 리더한테도 팀원한테도 폭탄이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일부러 평가 등급을 두지 않았다. 등급 없이, 리더가 팀원의 업무 과정과 결과를 리뷰하는 것 자체만 연습시켰다. 리더 입장에서는 누군가의 성과를 말로 정리하고 피드백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뭘 어떻게 짚어줘야 하는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 부정적인 피드백은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등급이라는 결과의 부담 없이, 순수하게 리뷰하고 피드백하는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한 거다.


팀원 입장에서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동안 대표의 눈에 들면 해결되던 것이, 이제는 내 리더가 내 일을 들여다보고 이야기하는 상황이 된다. 리더에게 리뷰를 받고, 그 리뷰를 수용하는 것.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등급이라는 날카로운 결과 없이, 리뷰라는 과정 자체에 먼저 익숙해지는 시간을 일부러 둔 거다. 아무리 야근하고 아무리 열정적으로 회사 행사에 참여했다 해도, 그건 개인의 영역이지 퍼포먼스는 아니다. 이 구분이 조직 안에 자리 잡아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3단계: 평가가 내 연봉이 되는 순간

2단계에서 리뷰에 익숙해졌다면, 3단계는 거기에 등급과 보상이라는 무게를 얹는 단계다.


먼저 평가 등급 체계를 도입했다. 2단계에서 일부러 빼뒀던 등급을 이제 붙인 거다. 리더들이 리뷰 경험을 충분히 쌓은 상태에서 등급을 주게 했기 때문에, 근거 없이 감으로 찍는 상황은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체 보상 재원 안에서 등급별 인상 기준과 정책을 적용했다.


이전에는 대표와의 면담 결과에 따라 개인별 조정액이 제각각이었다. 같은 일을 해도 면담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 이제는 등급에 따라 정책이 적용된다. S등급은 몇 퍼센트, A등급은 몇 퍼센트, 이런 식의 기준이 생긴 거다.


물론 첫 회차부터 완벽하게 돌아갈 리 없다. 경영진과 HR이 함께 캘리브레이션 세션을 진행하면서 리더별 등급 분포를 비교했다. 유독 등급이 한쪽으로 쏠리는 리더는 없는지, 기준 편차가 큰 리더는 없는지를 들여다보고 조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2단계에서의 리뷰 연습이 리더 개인의 피드백 역량을 키우는 훈련이었다면, 3단계의 캘리브레이션은 등급과 보상이 걸린 상태에서 조직 전체의 공정성을 맞추는 작업이다. 무게감이 다르다.


막상 평가 결과가 보상에 직결되는 순간, 구성원들의 눈높이는 완전히 달라진다. 내 인사 평가 좀 낮아도 뭐 그러려니 하던 사람도, 그게 내 연봉 인상률을 결정한다고 하면 갑자기 모든 기준을 뜯어보기 시작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돈이 걸린 문제니까.


그래서 3단계부터가 진짜 시스템과 프로세스의 영역이 되는 거다. 완전무결한 평가보상 제도는 이 세상에 없다. 100명이면 100명 다 납득하는 시스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근로자에게 아주 밀접하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보상이 걸려 있는 이상, 최소한의 객관성과 기준은 갖춰야 한다. 왜 내가 이 등급을 받았는지, 그 근거가 뭔지를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가 등급 자체에 불만이 있을 수는 있다. 그건 주관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평가의 과정과 기준이 불투명하다면, 그건 불만이 아니라 불신이 된다. 불만은 관리할 수 있지만 불신은 제도 자체를 무너뜨린다.



구석기에서 철기까지, 1년 6개월

1년 6개월이 긴 시간 같지만, 사실 이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돌아보면 구석기에서 철기시대로 넘어온 수준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구성원들이 매일 일해오던 방식, 성과를 인정받던 기준, 리더와의 관계, 보상의 논리까지 —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걸 1년 6개월 안에 했다는 건 오히려 굉장히 압축적이고 급속한 변화였다.


돌이켜보면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이 한 일은 제도를 설계한 게 아니라 설득이었다. 왜 바뀌어야 하는지, 뭐가 달라지는 건지, 나한테 어떤 영향이 있는 건지. 같은 이야기를 사람마다 다른 언어로, 다른 맥락에서, 수십 번 반복했다. 경영진에게는 사업 성장과 연결해서 이야기했고, 리더들에게는 팀 운영의 실질적인 변화로 풀었고, 구성원들에게는 자신의 커리어와 보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연결했다. 한 번의 타운홀이나 한 장의 공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제도 변화의 80%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제도라는 건 한 번 만들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이후부터가 진짜다. 첫 회차를 돌려보면 예상 못한 구멍이 보이고, 리더마다 운영 편차가 생기고, 구성원들의 새로운 불만이 올라온다. 그걸 하나하나 메꾸고 조정하면서 더 정교화하고 고도화해야 하며, 버전 업 작업도 계속되어야 한다. 소프트웨어처럼 제도도 v1.0에서 멈추면 금방 낡는다. 사업이 바뀌고, 조직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니까 제도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이 경험에서 남은 것

이 글을 쓴 건 내가 이런 평가제도를 만들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솔직히 완벽하지도 않았다. 내가 공유하고 싶었던 건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마주했던 고민들과 부딪혔던 현실들이다. 평가제도를 세팅한다는 건 결국 이 회사에서 성과란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정의하고, 그 정의를 조직 전체가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이다. 양식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성과라는 개념 자체를 조직 안에 구축하는 일이었다.


성과가 뭔지에 대한 합의 없이 평가표부터 만들면, 각자 제멋대로 채운다. 리뷰하고 리뷰받는 문화 없이 등급부터 주면, 그건 평가가 아니라 찍기가 된다. 공정성의 기반 없이 보상을 연동하면, 매년 돌아오는 불만 접수 시즌이 된다.


지금 돌아보면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실제로 한 일은 평가 시스템을 만든 게 아니라, 조직이 성과를 대하는 태도를 바꾼 거였다. 양식은 마지막에 얹은 것일 뿐이다. 그 양식 아래에 깔린 수많은 대화와 설득과 갈등과 조정의 시간이 진짜 제도의 뼈대가 됐다.


평가제도는 결국 조직이 일을 들여다보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오래 걸리고, 그래서 중간에 이게 맞나 싶은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 과정의 고민들을 공유하는 것이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면 좋겠다. 정답을 드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혼자만 이렇게 힘든 건 아니라는 것쯤은 전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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