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없고 정황만이 남아 있다.
남편은 정말 침착했다. 우선 큰아버지께 전화드렸다.
“큰아버지, 밤늦게 정말 죄송합니다. oo병원으로 오셔야겠습니다. … 저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의 죽음도 빨리빨리 지나가던 참에 처리는 더욱 빨랐다. 부검 감식반이 중환자실로 들어갔고, 남편은 경찰서로 가야 했다. 세상은 슬픔을 추스를 시간을 안 주었다. 이윽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도 오셨다. 그때 시어머니는 또 한 번 큰어머니를 붙들고 엉엉 우셨다. 자식들 앞에선 많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꾹꾹 참아오신 듯했다. 큰아버지는 그야말로 황망한 표정이셨다. 아버님 이름을 계속 부르셨다. 그 뒤로 작은 아버지, 고모 등이 오셨다. 다들 이게 무슨 일이냐고 황당해도 했다가 목놓아 울기도 하다가 갈피를 못 잡으셨다.
다들 슬픔만 있으셨을까? 아님 또 다른 감정도 있었을까? 난 그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이다. 자살은 죄이며 지옥에 가는 일이라 숱하게 들어왔었다. 그럼 지금 우리 아버님은 어디 계신 걸까? 아니면 이런 생각조차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이래서 개독교란 소리를 듣는 걸까? 무슨 감정이 맞는지 조차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아버님이 죽음을 결심하실 동안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모든 일이 내 탓만 같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1주일 전, 가족이 다 같이 보쌈을 먹으러 갔었다. 나는 마냥 맛있게 먹었고, 아버님은 당신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요새 소화가 잘 안 된다며 고기를 3점도 채 안 드셨다. 그땐 바보같이 진짜 그렇다고만 믿었다. 왜 그때 아무 의심조차 하지 못했던가? 왜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였던 걸까? 왜 깊은 속내는 알아채지 못했을까? 내 배 채우기 급급했던 지난 1주일 전이 너무나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다. 매사에 나만 생각하는 내가 너무나 싫었다.
더불어 인간의 생명은 생각보다 허무하고 힘이 없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명이란 무척이나 질기고 끈질긴 줄 알았는데, 끊어질 땐 그 여느 것보다 힘없이 툭 끊어지고 마니 말이다.
한참 뒤 경찰서를 다녀온 남편이 왔다. CCTV 속에는 건물 옥상 주차장에 아버님이 혼자 계셨고, 한참을 차 안과 밖을 서성이셨다 했다. 그리고는 차 옆, 벤치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 끄적이시고는, 그 종이를 지갑에 넣어 다시 품 속에 넣고는 난간으로 올라가셨단다. 바로 그때 형사가
“이 뒤부터는 안 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라 하여 영상은 끝이 났다 했다. 모든 정황이 ‘자살’을 증명해 주었다. 더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이럴 때 보면 현대 문명의 발달은 끔찍하다. 굳이 볼 수 없었던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시켜 주니 말이다. 의심을 하고 싶어도 그럴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상상력이 끼어들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보통은 자살하는 사람들의 ‘전조증상’이라는 게 있다 한다. 그런데 아버님은 크게 그렇다 할 만한 게 없으셨다. 돌아가시는 날 당일 아침에도 어머님과 아파트 텃밭에 ‘상추’를 심으셨단다. 당신은 다른 곳에 새 생명을 심어놓고, 정작 본인은 왜 죽음으로 갔는가. 묻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다. 아버님의 죽음을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볼 수 있는 건지? 아니, 애초에 ‘잘못’이라고 칭할 문제인지? 모든 것이 의문스럽다.
그리고 더 이상 들을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