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인손목증후군과 명명(命名)의
세계

by 윤세영


종이에 손가락 베이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 위해(危害)나 공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상대에게 무방비로 상처를 입는 일은 꽤나 불쾌하다. 바로 어제도 나는 종이에 손을 베였고, 그런 순간엔 영락없이 이런 생각에 막막해진다.


살면서 이걸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할까.


단숨에 빠져버리는 절망 상태. 이상하지. 부주의하고 헐렁한 사람인지라 원체 잘 다친다. 그런데 더 심한 상처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유독, 종이에 베일 때만, 이런 과도한 비관이 찾아든다. 그만큼 그 얕지만 날카로운 자극이 큰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거겠지. 평소처럼 손쉽게, 스스로를 예민하고 피곤한 사람으로 여기는 대신 이제는 이 심리적 증상에 이름을 지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감정을 정리할 때, 그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더 없으니까. 그리하여 내가 지은, 이 심리적 절망 상태의 이름은 바로 꺾인손목증후군. 나만의 개인어 사전에 오늘부로 다음과 같이 등재된다.


꺾인손목증후군

명사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은 절망에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심리적 증상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나는 주로 아침마다 손목이 꺾인 채로 잠에서 깨는데, 그 순간엔 손목을 영영 쓸 수 없을 것처럼 몹시 아프지만, 생각보다 통증의 지속 시간은 짧다. 이 용어는 바로 그것에 기인한 것으로, 끝장난 것 같은 손목이 결국엔 매번 다시 무탈히 움직이는 것처럼 — 이제 나이도 적지 않은데 언제까지 괜찮을지 조금 염려스럽긴 하다 — 고깟 종이에 손 좀 베였다고 해서 너무 오래 절망 말고, 다시 보송한 마음으로 빠르게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나 홀로 쓰기 위한 이 명명(命名) 행위가 무슨 대단한 의미를 지니겠냐마는, 이렇게 이름을 짓고 보니 슬쩍 재미가 있다. 앞으로 몇 번쯤은 종이에 손을 더 베인다 해도 괜찮을 것만 같다. 말 자체, 혹은 그 말이 지닌 의미에서 비롯되는 힘은 참 신기하다. 유행어랄지 새로운 표현들을 먼저 만들고, 그것이 널리 쓰이는 걸 본 사람들은 얼마나 신이 났을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명명 행위’라는 표현을 썼지만, 결국 이것은 조어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한창 공부를 하고, 또 가르칠 때에는 조어론을 다룰 때 단어를 분석하는 데에 중점을 뒀었다. 이 단어가 하나의 어근(실질적 의미를 지닌 형태소)으로 이루어진 단일어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요소들이 결합된 복합어인지. 복합어라면 복수의 어근들이 결합된 합성어인지, 어근에 접사가 결합된 파생어인지.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관심을 가지고 자주 생각할 만한 건, 이렇게 분석을 중시하는 관점이 아닌 단어의 형성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방식, 그리고 그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관심이 바로 그것이다.


수업 시간에 날 번번이 깊은 잠의 수렁에 빠뜨렸던 촘스키(Noam Chomsky, 무려 1928년생)는 사람들이 자기 모국어의 문법을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주목했다. 우리에겐 소위 ‘언어습득장치’가 있는데 그것을 통해 스스로 문법 규칙을 체득하여 무수한 문장을 만들고, 또 난생 처음 듣는 말도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우리 국어의 통사 구조 그대로 어근들을 배열하여 ‘꺾인손목증후군’이란 말을 만들어낸 것처럼.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이름 짓기가 대체, 어떻게 이렇게도 간단히 가능한 것일까.


어릴 땐 날 너무나 힘들게 한 촘스키 옹이지만, 그가 말하는 생성주의를 생각해 보면 이 당연한 듯하면서도 신비로운, 인간의 언어 능력이 너무나 경이롭다. 수업 열심히 들을 것을…. 후회와 함께 그의 저서를 얼마 전 열심히 읽었지만 좀처럼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난생 처음 듣는 말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잘못된 서술은 아닌지 의심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이야기가 또 다른 곳으로 흘렀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순전히 재미를 위해 혼자 쓸 단어를 만들고(나의 ‘꺾인손목증후군’처럼), 신조어가 끝없이 등장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애칭을 지어 주는. 하나의 개체나 상황이나 현상에 대한 이 모든 명명 행위는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하는 자연스럽고도 흥미로운 방식인 셈이다.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온전한 새해가 왔다.

종이에 손을 베일 때마다 망연해하는 것도 분명 나의 한 모습이지만 새날들엔 좀 더 힘을 내려 한다. 급하게 곤두박질치는 어떤 날들이 있다면, 빠르게 알아채고 그 상태는 오래 가지 않는다고, 수줍게 꺾인손목증후군이라 적힌 낱말 카드를 보여준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2026년은 ‘붉은 말의 해’라고 한다. 새로이 놓인 또 다른 한 해에 나만의 이름을 지어 주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문득 이제니 시인의 시 「잔디는 유일해진다」가 떠오른다.1)

시인은 푸른 들판 위, 바람에 흩날리는 잔디를 바라보며 ‘매일매일 조금씩 조금씩 유일해진다’고 말한다. 나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지나며 매일매일 유일해지고 싶다. 나를 이해하고 또 온전히 표현하는 그런 한 해를, 천천히 누리고 싶다. 그러니, 시인의 표현을 빌려 올해를, ‘유일한 잔디의 해’라 명명(命名)해 볼까.

이렇게 쓰고 보니 오랜만에 새해맞이가 자못 설렌다.





1) 이제니, 「잔디는 유일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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