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문장으로 정리된 생각은 아니었지만 견고한 긍지였다.
재우는 사치와 낭비의 차이를 비교적 명확하게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이 둘을 구분하여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서안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전공 시험이 내일이라며, 아, 나 진짜 공부해야 하는데,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중얼거리던 서안이 책을 펼쳐 들고선, 야 재우야. 그러니까 한국문학이라는 게 한국인이 한국인의 사상과 정서를 한국어로 쓴 걸 한국문학이라고 하는 거거든. 뭐 이런 말을 시간 간격을 두고 열 번은 넘게 중얼거렸을 때,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지도 않았지만, 그 모습이 어딘지 놀려주고 싶게 귀여워서 재우는 말참견을 했다.
너 이거 말야. 엄청난 낭비 아니냐. 그냥 재수강한다, 생각하고 나랑 영화나 보러 가자.
내가 하고 있는 건 노력이야! 지금 네 제안, 시험 기간에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 사치스럽지 않냐고!
노력 아니고 낭비임이 분명한데. 야, 낭비는 한심하지만, 사치는 해볼 만한 거라고.
오, 뭐야. 지금 어휘를 되게 섬세하게 쓰고 있네. 너 두 단어 뜻은 알고 쓰는 거야? 아 물론 나도 지금 사전 찾아봐야 한다. 아니 근데 영화 보러 가면 네가 보여주는 거야? 그게 지금 내 의사 선택에 아주 중요한 부분임.
그날 서안이 두 단어의 뜻을 찾아다 또박또박 읽어 주었을 때 재우는 자신의 신조를 발견한 것 같았다. 사치는 해도 낭비는 하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도 재우에게는 제법 중요한 지론이 형체를 갖추게 된 셈이었다.
야생조류연구회는 이름은 거창했지만 여느 학술 동아리들이 그러하듯 정기적인 세미나가 끝나면 뒤풀이랍시고 모여 술 마시기 바빴고, 사실상 친목 모임에만 얼굴을 들이미는 부류도 많았다. 서안은 매번 의외라며 놀라는 시늉을 했지만, 재우는 세미나는 물론이고 탐조 활동에도 꽤 성실하게 참여했는데, 망원경을 다루는 게 재미있기도 했고 그 해의 우세종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데이터가 주는 신뢰감. 재우는 그런 것을 사랑했다. 관찰하고, 파악하고, 자신만의 데이터를 구축하며 제법 단단한 청소년기를 거쳐 이제 멋진 청년이 되어가고 있다고. 그건 문장으로 정리된 생각은 아니었지만 견고한 긍지였다.
연애에 목마른 싱거운 남자애들이 이따금 주변 여자 동기나 선후배에 대해 말할 때, 재우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주제는 주희와 서안 중 누가 더 낫냐는 이야기였다. 재우가 보기에 그 둘은 서로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어야 할 아이들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설명하자면 주희는 마주 앉았을 때, 서안은 멀리서 바라봤을 때 이해하기 쉬운 대상이었다.
서안은 사치를 모르는 부류였다. 매 순간이 낭비였다. 자기 쪼그라드는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들다가 지쳐 나가떨어질 게 훤히 그려지는. 어딘지 모자란 사람은 상대도 하기 싫어하는 재우였지만, 이상하게 서안에게는 마음이 자꾸 쓰였다. 주희는 서안을 볼 때마다 강아지 같다며 귀여워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서안은 분명 귀여웠지만 강아지 같은, 가진 것이 사랑뿐이라 사랑만 하는 말랑한 존재는 아니었다. 웃는 게 편해 웃는 쪽을 택한 것뿐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서안을 향한 주희의 어딘지 왜곡된 애정이 거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재우는 주희의 그 우정인지 무언지 모를 감정을 느낄 때면 꼭 딴지를 걸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낭비였네. 주희를 향한 자신의 감정은 사치로 점철된 사랑이었다고 정의 내린 재우에게 뒤늦게 든 생각이었다.
그럼 주희는 어떤 아이인가. 주희는 재우가 연애를 하고 싶게 만든 첫 존재였다.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날,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하느라 음악도 틀어놓지 않은 어둑어둑한 호프집 안으로 신입생들이 미적미적 들어설 때 뭐 신기할 것도 없는 그곳을 정신없이 둘러보는 서안의 손목을 딱 잡고 단체석을 찾아 밖으로 드나들기 편해 보이는 자리에 제일 처음 앉아 버린 예쁜 여자애. 그것이 주희에 대한 재우의 첫 기억이었다. 불필요한 말을 하는 법도 없고 젓가락질도 잘해서 뭘 먹든 흘리지 않고 말끔히도 먹는 아이. 아무리 편한 의자에 앉아도 허리 한 번 굽히지 않고 꼿꼿하게 앉는 주희는 작고 사소한 행동도 대충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훈련된 것 같은 단정함을 지닌, 그때 그 예쁜 애 이름이 뭐냐와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듣게 만드는 주희가 재우 눈에도 특별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단숨에 고백해 버리자니 설렘의 시간이 무겁지 않고 산뜻했기에 고백은 조금 천천히 해도 좋겠다며 알 수 없는 여유를 부렸는데 그때 그렇게 느긋하지 않았다면 이십 대의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가 고백했다 하여 주희가 받아들였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대동제가 끝나고 주희와 세진의 연애 소식은 동아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새내기 첫 커플 탄생이라며, 둘의 조합은 상상도 못 했다고, 다들 신기해하기도, 부러워하기도 했다. 딱히 무엇에도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 재우로서는 이것이 첫 번째 시련이었다. 물론 주희는 불과 얼마 전에도 연애 중이었고, 남자 친구와 둘이 학교를 돌아다니는 것도 본 적이 있지만 그때엔 어째서인지 별 충격이랄 게 없었다. 주희 표정만 봐도 곧 끝이 날 연애임이 분명했고 옆에 서 있던 그 남자는 얼간이 꼴로 주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멍청이였으니까. 하지만 세진이라니. 세진은 처음부터 말투든 행동이든 뭐 하나 호감인 구석이 없는 녀석이었다. 동기들끼리 조촐히 모여 종강 파티를 한 날, 웬일로 마지막까지 남아 술을 마시던 세진이 넌지시 재우를 바라보며 아, 나는 마지막까지 고민했어. 주희한테 고백할지 서안이한테 할지.라는 말을 지껄였을 때 재우는 참 생긴 대로 사는 새끼가 저기 있구나, 하였다. 저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뭘까. 기분이 더러운 긴 새벽이었다.
1학년을 마치고 재우는 바로 휴학을 했다. 여행을 다녀올지 뭘 해야 할지 특별한 계획은 없었지만 그렇게 조금 쉬다가 입대를 할 참이었다. 2학년까지 마치고 가지 왜 그리 서두르냐고 친구들은 재우의 결정을 의아해 했지만, 대학 진학 후 전공에 딱히 흥미가 느껴지지 않아 이대로는 학사경고 위기였고 그나마 정을 붙였던 동아리 활동이나 친구 관계에 주희의 연애가 끼어들게 되면서 어느 한구석도 말끔하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사내놈들은 군대에 다녀와야 인간이 된다고 했지. 그가 자신의 인생에 아주 작은 영향을 미치는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았지만 정작 곤경에 처하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군 입대였다. 떠들썩한 송별회를 원하지도 않았고 술로 위장을 해치고 허옇게 뜬 얼굴로 훈련소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던 재우는 그냥 동아리 동기 몇 명만을 모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친구들과 강남에서 닭갈비를 먹고 제법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 차도 한 잔씩 마시며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조용한 송별회였다.
재우는 군대 생활에 적응을 잘 하였다. 규칙이 주는 안정감은 기대보다 컸다. 부대에는 온갖 인간 군상이 다 모여 있어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하며 전에 없이 많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십 대 초반의 남자는 모두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알고 지내던 세상이 얼마나 좁았던가.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아버지가 늘상 자화자찬하던 그가 이룩한 가정의 안락함, 자식들에게 안겨준 안전한 세상이란 것에 거의 감사를 느낄 뻔했다. 아니, 그건 그 사람 덕분이 아니지. 가정을 지킨 건 늘 엄마였어,라며 이내 스스로를 단속하긴 했지만. 재우는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천천히 건넜다.
동기 중 가장 먼저 입대했던 만큼 처음엔 친구들 하나하나 열성적으로 재우의 휴가에 맞춰 시간을 내고 함께했지만, 제대가 다가오면서 휴가라 해도 그를 만나주는 친구는 점차 줄어들었다. 남자 동기들은 뒤이어 군대를 갔고, 여자 동기들도 휴학을 하고 어학 연수를 가거나 취업 스펙을 쌓느라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재우의 모든 휴가에 빠짐없이 시간을 내준 건 서안뿐이었다. 다른 모임들은 꼭 나올 것처럼 굴다가도 갑자기 빠지는 때가 종종 있던 녀석이 재우의 휴가는 성실히도 챙겼다. 복무 기간 내내 가장 많은 편지를 써준 것도 서안이었다. 아기자기한 예쁜 편지 겉봉과 부조화를 이루는 지독한 서안의 악필은 받아 들자마자 재우의 웃음을 터뜨리기에 충분한, 군 생활 나름의 즐거움이 되었는데 워낙 많은 편지를 보내다 보니 주변에서는 얘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저기요, 편지 내용을 좀 보세요. 이게 지금 내 안부를 묻는 거냐고, 지 이야기나 한바닥 적어 놨구만. 말기계 서안은 재우를 대나무 숲쯤으로 여기는 듯했고, 재우는 그 역할이 싫지 않았다.
상병이 되면서부터 휴가가 더 잦아졌다. 휴가가 정해지면 재우는 서안에게 콜렉트콜로 전화를 걸어 언제 나가는지, 몇 박 며칠 일정인지를 알리고 만나는 날을 정했다. 그리고는 그날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영화가 있는지를 서안에게 확인하라 일러둔다. 조조로 영화를 보거나 둘 중 하나가 늦잠을 자면 서안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고 치즈케이크에 바닐라라떼를 먹는 서안을 구경한다. 대단할 것 없는 하루지만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면 마음이 편안했다. 제대를 하고 왔을 때 그대로인 사람 한 명은 여기 있을 거라는 기대. 그런 것이 재우에게는 필요했으니까.
그날은 재우의 마지막 휴가였다. 휴가 마지막 날 만나서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를 먹자고 답지 않은 제안을 한 서안이 좀 이상했지만 나쁘지 않네, 하고 대학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약속 시간 한 시간 전부터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일일이 보고하는 녀석이 이상하게 연락 한 통이 없더니 만나기로 한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전화가 왔다.
재우, 정말 미안한데 우리 한 시간만 이따 만나면 안 돼?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세진이랑 낮에 만났는데 이야기 듣느라…. 내가 진작 출발했어야 했는데 미안, 진짜 미안해.
하,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한 번도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재우가 주희를 좋아했다는 건 서안도 이미 다 아는 사실이었다. 세진을 재우가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서안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에 늦는다는 이유가 그 애 때문이라니. 내가 여기에서 더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있나. 불쾌함에 손끝이 식는다 싶을 때 뒤이어 문자가 왔다. 서안이 아닌 엄마에게서.
[네 누나 지금 어딘지 혹시 연락되니? 어제도 새벽에 들어왔는데 오늘도 그럼 네 아버지 진짜 가만 안 있으실 건데 내 전화 받지도 않는다.]
엄마 전화를 안 받는데 내 전화를 받을 리가. 재우에게 아버지는 경멸 정도의 감정으로 정리되는 사람이었지만, 누나에게는 좀 더 복합적인 어떤 상처를 남긴 것 같았고 회복되지 않는 관계는 계속하여 삐걱댔다. 뭐, 부족함 없어 보이는 가정에 방황하는 누나의 유희 정도야. 그러나 오늘도 속상할 엄마를 생각하니 재우는 어차피 망친 기분,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받지도 않을 전화를 누나에게 계속 걸면서.
누나는 지난밤 들어오지 않았고 간밤 서안으로부터 미안하다는 문자가 몇 통 왔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아 핸드폰은 어젯밤부터 꺼서 서랍 안에 넣어둔 채 집을 나섰다. 서안이 자신과의 약속을 못 지킨 것이 세진 때문이란 사실에 이렇게나 화가 나다니. 주희와 세진은 이미 헤어졌는데도 시련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지 재우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야, 이재우.
깜짝아. 뭐냐, 너?
지하철역 개찰구 쪽에서 서성이다 자신을 발견하곤 성큼성큼 다가오는 서안을 봤을 때 재우는 얼마나 놀라버렸는지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거의 던질 뻔했다.
너 내가 버스타고 갔음 어쩌려고 여기서 기다렸냐? 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네가 매번 지하철 타고 간다고 했어서…. 그냥 일찍부터 와서 기다렸어. 집은 모르고…. 너 폰도 꺼놨고. 나 좀 스토커 같지…? 아니 근데 너무 미안한데, 달리 방법이 생각 안 나서…. 너네 부대 별로 안 멀잖아. 같이 가 근처까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게 누구든, 제멋대로 자신을 기다린 행동에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 순간 서안의 얼굴을 봤을 때 재우에게 든 생각은 단지, 쟤 진짜 대책 없다. 그 한 문장이었다. 서안은 재우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또 버스를 타고 부대까지 가면서 어제의 일을 설명하고 사과했다. 어제 만났더라면 재우가 화를 내며 내뱉었을, 조언을 가장한 짜증에 대한 대답까지 찬찬히 말해줬다.
네 생각대로 세진이가 나한테 멋대로 구는 거 잘 알아.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정리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그렇게 지내는 중인 거야. 나는 좀 산만한 사람이니까, 그냥 이렇게 정신없이 지내는 게 그리 이상할 것도 없지 않나, 하면서. 드라마든 소설이든 서사의 주인공은 다 조금씩 부족한 면이 있잖아. 그래서 공감하게 되고,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괜히 나도 따라하는 거지. 일단은 모르면 모르는 대로, 헤매더라도 열심히 헤매고 싶어서…. 좀 멍청한 것 같긴 하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너는 누구도 함부로 대한 적 없어. 그래서 좋아해. 어제 정말 미안. 마음 풀어줘.
재우는 서안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다. 겪어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 그래서 멋대로 말하기 좋을 어떤 감정을. 서안은 재우에게 설렘의 대상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지만 어떤 한 사람이었다. 어디에도 분류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이름 붙일 수도 없는 하나의 존재. 하나라는 수사는 특별함을 선물 받은 단어거든. 서안은 곧잘 그랬지. 그래서 생각했다. 서안과의 시간 속에선 사치를 부리자고. 같은 시간을 보낼 일은 더 많이 줄어들 테고 언젠가는 못 만날 사이가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런 마음을 먹었다.
저기 또 정신없이 방황 중인 서안이 아주 오랜만에, 재우의 눈에 들어온다.
몇 해 전 썼던 '서안'의 이야기. 친구의 조언으로 뒤이어 '주희'와 '재우'까지 쓰게 됐어요.
여러 가지로 어색하고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쓰면서 즐거웠던. 저에게는 의미가 있는 3부작의 단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