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301] 포스트모더니즘 소개팅

by 윤세영

잠이 오지 않으면 푸코를 읽어.

네? 푸코요? 미셸 푸코요?


선배는 요즘 늦도록 잠이 오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나에게 푸코를 처방해 줬다. 푸코라니…. 씁쓸히 포스트모더니즘이 떠올라 버렸다. 비평 이론에서 주로 등장하는 용어들은 내게 그다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살면서 첫눈에 반한 유일한 남자였던 선우가 먼저 떠오른다. 선우는 통기타를 치며 내게 물었다. — 아니, 통기타 같은 건 없었다. — 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문학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해? 그땐 그가 너무 멋있어서 정답을 말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대체 그게 첫 만남에 할 만한 질문인지 이제 와 의문이 든다. 늘 운이 없는 편인 나는, 결국 모더니즘이라 답하는 바람에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아 물론, 그 이후에도 숱한 시험이 주어졌지만, 단 한 번도 선우를 흡족게 할 대답을 내놓은 적은 없었다.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돌아가서,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난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체 무언지 이해하지 못한다. 문학을 전공했기에 여느 책에 써 있는 구절을 복사한 듯 말할 순 있지만, 그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고 하는 말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별안간 땀을 쏟으며 축축한 손을 흔들어 보이곤 줄행랑을 칠지도 모른다. 내가 소설가가 되지 못한 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닐지, 진지하게 생각할 정도로 그것은 날 주눅 들게 한다. 부끄러움이 밀려들 때면 그냥 이렇게 뻔뻔하게 우기고 싶기도 하다. 사실 모두가 멍청이 아니냐고. 내가 유독, 자주, 멍청함을 들킬 뿐이지.

왜 갑자기 포스트모더니즘 이야기나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내가 지금부터 주절거릴 하루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3학년 2학기 종강 후 현대소설론의 성적을 확인한 날. 계절학기를 듣고 있던 겨울이었다. 수업이 막 끝난 차, 은아에게 전화가 왔다.


경, 지금 어디야?

응, 나 수업 이제 끝났어. 무슨 일? 아 너 오늘 소개팅 가지?

그게, 알고 보니 미팅이었어. 2대 2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요즘 정신머리가 없어. 듣고도 착각했나 봐.

그게 뭔…. 그럼 어떡해?

나 마음 너무 공허해. 실연의 상처가 크단 말이다. 오늘 네가 자리 채워.

뭐라고? 나 오늘 약속 있어. 일곱 시 강남.

안 돼. 너뿐이야! 무조건 나와. 날 도와!


은아는 단호했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잘 지내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마음이 힘든 모양이었다. 연애를 하다가도 얼마 안 돼 먼저 이별을 고하고 다니던, 진득한 애정 앞에선 늘 도망치기 바쁜 나와는 달리 은아의 연애는 친밀하고 성숙해 보였다. 그래, 그런 연애 후의 이별은 힘들 수 있겠다, 얕게 한숨을 내쉬며, 알겠어. 대신, 빨리 파하기다. 다짐을 받아두곤 별수 없이 미팅에 나가기로 했다.

집에 가만히 있기도 힘들다며 은아는 학교로 올 테니 좀 기다리라고 했다. 꼼짝없이 어디 가지도 못하고 도서관에 들렀다. 책이나 보며 시간을 때울 작정이었다. 필요한 책을 검색하려는데 슬그머니 기척을 내며 어깨를 툭 치는 사람, 동아리 선배 주현이었다.


오, 경이 수업 끝났어? 나 두 시간 뒤 과외라서 시간 비는데 점심 먹을까?

아뇨, 나 지금 친구 기다려요. 친구가 미팅 자리 좀 채워달래. 다섯 시니까 일곱 시 모임은 좀 늦을 듯. 대충 분위기 봐서 최대한 빨리 갈게요.

뭐야, 미팅? 올.

뭔 올이야. 남의 속도 모르고. 나 진짜 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가는 거. 아무튼 내 사정 좀 전해줘요.


주현을 보내곤 멍하니 앉아 은아를 기다렸다. 대출한 책은 읽지도 않고 품에 꼭 안은 채. 아까 집에서 나오기 전 확인한 현대소설론의 성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씨…. 에라이 씨뿔…. 속으로 조용히, 상스럽고도 정성스럽게 몇 번이나 반복하여 그것을 발음하는 사이 은아가 눈앞에 나타났다.


경, 고마워.

야, 진짜 나 미팅 싫은데. 이거 사랑이다, 내 사랑 잊지 마.

절대 안 잊지…. 다음엔 내가 너 구해준다.

근데 저번에 네 이야기를 잘못 들은 것만 같아서 말야. 그, 누가 주선하는 거라고?

스님. 나랑 같은 검도장 다니는 스님.

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네. 스님 주선 미팅이라고?

스님께서 불교대학 다니시잖아. 거기서 알게 된 친구들이래.

불교학과인가? 아님 다른 과 친구들인가?

모르겠어. 나 사실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 그냥 소개팅인 줄 알고 한다고만 했지.

그래, 그럼 일단 가봐야 알겠네. 충무로랬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 너무 늦으면 안 돼.

나도 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 괜찮으면 또 다음에 만나면 되니까. 가자, 오늘 점심 내가 산다!


아니, 너희는 적당히를 모르는 애들이지…. 너네 술도 엄청 마시고 하여간 경이 너, 특히 우스운 꼴 된다고. 저 대화에 끼어들어 알려 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경과 은아는 맑고 밝게, 충무로의 어느 전통주점으로 들어선다. 스님은 약속 시간과 장소만 조율해 주시고 나오지 않으셨기에 우리는 어색하게 그 자리에 마주 앉았다. 잘생겼다. 내가 그들을 만나고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주고받고. 평범한 미팅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그들은 다시 말하지만 잘생겼고 — 나중에 은아와 이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은아는 동의하지 않았다. — 잘생겨서인지 하는 말마다 재미가 있었다. 은아도 즐거워 보였다. 원래도 유머 감각이 있는 은아는 그들의 말에 크게 웃으며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참을 많이도 마시고 웃다가 그들 중 한 명이 2차를 제안했다. 근처에 맛있는 족발집이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이쯤에서 자리를 정리하는 것이 옳았다. 그게 우리의 계획이었으니까. 그러나 은아는 상대의 제안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의를 했고, 나는 동동주에 취해 상황 파악이 안 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취한 줄 몰랐지만 취한 상태였고 스스로 선택해서 2차를 가는 거라 믿었지만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상태였다.


족발집의 형광등은 너무나 밝았다. 밝은 형광등이 내 뇌의 일부를 깨웠다. 아니 정확히는 깨웠다기보다 자극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표현 같은데, 족발집에 앉자마자 같은 말을 무한히 반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은아야, 나 강남 가야 해. 일곱 시 약속이야. 지금 몇 시니?

알겠어, 경아. 너 강남 가야지. 시계 좀 볼게.

은아, 주현이, 주현 선배한테 전화해야 한다.

알겠어, 그 선배가 주현이라고?

은아, 나 강남 가야 해. 일곱 시 약속이야.

알겠어.

강주현이야. 강주현이. 강주현한테 전화 좀 해봐.


미친 경아…. 형광등 아래에서 강남에 가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집착이 발현됐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주현의 이름을 그렇게도 불러댔는데,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분명 새하얀 형광등 아래 따끈한 노란 장판 위에 앉아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주현과 버스를 타고 있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불러댄 주현이었지만 막상 주현과 있으니 이번엔 은아를 찾기 시작했다. 선배, 은아 어디 있어요. 내 친구 은아요. 은아 집에 데려다줘야 하는데. 내가 데려다줘야 하는데. 아마도 주현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경아, 네가 지금 누굴 데려다준다는 거니….


조금 이따 버스에서 내리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히, 버스 정거장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2차로 자리 이동을 하기 전, 충무로에서 실려 오는 나를, 주현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고, 나중에 주현에게 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좋아하는 이들을 한껏 본 나는, 아니 실은 제대로 본 것도 아니었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누군지 챙겨보지도 않고 그저 한껏 허리를 숙여 공손히도 인사를 했다. 수줍게 예의를 차리는 모양새로,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면서. 그 뒤로는 다시 기억이 없다.


눈을 떴을 땐 다행히 내 방이었다. 어떻게 집에 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멀쩡하니 되었다, 안심하던 찰나, 주현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왔다.


[경이 일어났니? 아직도 익명 속에 숨지 못해 속상하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몇 초간 멍하니 그의 문자 한 글자 한 글자를 바라보다 이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의 이경…. 끝도 없이 나불거렸구나.


후…. 선배, 들어봐요. 내가 중간고사 대체 과제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을 하나 예를 들어서 썼다고. 그 작가를 P라고 할게. 작가가 창피할 수 있으니까. 아니, 창피한 건 난데! 나는 익명 속에 숨지 못하잖아…. 선생님이 과제 확인 끝난 뒤에 수업 시간에 막, 내 과제를 막, 뭐라고 하셨다니까? 어떻게 P의 작품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냐고. 하…. 진짜 이렇게 모를 수가 있냐고…. 씨…. 내가 씨뿔인 건 괜찮아. 씨…뿔.인 건 괜찮다고….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주현의 부름에 순순히 학교로 향했다. 너 때문에 고생했으니 점심을 사라고, 웃으며 말하는 주현의 요구는 억지스러울 것도 없었다. 자기 여동생에게 참 다정한, 주변에서 보기 드문 반듯하고 착한 오빠인 주현은 나에게도 늘 다정했다. 장난스럽게 놀리기는 해도 아끼는 마음이 느껴지는 사람이라 부끄러운 와중에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시간이었다.

주현과 밥을 먹고 은아를 만났다. 잠을 아주 푹 잤는지 보송보송한 얼굴에 베개 자국을 얹은 채였다.


나 어제 그렇게 진상이었다며.

아냐, 뭔가 같은 말을 반복하긴 했다만 진상은 아니었어. 그래도 어제 넷 중엔 우리 쪽이 비교적 괜찮았달까.

기억을 왜곡해 보겠다는 건가?

아냐, 들어봐. 어제 나 진짜 멀쩡했고, 너도 알잖아 나 취해도 일단 멀쩡해 보이는 거. 그리고 넌…. 마치 오발탄의 어머니처럼 자꾸 강남과 주현이란 이름을 외치긴 했지만, 그 정도면 양호했어. 문제는 상대편 남자애들이었지. 한 명은 바닥에 누워서 자기 시작했고 나머지 하나는, 너랑 비슷하긴 했는데, 무튼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더라고. 혜진아, 혜진아…. 계속 그러더라니까?

짝사랑일까, 이별일까. 그 여자 이름이 혜진인가 보네.

아니, 내 친구 이름.

뭔 소리야?

나도 취해서 그 이름 뭔지는 기억이 안 나. 그냥 지금 혜진이로 정했어.

하, 이름을 지어주네. 이 와중에.

근데 정말 혜진이었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난 주현? 그자에게 연락해 널 보내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토했다. 그 뒤엔 정말 멀쩡해졌지.

그래. 안 그래도 그거 좀 물어볼 참이었다만, 대체 왜 그자를 부른 거냐. 나 정말 망신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괜찮아.

괜찮아?

어 괜찮아. 망신은 우리를 해치지 못해.


싱거운 대화를 킥킥거리며 나누는 동안 이상하게 자꾸 어제의 한 장면이 마음에 걸렸다. 어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분명 누군가에게 인사를 했다. 그건 내가 가지고 있던 어제의 몇 안 되는 기억이었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배꼽인사 자세. 그렇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친 얼굴, 그건 분명 경멸의 얼굴이었다. 아까 주현에게, 내 흉한 꼴을 본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냐고, 어제 나온 사람 누구냐고 물었을 때, 주현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와 나는 인사만 잠깐 하고 아무래도 내가 많이 취해 그길로 우리 집으로 데려다줬다고. 그래도 다그쳐서 어제의 이름들을 들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경멸의 주인으로 선뜻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잘못 본 건가. 내가 엉뚱한 사람에게 인사를 한 걸까.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동아리 사람들 앞에서 이따금 주춤거렸다. 서로 만나 잘 웃고 이야기하다가도, 저 아이였을까. 그 얼굴 위에 경멸의 표정을 그려 보곤 했지만, 분명치가 않았다. 답답한 일이었다. 누구나 그 얼굴의 주인일 수 있었지만, 기억을 하지 못하는 한, 누구도 그 얼굴의 주인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 문제에 내 기억 같은 건 의미가 없는 일일지도. 하, 다시 술을 마시면 내가 정말….



망신의 순간을 착실히 쌓아가며 시간은 흘렀다. 은아의 말대로 망신은 우리를 해치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갔다. 푸코를 읽으라는 선배의 조언을 받들어 철학서를 사서 읽기 시작했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는다. 오히려 푸코가 너무 재미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되지 않는 대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시기에 들어선 걸까. 이제 멍청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어제는 은아와 통화를 했다. 그날의 소개팅, 아니 미팅 이야기를 꺼냈더니 은아가 크게 웃었다. 은아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달라 그건 그것대로 흥미로웠다. 은아야, 요즘 ‘나는 절로’라고 절에서 청춘남녀 짝을 지어주는 템플스테이 같은 걸 한대. 우리가 했던 미팅이 그 원조격 아니겠니? 나는 뵌 적도 없는 분이지만, 그 스님, 잘 지내실지 궁금하다. 혜진이를 절절하게 찾던 그 애는 지금 무얼 하며 살까. 이런 이야기를 하며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전화를 끊고 나니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었다. 오직 은아와 나의 재미를 위해, 망신스럽지만 꽤나 웃겼던 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