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의 짧은 HR 생각
[Edited by iid the HRer]
※ 내가 쓰는 글들은 아주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이니 편하게 봐주면 좋겠다.
얼마 전 좋아하는 후배를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 중 남기고 싶은 내용이 있어 글을 쓴다.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이를 뭐라고 명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후보는 '스타트업 증후군', '부담경계', '성장 금단증상', '빨리빨리 병'들인데 대충 합쳐서 '성장 중독'이라고 해보겠다. 이번 글도 지극히 나의 개인적 소견에 따른 거니 다른 견해들이 너무도 많을 것을 알지만 그냥 편하게 봐주면 좋겠다.
스타트업에 조인해서 적어도 2~3년 이상 근무를 한 사람에 해당할 수 있다. '성장 중독'은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유지했던 텐션/pace가 변경(보통은 낮아짐)됨에 따라 그 간극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불안해하는 증상을 말한다. 보통은 이직과정에서 많이 느끼는데 같은 회사의 성장과정에서도 느낄 수 있다.
스타트업 초반 스테이지를 경험한 이들은 체계 없음/ R&R 없음/ 시스템 없음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본인을 갈아 넣어야 할 경우가 많다. 갈아넣음에 대해선 여러 요소가 있을 수 있지만 일단은 시간과 체력이 제일 기본적이다.
출근을 했지만 퇴근에 대해서는 기약 없이 무한 야근
퇴근했지만 주말/새벽에도 슬랙 메신저 대응하기
업무 한 개 완료해도 쉬지 못하고 또 다른 업무들 무한 쳐내기
주변 동료가 일 년 내에 수십 명이 들어오기
회사 성장에 따라 일 년에 한 번씩 오피스 확장 이사하기
HR제도와 회사 정책이 매달매달 변경되고 새로 생기기
내가 담당하는 영역의 지표가 내가 하는 만큼 가파르게 상승하기
위의 현상들은 지극히 개인단위에서 본 모습들이다. '급격한 성장'을 굳이 스타트업이라는 회사 관점에서 보지 않은 것은 '성장 중독'은 개인들에게만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회사는 산업군, BM, 대표의 철학 그리고 성장 스테이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그것은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도리어 제때 선택/결정을 하지 못하게 되면 또 다른 질병 혹은 증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런 텐션/페이스로 일을 하게 되면 분명 번아웃도 오고 힘들기도 하다. 하지만 이겨내고 나면 난 이 것도 이겨냈어 그리고 그에 따른 보람/자긍심이 생기게 된다. 물론 이 것은 너무도 대단한 것이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스타트업의 도전정신이자 그릿이라고 할 수도 있다. 보통 일반 사람이 일반적인 기업에서 일하는 텐션/페이스를 60 정도라고 하면 저 갈아넣음은 100에서 120까지도 갈 수 있다. (100까지가 정상적 감당 범위 내라고 한다면.... 120은 번아웃일 수밖에 없다.) 스타트업 뽕 중에는 이 갈아넣음을 이겨냈음에 의한 자긍심도 있다. 이는 과한 뽕으로 가지 않는다면 개인의 자존감에는 분명 이롭다.
일반 회사에 있는 분들도 철야 할 때도 있고 야근도 할 때 있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 이벤트 기반이거나 혹은 그래도 그것을 도와줄 시스템/프로세스가 있다는 상황을 전제한다면, 아무것도 없고 계속 갈아넣음의 텐션이 유지되는 스타트업의 상황은 분명 쉽지 않다.
이제야 본론을 들어가서 회사가 어느 순간 인원이 많아지거나 시스템/프로세스가 잘 갖춰지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덜 빡신 회사를 이직하게 되면 이제 ‘성장 중독’이 나타나게 된다.
가장 대표적 사례로는 B2C에서 B2B로 바뀐 것으로만 해도 충분히 이해될 것 같다.
기존 회사와는 많은 것이 다르다. 일단 대표도 다르고 산업군, BM도 다르다. 이 회사는 야근도 많지 않고 새벽/주말에 슬랙 메신저가 오지도 않는다. 대표도 수시로 막 사람들을 불러서 계속 지시를 바꾸며 전달하지 않는다.
처음 며칠은 상대적으로 여유 있고 워라밸도 좋아지기에 좋다고 느낀다. 하지만 분명 좋은 회사인데 왜 나는 불안해지는 걸까. 불안을 넘어서 점점 내가 그전의 나와 비교되며 도태되는 느낌을 받으며 뭔가 이 여유를 이렇게 보내도 될까 걱정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아래와 같이 행동하기 쉬워진다.
► 짧지만 새 회사의 업무 내용을 보니 전회사와 비교해서 개선할 것들이 보인다. 낮은 텐션/페이스는 내가 열정적으로 주도해서 일을 하다 보면 전체 회사의 텐션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하며 의욕적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항상 이드가 말했듯이 모든 상황엔 각각의 맥락과 사정이 있다. 새로운 회사의 실제 비즈니스와 구성원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로 전혀 다른 회사인 전회사와 비교하는 것은 너무 당돌한 접근이다. function 기반으로 접근해서 산업별 특수성 보다 업무의 보편성이 크다고 판단해도 회사 안에서 일하는 구성원 특수성은 무시하면 절대 안 된다. 개인의 불안에서 시작해서 조직에 대한 선의로 가는 과정에서 나의 철학이 들어가게 되면 아집으로 가기 쉽다. 결국 그 행동들은 동료나 조직에서 불편하게 여겨지기 쉽고 으레 경력직들이 이직해서 처음으로 하게 되는 실수 중 하나로 보일 수 있다. 항상 그 과정에서는 메타인지와 주변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필수적이다.
► 회사를 잘못 선택했다고 판단하고 전회사만큼의 텐션을 가지고 있는 회사를 다시 찾기 시작한다. 그래서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이직 기회를 보며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제대로 회사를 선택할 때의 기준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단순히 전회사에서의 텐션, 그리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불안감을 중심으로 회사를 판단하기 쉽다. 그렇게 쉽게 또 어딘가를 선택해서 이직하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이제는 시작점도 까먹게 되는 정체 모를 무한비교지옥에 빠질 수 있다. 운 좋게 전회사와 같은 텐션 그리고 성장속도를 가진 회사를 찾는다 해도 그것은 표면에 드러난 모습일 뿐 그 안에 있는 실제 과정과 내용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차라리 이직이 더 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회사와 새 회사의 구분은 가능하며 분리되기 때문이다. 같은 회사가 성장하며 스테이지 변화에 따라 바뀌는 여러 가지 것들을 받아들이기에는 사람은 냉정하지 않다.
항상 말하듯이 회사는 성장하며 매 스테이지마다 다른 회사가 되며 매번 새로이 창업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과정에서 어느 순간 회사가 체계가 갖추어지고 인원이 많아지며 개별 구성원들의 R&R과 목표들이 정해진다. 그러다 보면 관점에 따라 여유로워진다고 느낄 수 있다. 앞에도 말했듯이 처음에는 좀 더 편해지고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도전적 스타트업 문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점점 불편/불쾌해지기 시작한다.
스테이지마다 달라짐은 회사관점과 정책관점이지만 구성원은 그대로 같은 사람이다. 그네들은 그 변화에 서운하며 불만이고 아쉬움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회사가 성장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인정되기 어렵다. 회사가 성장했지만 과거의 빡신 분위기도 유지하면 되지 않냐고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요구와 불만은 결국 특정 대상을 향하게 마련이다. 대표가 될 수도 있고 경영진이 될 수도 있다. 동일한 회사에서의 변화기에 갑자기 내 생활을 바꾸거나 갑자기 다른 활동을 하기도 어렵다. 그러면 결국 정체 모를 불만과 분노 속에 갇혀서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고통만 받게 된다.
하지만 앞에도 관점에 따라 여유롭다고 한 이유는 체계/시스템이 갖추어짐이 곧 빡시지 않음과 절대로 같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바뀐 상황에서는 본인도 바뀐 체제관점으로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바뀐 체제에서의 빡심/갈아넣음은 어떤 것이며 사실 그 자체보단 성과를 어떻게 낼지를 고민해야 한다. 누구도 알려줄 수 없고 알려주지도 않는다. 그것이 또한 스타트업의 장점이며 또한 무서운 점이다.
'성장 중독'은 나쁜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발전에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항상 좋은 것은 과하지 않을 때 좋은 것이지, 좋은 것도 과해져서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결국 병이다.
'성장 중독'은 과거의 나 자신을 비교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현상이기에, 과거의 나 자신은 변경할 수 없는 그 자체의 역사이기에 결국 현재에 대한 불만과 변화를 만들려고 한다. 그것 또한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불만을 갖기에 앞서서 냉정하고 또 객관적인 상황 인식과 평가는 필요하다. 그때의 내 모습은 과연 어떤 회사, 어떤 상황, 어떤 이유 때문일까를 알아야 지금 상황에서 단순히 텐션 낮음에 대해 불안, 불만을 가지지 않거나 덜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단순 텐션/페이스의 관점에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한다면, 진짜 춤을 잘 추는 사람은 단순히 빠른 템포에서만 잘 추는 사람이 아니라 미디엄 템포, 슬로 템포에서도 잘 추는 사람이 진짜 고수이다.
빠른 템포에서는 그 템포에 맞춰서 몸을 움직이고 맞추기만 해도 보이기에 뭔가 그럴싸해 보인다. 그것이 빠른 템포의 맹점이다.
미디엄 / 슬로 템포에서는 빠른 템포에서는 못 보던 여유들이 생긴다. 그 여유는 댄서의 연기력/표현력, 그리고 동작하나하나의 완성도 그리고 카리스마만이 채울 수 있다. 빠른 템포에 급급하게 맞추기만 했던 이들은 이 여유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가 일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무한 야근, 날밤 없는 업무 모드에서 여유가 생겼을 때는 편하고 좋다고 생각하기에 앞서서 두려워해야 한다. 이제 내 가치는 단순히 체력과 시간으로만 평가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면 진짜 나의 퍼포먼스는 어떤 것이며 그 퍼포먼스를 위해서는 어떤 역량/전문성이 필요한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운 좋게 전회사에서 내가 갈아넣음으로서 내 그릇이 커졌다면 그 이후부터는 계속 그 그릇을 키워만 가기보단 그 그릇을 단단하게 채우는 과정도 분명 필요하다.
스타트업이 대기업과 구분이 명확할 때는 괜찮았지만 최근 그 경계가 많이 허물어지고 이직이 활발해짐에 따라 스타트업 인원들의 가장 큰 단점으로 평가받는 것이 물경력이다. 물경력의 의미는 경험한 일의 범위와 경험한 역할은 넓지만 정작 그 일의 내실/단단함은 약하다는 말이다. 앞에 말한 표현대로 그릇은 넓어 보일 지라도, 그릇 안의 내용물이 그릇 크기에 비해 안 채워지고 안 단단해있다는 말과 같다. 어느 것이 선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필요한 과정이다.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이드 또한 유독 체계 없고 속도가 빨랐던 여러 회사를 거치며 '성장 중독'을 똑같이 경험했다. 나 또한 그 과정을 방황했고 나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지며 도리어 단단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현재 쓰고 있는 브런치이기도 하다. 사람들마다 채움/단단해짐의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기존에 내가 부족했던 영역을 보충/개발할 수도 있고 내가 일하는 방식을 리뷰하고 더 발전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건강에 부족했다면 이후 더 건강하고 오래 일하기 위해 건강을 챙길 수도 있고 여유가 없었다면 취미나 행복을 찾는 활동을 할 수도 있다. 일을 오래 건강하게 그리고 잘 한다는 의미에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