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히 막연할 때, 미지(未知)와
부정(不定)

by 윤세영


‘딴-생각’을 시작으로 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보름을 넘어섰다. 처음에 친구가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했을 때는 솔직히 불가능하다는 마음이었다. 한 명이 본다 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본다. 의도치 않게, 실수라 변명하고 싶은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내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컸다.


이렇듯 엄두도 못 내던 일을 시작할 땐 시선이 온통 안으로만 향하게 되어서인지 긴장과 불안에 휩싸인다. 그래도, 아무리 부끄러운 글이라 해도 써서 내보이는 연습을 하자. 그런 결심에서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혼자만의 약속이나마 지키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리고 이는 물론 스스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왜인지 무언가가 빠진 듯한 알 수 없는 기분이 자꾸 들었는데, 요사이 친구와 통화를 하다 그 이유가 선명해졌다.


그래도 이제 사람들이 읽을 글을 올리는 거잖아.

응 꾸준히 읽어 주시는 분도 있어. 누군가는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 신기해. 그런데 그러다가 아니야, 아무도 안 읽는 것 같아. 싶은 글도 있지. 읽히고 싶으면서도 싫은 기분이 드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일을 시작했으므로, 처음 글을 올린 날엔 무사히 글을 올렸다는 뿌듯함이 컸는데 요사이엔 부쩍 글 너머의 대상들에 시선이 간다. 의식하지 않기로 했는데. 나 지금 또 막연하구나.


막연히 막연할 때, 조용히 꺼내 드는 말들이 있다. 누구 아무. 이들은 주로 의문의 기능과 관련되는 대명사들로 문법상으로 미지칭과 부정칭으로 불린다. 누가 이 글을 읽고 있다. 이때의 ‘누구’는 지금 나의 가리킴을 받고 있는 지시 대상이 무언지 뚜렷이 모를 때 사용한다. 지금 누구인지 모를 당신은 내게는 미지(未知)의 대상. 그러니 ‘누구’는 미지칭이다.1)


물론 내가 또 의심하고 있는 바, 이 글을 아무도 읽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의 ‘아무’는 지시 대상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부정칭이라 한다. 그러니까 내가, 다소 주접스럽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손을 흔들든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해도 아무도 이곳에 없을 수 있단 소리. 가리킬 대상이 없어 정하질 못하고 다소 부산스러운 상태, 부정(不定)으로 남는다.


이렇게 미지칭과 부정칭에 멈춰 서서 또 딴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종류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위의 ‘누구’나 ‘아무’와 같은 인칭대명사 외에 지시대명사는 ‘어디’, ‘아무데’, ‘아무것’ 정도가 거의 다이다. 우리말 자체가 생각해 보면 대명사가 그리 발달한 언어가 아니다. 특히 3인칭 대명사의 경우는 그 쓰임이 더욱 한정적인 느낌이다. 나부터도 대화에서는 거의 쓰지 않고 글을 쓸 때 쓴다 해도 문장에 너무 많이 나오면 어떻게든 고치려 하는 편이니까.


3인칭 대명사는 중세국어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거의 지배적이다. 문학사에서 보자면 현대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에, 김동인의 작품쯤부터 쓰이기 시작했으니 문자 언어에서 주로 쓰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 ‘우리’나 ‘너’와 같은 1인칭, 2인칭의 지시대명사는 그래도 어색함 없이 쓰는 편이라 하여도 또 그것을 너무 많이 쓰는 건 다소 경계하는 느낌마저 있다. 활발히 쓰이지 않으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우리말에 그런 범주의 어휘들이 꽤 있다. 경제적이지 않지만 절대적인 것들이.


그 종류는 많지 않아도, 대명사는 무엇이든 가리킬 수 있기에 필요할 시 언제든 든든하게 꺼내 쓸 수 있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 반대로 같은 대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이 상황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한다. 영희도 철수도 에드워드도 ‘나는 너를 사랑해’의 나와 너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다. 오늘의 당신이 내일은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우리도 언제든 단지 대명사의 자리에 놓일 수 있다는 건 좀 차갑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를 대명사로 부르길 꺼리는 데엔 그 차가움을 경계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을 수도. 날도 추운데, 생각은 좀 따뜻하게 해야 하겠지.


모든 것을 알 수 없어서 우리에겐 대명사가 필요하다. 아무도의 시간을 지나 누구일지, 무엇일지 모를 미지의 대상마저도 생각하고 부르는 우리들. 그러니 단지 편리하기 위해서만 쓰는 말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대명사는 구체적 상황 안에서 쓰이므로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단어들이다. 관계와 상황을 섬세하게 가르는 가까운 이야기들. 쓰다 보니 막연함은 어느새 슬몃 흐려지고 그저 아주 친밀하고 따뜻한 대화를 오래 나누고 싶어진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엔 꼭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대사가 생각난다.

특정 표현들이 그분 작품 곳곳에 반복되는 경우들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크리스마스 깜빡등.

예를 들면 이렇게 쓰인다.


깜빡깜빡, 나는 크리스마스 깜빡등이야.


등장인물이 자꾸 깜빡 잊는 자신을 향해 하는 말.

사람마다 쓰다듬으며 쓰는 특별한 표현, 그 자신만의 말의 생김이 있을 것이다.

나도 내 안의 소중한 말들을 끝내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지. 새해의 첫 목요일은 어떨지 또 알 수 없으나, 우선 한 해의 마지막 목요일은 끝내 해냈으니, 스스로를 칭찬하며 하루를 보내야겠다.





1) 미지칭은 ‘(이)나’, ‘도’와 같은 보조사가 결합하게 되면 부정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예) 누구도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참고문헌

고영근·구본관,『우리말 문법론』,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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