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301] 주희

놓치는 게 있다 해도 난 안전해

by 윤세영


주희는 자신이 원하는 걸 아주 조금, 늦게 깨닫곤 했다. 그것이 그를 자주 속상하게 만들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운이 좋았던 주희에겐 늘 착오 뒤에는 깨달음이, 그리곤 진정한 성취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실 대학에 가기 전까지 주희가 스스로 한 선택이랄 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성장의 시간 속에 어떤 인상적인 장면이랄 것도 없었다. 주희는 안전하게, 그의 엄마가 원하는 딱 그 정도의 그림 같은 스무 살의 딸로 키워졌다. 이과를 가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문과로 진학하여 그곳에서 집중했다면 대학 입시 결과가 조금은 더 낫지 않았을까, 정도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정도야 뭐. 수학에 대한 애정만으로 이과에 가서는 안 된다는 약간은 씁쓸한 교훈을 얻은 채 주희는 서울 소재 한 대학의 취업에 나름 유리하다는 학과에 진학한다.

신입생 환영회나 개강 파티를 통해 만난 이들은 주희에겐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어떤 바람이 생겼다. 청춘은 특별하다잖아. 주희는 낭만이란 것을 누려보고 싶었다. 동아리 몇 군데를 직접 움직이며 주희는 안전한 낭만이 어디에 있을지를 고심했고 알맞은 곳을 찾아냈다.


그래서 너 동아리가 뭐라고?

야생조류를 연구하는 데야.

엄마는 이해가 안 된다. 그게 재미가 있어? 뭐 취업에 도움 될 것 같지도 않은데.


의아해하는 엄마의 반응은 주희를 흡족게 하기에 충분했다. 별을 좋아하니 천체관측 동아리에 가거나 그도 아니면 산악동아리 같은 곳에서 몸을 단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동방들을 돌던 주희에게 야생조류를 연구하는 동아리는 사실 처음에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기도 했다. 유독 공강이 길었던 날 그냥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들어간 곳에 서안이 없었다면. 주희는 지금쯤 조류도감이 아닌 등산 장비를 구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동방에 들어갔을 때 99학번이라 자신을 소개하던 선배는 말이 많고 웃음도 많았다.


우리 장비 제법 좋아. 다른 학교들이랑 같이 탐조 갈 때 꽤 폼난다니까. 새에 대해서 많이 몰라도 돼. 보다 보면 너도 사랑하게 될 거야. 아니 안 사랑해도 돼, 사랑하게 만들 거니까! 아 나 이거 지금 뭔가 익숙한데. 이거 뭐 따라한 건데.


청춘의 덫이에요 선배. 영국이가 윤희에게 한 말! 내가 사랑해! 당신은 사랑하지 않아도 돼. 사랑하게 만들 거야!


선배의 말을 끊고 불쑥 대화에 끼어든 아이. 선배는 서안이 주희와 같은 새내기이며 국문과라고 대신 소개해 줬다. 신나게 떠들 땐 언제고 주춤주춤 수줍게 웃으며 주희를 바라보는 서안. 늘 저렇게 행동하는 걸까. 서안은 단번에 주희의 관심을 끌었다.

언젠가 주희는 서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새를 싫어하면서 왜 다른 동아리도 아닌 이곳에 온 거냐고. 서안은 간단히 대답했다. 멀리 두고 오래 보면 어떨지 궁금했어.라고. 서안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 자체로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무어든 알맞은 거리와 순간이 있을 거라고. 가끔은 너무 어려우면서도 꽤 자주 싱거운 서안. 주희는 말랑하고 무른 서안을 아꼈다.

좋아할수록 그를 질투하기도 했던 주희는 왜인지 서안에 대해서는 항상 편안하고 즐거웠다. 서안이 사람들을 웃게 한다면 주희는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쪽이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주희는 꽤 빠르게 감각했다.

동아리 모임으로 세미나를 하든 술을 마시든 사람들에 둘러싸여 신이 난 서안을 볼 때면 주희는 나지막이 귀여워… 강아지 같아. 하였다. 개 같다는 거네. 하며 번번이 딴지를 거는 건 재우의 몫이었고.




주희는 예뻤다. 학교에 벚꽃이 만개할 때 연애를 시작했다. 두 문장 사이에 어떤 개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 시절의 특별한 연애는 주희가 그리는 낭만에 부합했으므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주희의 남자 친구는 주희보다 두 살 위로, 과 선배의 친구였다. 다른 학교에 다니던 그는 도대체 수업을 듣기는 하는 건지 틈이 나는 대로 주희의 학교를 찾았다.


우리 애기 점심 사주려고 왔지. 시험 공부는 잘 돼가?

오빠…. 애기라고 부르지 좀 마요. 너무 창피해.

왜, 애기 맞잖아. 이렇게 귀여운데 애기가 아님 뭐야? 공주님?


끔찍하다. 이건 고문이야. 주희는 마음속에 화가 치미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사귀기 전 몇 번의 데이트에서는 모든 행동이 세련되고 점잖았던 남자 친구는 연애를 시작하자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아무리 거절을 해도 친구들 밥을 사주고 싶다기에 한 번은 서안만을 겨우 불러 같이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날도 옆에 딱 붙어 애기니 공주님이니 사설을 늘어놓는 그가 너무나 창피해 그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주희는 발가락 마디마디 뼈가 다 부러지겠다 싶게 발끝에 힘을 줬다.


서안이 이름 특이하고 예쁘다. 우리 애기랑은 어떻게 친해졌어?

음 애기…. 그러니까 주희랑은 같은 동아리예요. 주희가 예뻐서 제가 한눈에 반했습니다.

경쟁자잖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주희, 제가 빼앗을 거니까!


서안은 짐짓 즐거워 보였고 주희는 이제 될 대로 되라 싶었다. 오늘은 아쉽지만 너에게 양보할게, 라며 서안과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한다는 듯 아쉽게 발길을 돌리는 그를 바라보며 주희는 이제 서안이 어떤 말을 할지, 선뜻 서안 쪽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주희 덕분에 점심 맛나게 먹었는데 나 또 배고파. 떡볶이 먹으러 가면 안 돼?


. 상대가 곤란할 만한 건 없던 일 취급하는 게 이 아이의 특기지. 서안은 그날 친구의 남자 친구에 대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즉석떡볶이 2인분을 주문해 혼자 다 먹다시피 하곤 빙수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잘 먹고 잘 웃는 내 강아지. 자신도 모르게 또 그런 말을 살짝 흘려보내며 주희는 며칠 뒤 첫 연애를 끝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연애를 시작한다.


두 번째 남자 친구는 동아리 동기였다. 세진은 말이 같은 동아리지 사실상 한두 번 모임에 나온 뒤로는 잘 나타나질 않는, 영 겉도는 축에 속하는 친구였는데 동기들끼리만 모일 때는 꼭 출석 도장을 찍었다. 모임에서는 늘 서안의 옆에 앉아 장난을 걸고 웃고 떠들기에 서안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 대동제 둘째 날, 동아리 주점을 파하고 짐을 정리하는 사이 아무렇지 않게 주희에게 다가와 고백을 했다. 대단할 것 없는 고백이었다.


내가 너 좋아하고 있거든. 우리 사귈래?

나를 좋아한다고?

응. 어때, 나랑 사귈래?


세진과 꼬박 두 해를 사귀었다. 주희 인생에 가장 많은 양보와 이해, 배려를 쏟아 부은 연애였다. 세진의 집은 형편이 넉넉지 않았고 터놓고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지만, 데이트 비용은 그에게 부담이었다. 대학생들끼리 연애하면서 커플링은 사치 아니냐고 말하던 세진 앞에 주희는 나는 커플링이 갖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 일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걸핏하면 하는 소리, 넌 모르겠지만, 넌 이해 못 하겠지만,과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도 주희는 세진의 말대로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왜 세진을 사랑하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글쎄. 그는 적당히 깔끔하게 생겼고, 큰 키는 아니었지만 무얼 입든 태가 났다. 집중하는 표정이 멋있었고 제때 알맞은 표현으로 사람을 웃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필요한 상황에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들이는 모습. 경제성을 따져가며 움직이는 건 그에게는 생존전략이지만 주희 눈에는 영리하고 똑똑해 보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의, 최상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 날 좋아한다는 건 꽤 흡족한 일이었다.


둘이 연애를 시작하기 전부터 세진과 서안은 꽤 친했기에 주희는 둘 사이를 딱히 질투하지 않았다. 세진이 장학금을 받지 못 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버지가 크게 다치시는 바람에 연락하기 죽기보다 싫었던 어머니께 돈 사정을 해야 했을 때에도, 세진이 먼저 고민을 털어놓은 건 서안이었지 주희가 아니었다. 그때마다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서안이는 내 사람. 나를 속상하게 할 일을 만들 리가 없는 아이니까. 세진의 말대로 주희는 그의 말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서안이라도 힘이 되어준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넘겨 버렸다.


세진은 늘 바빴다. 아버지가 다친 이후부터는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다. 과외 두 곳과 편의점 알바 하나. 편의점 알바 시간엔 공부를 할 짬도 나고 괜찮다고, 너랑 둘이 놀기만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서 미안하다고. 방학엔 같이 짧은 여행이라도 가자고, 그는 그런 말들을 주희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하곤 했다. 3학년의 봄이었다.

어김없이 중간고사 기간이 오고 주희는 학점 관리에 조금 예민해져 있었다. 아직 무엇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세진은 대학원에 진학할 거라 했다. 형편이 어려워도 매번 방법을 생각해 내는 그는 이번에도 무슨 계획이 있을 것이었다. 주희에겐 아주 나중에야 설명해 주겠지만. 둘은 일주일을 꼬박 서로 만나지 못하고 보냈다. 세진은 중요한 전공 시험이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약속은 꼭 지키는 세진이니까, 주희도 그동안 자기 시간에 집중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래도 연락이 없으니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목요일 밤, 주희는 마지막 시험 한 과목을 끝내고 세진이 일하는 편의점에 깜짝 방문을 할 계획을 세웠다. 일하고 있는 곳에 찾아간 건 처음이기도 했고, 며칠을 못 본 그리움에 마음이 떨리고 설렜다. 세진의 동네, 어두운 교차로에 자리한 작은 편의점 앞에 도착했을 때, 간단한 저녁이라도 사왔어야 했던 게 아닌가 아차 싶던 순간이었다. 조그맣고 하얀 얼굴의 여자아이가 세진과 함께 웃으며 편의점 밖으로 나온 건.


주희야.

응? 오빠 친구예요?

아니. 여자 친구.

여자 친구? 오 뭐야. 오빠 여자 친구 있었어요?

어, 가라. 내일 보자.

아, 나 공부하다가 모르는 거 있음 전화 건다! 어제처럼 늦게 받으면 혼나!


잠깐이었지만, 주희는 이 장면에서 자신이 지워져 있음을 느꼈다. 저 애는 그냥 아는 동생일 거고, 아는 동생이 아주 예쁠 뿐이고, 예쁜 동생이 세진에게 여자 친구가 있음을 몰랐을 뿐이지만. 주희의 기분을 망치기에 충분했다.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동생이라고. 교양 과목 뭐 듣는 게 있는데 자꾸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하기에 요즘 몇 가지 알려 준 게 다라고. 세진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이상하게 그 순간 주희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뭐야. 나랑은 요 며칠 연락 한 번을 못했는데 저 애랑은 통화도 해?

그런 거 아니라니까. 매일 잠깐이라도 보는 애 전화를 일부러 안 받을 수는 없잖아.

난 네가 바쁘고 지금 중요한 시기니까 연락하고 싶은 것도 다 참았어. 너 바쁠 때 얼굴 보러 찾아가는 거 다 내 몫이었어. 그런데 너는 저 애랑 웃으면서 이야기 나눌 시간은 있고 나한테 문자 한 통, 전화 한 번 할 시간은 없어?

하. 그만하자. 주희야 너 지금 너무 감정적이야. 난 있지 너처럼 감정을 표출하고 그럴 기운도 여유도 없어. 너는 아마 내 상황 절대로 이해 못 할 거야.

지랄 좀 하지 마.


깜짝. 주희는 스스로 뱉은 말에 순간적으로 놀라버리고 말았다. 지랄이라니. 자기 입으로 한 말인데도 너무나 낯선 말. 지긋지긋하게 들어 온 넌 절대 이해 못 할 거란 말을 향해 뱉은 건지, 자신 아닌 다른 여자애와 다정히 웃고 있던 그에 대한 실망에 튀어나온 건지, 질투와 섭섭함 하나 말끔히 숨기지 못하고 허둥대는 자신에게 내던진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욕이 주희의 입에서 나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어서, 덩달아 놀란 세진도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 멈춰 섰다. 둘은 그렇게 거리를 두고 선 채로 잠시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헤어지자.

헤어지자고?

어. 너랑 이제 그만 만날래.

저 애 때문에 그래? 그거 오해야, 주희야. 너도 아닌 거 알잖아.

아니, 그냥 너한테 질려서. 뭣도 아닌 게 심각한 척하는 거 꼴보기 싫어서.


주희의 두 번째 연애가 그렇게 끝이 났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며칠 뒤 학교에서 세진이 그 여자애와 같이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을 봐버렸다. 차라리 서안이를 좋아하지. 그럼 미친놈이라고 욕을 했을지는 몰라도 미워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을 텐데, 뭐 그런 생각을 했던가. 그리 오래 힘들지는 않았다.




종강을 맞이하고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릴 때 꿈이 갑자기 생각났고 그걸 이루기로 마음먹는 게 낭만이라면 이것이 주희 인생의 마지막 낭만이 될 것이었다. 3학년 2학기는 정신없이 바빴다. 아카데미 수업을 듣고 학점 관리를 하고 다음 학기는 어학연수를 갈 작정이었다. 서안과는 서로 학교에서 스치듯 지나가면서 겨우 보거나 아주 가끔은 시간을 내서 통화를 했다. 대학에서의 4년이 너무도 잠깐이라고, 아직 한 해가 남았지만 이후의 날들을 생각하면 두렵다고, 서안은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나도 휴학할까, 아니지 대학원 가야 하는데. 횡설수설하는 서안이. 네가 안전했으면 좋겠어. 뜬금없이 주희는 그런 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출국 이틀 전 서안과 인사동에서 만나 만두전골을 먹었다. 원래도 말이 많은 서안은 그날따라 더 신이 나서 이런저런 말을 재잘댔다.


주희, 개성 만두는 사람 발바닥만 하대. 박완서 작가의 『나목』이란 작품에 보면 그 이야기가 나오거든? 이 만두 되게 크다. 이거 개성 만두겠지? 발바닥 생각하면서 먹으면 먹기 좀 그런가?


헤어지며 서안은 주희의 손에 작은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집에 가는 길 봉투를 열어 보니 분홍색 털장갑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글씨도 못 쓰는 애가 손 편지는 왜 이리도 좋아하는지. 주희는 웃으며 겉봉을 뜯었다. 생각보다 짧은 편지.


주희에게

1학년 때만큼은 아니어도 처음 만나 지금까지 대학 생활 내내 몸과 마음 꼭 붙어 다니던 네가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을 넘게 날아가 다른 땅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게 이 편지를 쓰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아.

생각해 보면 너와 난 참 다른 사람인데, 답답한 소리나 하고 행동도 모자란 나를 바라봐 주고 기다려 주던 네가 늘 고마웠어. 예쁘고 똑똑한 네가 마음까지 따뜻하다니, 이렇게 완벽한 아이가 내 친구여서 속으로 꽤 자주 자랑스러웠다. 속으로만 자랑스러워했는데 사실 티 다 났지?

너와 세진이가 헤어진 뒤에도 세진이를 끊어 내지 못해서 미안해. 너의 환송 편지에 그 애 이름 써서 미안하지만,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영영 말하지 못 할 것 같아서. 너보다 세진이가 소중하거나 해서가 아냐. 어떤 관계의 매듭을 짓기엔 그 애와 나의 거리가 어설프고 어색하더라고. 결국 끝날 관계이니 그냥 둬 버리자고…. 그런 마음으로 이 인연의 끝을 바라보고 있어.

사랑하는 주희야. 나는 네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좋아. 내가 오래된 과일을 보고 망연해할 때 주스로나 갈아 먹자고 말할 네가 좋아. 너의 건강함이 좋아.

한 해 동안 많이 배우고 느끼고 성장해서 돌아와. 나는 여기서 하던 대로 헤매고 있을게.

주희의 행복을 바라며, 서안이가.


서안이 자주 쓰는 문장 구조, 너의 무엇이 좋아.

서안은 주희의 건강함을 주희의 잔잔함을 좋아했다. 늘 그랬듯 애정을 표현한 이 편지에 모욕감을 느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주희는 예정대로 출국하여 예정대로 귀국했다. 귀국 후 서안을 만났고 이따금 안부를 주고 받았지만 관계가 예전 같지는 않았다. 그날의 비릿한 모욕감은 일찌감치 흐릿해졌는데도 그와는 관계없이 묘하게 엇나가고 멀어졌다.


이제 주희는 한 지방 방송사의 아나운서가 되었다. 공고가 올라올 때마다 주요 언론사에도 계속하여 지원할 작정이다. 알아야 할 건 다 알고 있어. 놓치는 게 있다 해도 난 안전해. 틈이 나면 이런 싱거운 말들을 중얼거리며 주희는 다음 걸음을 걷는다.







지난 주 올린 「서안」을 쓰고 나서 연이어 썼던 단편입니다.

주희를 질투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했는데, 생각하고 헤아릴수록 좋아져 버렸어요.

분명, 주희는 주희로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