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작성한 글입니다)
일본의 발표 직후 우리 정부와 언론은 '이것이 누구 잘못이냐'를 가리고 싶었나봅니다.
강제징용 배상은 마땅히 해야할 일인데 일본 정부가 보수층 결집 등 정치적 이유를 위해 통상 조치를 꺼내들었다고 비판하는 언론이 있습니다. 반면 일부 언론은 외교부가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는 데 비판의 수위를 높이고 또 일의 책임이 우리 정부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100년 전 과실을 볼모 삼아 설 수 있었던 도덕적·감정적 우위에 취하다 못해 일본의 집단적 사과를 강요한 것이 지금의 일을 초래했단 겁니다.
조선일보는 강제 징용 배상을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데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는 입장입니다. 6일 3면 기사에 오구라 가즈오 전 주한일본 대사 인터뷰("일본인들, 한국과 대화해봤자 변할 것 없다 생각...反韓감정 심각")를 실어 일본 내 '반한 감정'을 전했습니다. 오구라 전 대사는 이번 사태가 “일본인들에게 가끔은 한국에 강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차원”이라며 “일본은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 국민의 기분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하며, 한국인은 식민 지배에 대한 감정과 외교 문제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태가 악화된 단기적 이유로는 ‘북한 문제’가 언급됐는데, 오구라 전 대사는 “납치, 핵, 미사일 문제에 대한 국민 의식, 감정이 일한 간에 차이가 매우 크다”고 말했습니다.
또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을 들며 한일 양국 기업이 위자료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한 부분에 대해 평가하는 데 지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오구리 전 대사는 과거 식민제배에 대한 한국 정서를 이해한다면서도 "징용 문제를 외교 문제로 바꾸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국 관계가 더욱 꼬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중앙일보는 주말판 '중앙SUNDAY'에 "외교안보 라인 전면 쇄신할 때다"란 사설을 질었습니다. 정세 판단을 그르치고 지난해 대법원 판결 이후 8개월 동안 손을 놓다시피 한 정부의 무능과 무대책의 결과가 이번에 현실로 나타났다”는 겁니다.“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정부 외교·안보 진용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정부가 여러 차례 “가만있지 않겠다”며 보복을 예고했고, “단순한 으름장이 아닌 것 같다”는 경고가 국내 언론과 전문가들에서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귀담아듣지 않은 사실을 비판했습니다.
한겨레는 "일본의 보복이 '한국 정부 책임'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아베 정부가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보수층을 결집해 개헌 발의선인 3분의 2 시아을 확보하려고 '한국 때리기'를 하고 있다"며 개헌을 위한 고도의 정치적 노림수라 봤습니다.
한겨레는 또 일부 언론과 자유한국당이 아베 정부의 경제 보복을 한국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 “황당하기 짝이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정부의 안이한 대처나 부실한 대응은 비판하고 각성을 촉구할 수 있지만 우리 정부가 경제 보복을 자초했다는 주장은 사실관계에 맞지 않고, ‘정치적 목적’에서 ‘경제 보복’을 하는 아베 정부를 도와주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는 미국의 중재를 촉구했습니다. 5일 2면에 참여정부 때 첫 주일대사로 지난 라종일 전 주일한국대사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그는 “당분간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말고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며 미국의 중재가 가능한지를 타진하는 게 지금으로선 현명한 대응일 수 있다”는 조언을 전했습니다.
라 대사는 조선일보가 인터뷰한 오구리 전 대사의 생각과 같았습니다. 지금 일본 내 반한(半韓) 감정이 강하다는 겁니다. 반한 감정이 배경이 돼서 아베가 '한국 정부의 신뢰'를 문제 삼은 통상 조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고 봤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베의 이 같은 기조는 '무리수'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제 한국도 힘이 없는 나라가 아니고 한미일 안보 협력 이완을 걱정하는 워싱턴과의 관계도 있다”는 주장입니다. 다만 라 전 대사는 “무리수인 줄 알면서도 추진한 건은 한국과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인 것 같다"며 "일본이 볼 때 한국은 합의한 뒤에 자꾸 어긴다. 차라리 말을 바꾸지 않는 중국이 더 신뢰할 만하다는 게 일본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감정만으로 쉽게 한 결정은 아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또 3면 “최악 한일 갈등에도...美, 과거와 달리 침묵 일관”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 우선주의’ 노선을 취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동맹 구조를 중시하지 않는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 내렸습니다. 이에 외신 기사를 인용해 “미국은 동북아의 두 주요 동맹들 간 긴장 고조가 미국의 안보 이익에도 위협이라는 걸 인지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책임져야 할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